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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8/10/13 교양
1998/10/13 16:18
서울 나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정확하게 말해서 버스 기사가 저 들으려고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승객 가운데 하나인 나에게 들려온다. 처음 듣는 프로그램이지만 사람들이 전화로 자기 사연을 이야기하고 전화를 걸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듣는 식인 모양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남의 체험을 즐긴다. 젊은 여자가 재미없는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은 다음 등장한 남자다.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피디수첩'도 '정범구의 세상읽기'도 아닌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등장한 '구사대'에 내 귀는 긴장한다. 그러나 긴장은 이어지지 않는다.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는 '구사대'를 모른다.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뭐라구요?"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 구사대가 뭐지?" "제가 옛날에 구사대였거든요." "구사대라, 회사를 구하는 대다 이건데, 어쨌든 그래서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는 어물쩍(방송용어로 순발력이라고 하는) 넘어간다.

'구사대'라는 말을 모르는 30대 여자와 40대 남자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 나는 당혹스럽다. 나는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그것은 결국엔 맨얼굴이 될 유한계급의 사회적인 메이크업일 뿐이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반드시 자기 힘으로가 아니어도),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교양은 근대적인 사회에 주어지는 축복이면서 더욱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교양은 그지없는 진보다.(보수적인 교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보수란 사상이 아니라 그저 '욕망'이다. 남보다 더 가진 걸 내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상인가.)

버스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라디오 소리는 디젤엔진에 묻힌다. 나는 '구사대'를 모르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의 애처로운 교양과 그들이 꾸려주는 허섭쓰레기를 들으며 피곤한 저녁을 맞는 근로대중들의 가소로운 교양 환경을, 사회문화적인 이슈만 있으면 유럽과 비교하여 제나라를 비하하는 게 일인 문화인들(유럽형 한국인)의 안개 낀 교양 환경과 비교한다. 나는 30대 여자 코미디언과 40대 남자 가수의 애처로운 교양을 용서한다. 나는 다시 썩은 세상을 욕하면서 그 기원인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강북 아저씨들의 시궁쥐 같은 교양과, 여전히 옛 여당을 그리는 강남 아줌마들의 암내나는 교양과, 조선일보를 보며 하루를 안도하는 파시스트들의 구역질나는 교양과 그 이빨에 편승하여 안도하는 중산층의 악어새 같은 교양에 대해 생각한다.

서럽게도 이 나라의 어디에도 조직적인 교양은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이 나라는 봉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윗줄에 있는 놈들은 여전히 '마님'의 교양(사람의 귀천은 하늘이 정한 것이며 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을 유지하고 아랫줄에 있는 이들은 여전히 '머슴'의 교양(모든 것은 운명이며 주는 대로 받아먹고 죽은 듯이 일한다)을 간직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이 나라의 나머지를 머리통 속에 넣고 검색해 보지만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폴더에 다다르자 또다시 미궁에 빠진다. 글쓰는 일을 '내공'이니 '진검승부'니 하며 한낱 재주 겨루기로 여기는 그 양아치 같은 교양과, 사상이라는 패키지 상품을 10년에 한번씩 개비하는 그 이동변소 같은 교양과... | 씨네21 1998년_9월
1998/10/13 16:18 1998/10/13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