이른바 근대 정신의 핵심은 '개인'(나의 주인은 왕이나 신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이고 오늘날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 적혀 있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그런 근대 정신을 보장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난 50여 년 동안 반공주의 외의 모든 사회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온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건재하고, 이미 3년 전 예술 작품에 대한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얻고도 여전히 예술작품에 대한 온갖 검열이 횡행하는 이 나라를 근대적인 국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거짓말>은 국민의정부가 만든 '민주적 검열기구'인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3개월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영화다. 알다시피 등급보류란 지정한 기간 동안 영화를 알아서 가위질 해오게 하는 손 안대고 코푸는 검열장치다. 등급보류는 1~3개월로 나눠지는데 기간을 나누는 이유는 자를 게 많을수록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예술적 배려' 때문이다.(공윤이 공진협을 거쳐 등급위로 바뀐 과정이나 등급보류가 뭔지 조차 모르는 독자는 이쯤 해서 읽기를 중단하고 조종국 기자의 지사적 저널리즘을 되훑어 보시길)
어느 시대든 검열자들이 내세우는 두 가지 핑계는 사회 안전과 도덕이다. 우리의 경우 사회 안전은 주로 반공으로 표현되어 왔지만 이젠 그 반공이 얼마나 맹랑한 반공이었는가가 대체로 밝혀진 편이라 새삼 말하기가 욕스럽다. 도덕은 주로 청소년문제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추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보이는 일이 그들의 정서 함양에 해가 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나라의 성인들은 그들에게 곱고 바른 것을 많이 보여줄 의무가 있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해를 주는 현실이 '예술작품 속의 현실'인가 '실제 현실'인가 하는 점이다. 청소년들이 24시간 숨쉬는 실제 현실엔 어떤 도덕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판에, '청소년을 위해' 소설 한편 영화 한편 속의 도덕을 따지는 일이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은 단지 어젯밤 술집에서 남의 딸을 희롱한 이 나라의 성인 남자가 오늘밤 제 딸이 같은 일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눈물겨운 부성애에 봉사하는 일일뿐이다.
나는 아직 <거짓말>을 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장정일의 소설을 좋아한 일이 없고(산문을 통해선 그가 존중할 만한 작가임을 확인했지만)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장선우엔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특히 그가 <거짓말>과 검열문제를 두고 자꾸 색즉시공이니 공즉시색이니 하면서 도사연 하는 일은 마땅치 않다. 그가 선방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길 바라며 그 영화가 이미 사회적 의제가 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소한의 계몽적 태도를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닐까.) 그러나 장정일과 장선우와 그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내 입장과 장정일과 장선우와 그들의 예술작품에 가해진 검열에 대한 내 입장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모든 검열의 목적은 한 사회의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그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그 사회의 정신세계를 묶어두려는 데 있다. 해서 검열은 언제나 한 사회의 정신적 생산물 가운데 가장 앞선, 가장 돌출된 부분만을 대상으로 한다. 뒤집어 말하면 한 사회에서 검열자의 먹이가 되는 정신적 생산물은 (그것이 설사 쓸모 없는 쓰레기처럼 보인다 해도) 그 사회의 정신세계의 확장을 위해 제 몸을 태우는 숭고함을 갖는 것이다. 나는 장정일(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과 장선우(그의 태도가 마땅치 않지만)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용기를 존경하며 그들의 예술작품 <거짓말>(아직 보지 않았지만)을 진심으로 지지한다. 나는 <거짓말>을 시사회장이 아닌 내가 사는 곳 근처의 극장에서 내 돈 내고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추신 : <거짓말>은 '세계적'인 베니스영화제에 가 있고 이 글이 독자에게 읽힐 무렵엔 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 나라의 사대주의 수준으로 볼 때, 이 영화가 상을 받는다면 검열자들은 두 번 쪽팔리게 됐다. '세계적'인 예술작품을 등급보류한 일로 한번, '세계적'인 예술작품의 등급보류를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할 일로 한번 말이다. 하긴 상을 받든 못 받든 그 빌어먹을 검열에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한 우리도 '세계적'으로 쪽팔리긴 매한가지다. 아, 우리 쪽의 거처는. | 씨네21 1999년_9월
'1999/09'에 해당되는 글 2건
- 1999/09/21 쪽의 거처
- 1999/09/07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1999/09/21 16:46
1999/09/07 16:45
(내가 가진 얼마간의 좌파 성향과 상관없이 얘기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미덕은 다양성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하며 여러 다른 의견간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최선의 사회적 합의를 얻는다. 그런 지리한 과정은 좌든 우든 좀더 ‘능률적인’ 사회 시스템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답답함을 주지만, 개인의 개성과 사회 정의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는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다.
그 신문은 다양성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테러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대사는 그 신문의 정수다. 이장희나 최장집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그 신문이 저지른 사실 왜곡의 수준은 우리의 이성을 강간한다. 그 신문은 사회적 합의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전쟁이 나자 국민을 버리고 도주했고 결국엔 중학생까지 가세한 저항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를 이 나라의 아버지라 일컫는다. 그 신문은, 일제 식민지 시절 바로 그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공간에서는 사회주의자였다가 동료들을 밀고하는 대가로 살아남아 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나로 제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 든 또 다른 독재자를 민족의 신으로 추앙한다. 지난 50년을 통틀어 그 신문이 지지해온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이다.
서글픈 일은 그 신문이 이 나라에서 300만 부(그 신문의 주장대로라면)나 팔린다는 사실이다. 300만 부가 팔린다는 얘긴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뜻이며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얘긴 그 신문이 이 나라의 정신을 대체로 지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근대적 외관과 봉건적 정신’(빌어먹을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인) 속에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 신문을 즐겨 보는 일이 되레 당연하다 싶다. 언뜻 보기에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은 <동아>나 <한국> 같은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고 그 신문의 문화면은 <한겨레> 만큼이나 진보적이다. 전체적으로 그 신문은 한국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보다 볼 게 많고 재미있다.
문제는 그 신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만만치 않은(적어도 나 같은 건달보다는 훨씬 훌륭해 보이는)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그 신문이 다른 보수신문들과 다른 게 무어냐, 반문할 때 맥이 풀린다. 나는 차라리 이 나라의 전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망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어떤 신문이든 글만 바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이런 순진한 사람들에게 <월간조선>과 그 신문의 문화면을 찬찬히 비교해 보기를 권한다. 그 둘 사이의 믿기 힘든 간격이야말로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운영 원리다.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이 평소 다른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다가 먹이가 나타났을 때만 기동한다면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 조직’의 별동대로서 상시적인 전투를 수행한다.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정신이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사무라이 정신과 몽골기마민족론 따위의 위험천만한 파시즘 맨털리티로 무장되어 있다. 그에 반해 그 신문의 문화면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을 중화하는 임무를 띤다. 문화와 학술로 포장된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담론들은 그 신문에 어떤 위협도 주지 않지만, 수많은 좌파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기고하는 신문은 그저 건전한 보수 신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의 소품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근대성을 가진 나라라면 지식인이 극우 신문에 기고하는 일만으로도 사회적 스캔들이 된다는 상식쯤은 갖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신문이 극우신문이라는 의견이 아직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인정한다. 게다가 그 신문에 출연하는 이들 가운데는 머지 않아 나의 미더운 벗이 될 사람이 여럿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파시스트의 부역자라 게시하기보다는 지루함을 무릅쓰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는다. 결국 우리는 함께 외칠 것이다. "벗이여,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 씨네21 1999년_8월
그 신문은 다양성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테러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대사는 그 신문의 정수다. 이장희나 최장집을 빨갱이로 몰기 위해 그 신문이 저지른 사실 왜곡의 수준은 우리의 이성을 강간한다. 그 신문은 사회적 합의에 반대한다. 그 신문은 전쟁이 나자 국민을 버리고 도주했고 결국엔 중학생까지 가세한 저항에 의해 쫓겨난 독재자를 이 나라의 아버지라 일컫는다. 그 신문은, 일제 식민지 시절 바로 그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공간에서는 사회주의자였다가 동료들을 밀고하는 대가로 살아남아 쿠테타로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하나로 제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 든 또 다른 독재자를 민족의 신으로 추앙한다. 지난 50년을 통틀어 그 신문이 지지해온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이다.
서글픈 일은 그 신문이 이 나라에서 300만 부(그 신문의 주장대로라면)나 팔린다는 사실이다. 300만 부가 팔린다는 얘긴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뜻이며 천만 명 이상 읽는다는 얘긴 그 신문이 이 나라의 정신을 대체로 지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근대적 외관과 봉건적 정신’(빌어먹을 박정희의 위대한 업적인) 속에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 신문을 즐겨 보는 일이 되레 당연하다 싶다. 언뜻 보기에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은 <동아>나 <한국> 같은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고 그 신문의 문화면은 <한겨레> 만큼이나 진보적이다. 전체적으로 그 신문은 한국에서 발행되는 어떤 신문보다 볼 게 많고 재미있다.
문제는 그 신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만만치 않은(적어도 나 같은 건달보다는 훨씬 훌륭해 보이는) 지적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이 그 신문이 다른 보수신문들과 다른 게 무어냐, 반문할 때 맥이 풀린다. 나는 차라리 이 나라의 전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을 원망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어떤 신문이든 글만 바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이런 순진한 사람들에게 <월간조선>과 그 신문의 문화면을 찬찬히 비교해 보기를 권한다. 그 둘 사이의 믿기 힘든 간격이야말로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운영 원리다.
그 신문의 정치 사회면이 평소 다른 보수신문과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다가 먹이가 나타났을 때만 기동한다면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 조직’의 별동대로서 상시적인 전투를 수행한다. <월간조선>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의 정신이 좀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사무라이 정신과 몽골기마민족론 따위의 위험천만한 파시즘 맨털리티로 무장되어 있다. 그에 반해 그 신문의 문화면은 ‘<조선일보>라는 극우조직’을 중화하는 임무를 띤다. 문화와 학술로 포장된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담론들은 그 신문에 어떤 위협도 주지 않지만, 수많은 좌파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기고하는 신문은 그저 건전한 보수 신문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신문의 소품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지식인들이, 오늘날 근대성을 가진 나라라면 지식인이 극우 신문에 기고하는 일만으로도 사회적 스캔들이 된다는 상식쯤은 갖길 바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신문이 극우신문이라는 의견이 아직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현실을 인정한다. 게다가 그 신문에 출연하는 이들 가운데는 머지 않아 나의 미더운 벗이 될 사람이 여럿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파시스트의 부역자라 게시하기보다는 지루함을 무릅쓰는 논쟁이나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믿는다. 결국 우리는 함께 외칠 것이다. "벗이여, 그 신문에 침을 뱉어라." | 씨네21 1999년_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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