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여론의 힘으로 작동한다. 강력한 파시즘 체제란 결국 여론 장악에 성공적인 파시즘 체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역시 여론을 기반으로 집행된다. 흔히 다수 대중은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고 파시스트가 억압한(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없다. 표현의 자유는 급진 이념, 성, 폭력 등에 대한 다수 대중의 반감에 힘입어 억압된다. 그 반감이 상당 부분 조작되거나 선동된 것이라는 반론은 근거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 '조작되거나 선동되는 대중'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이다.
대중의 의식이 진전될수록 표현의 자유 역시 진전되는 경향이 있지만, 여론을 통한 표현의 자유 억압이 완전히 종식되는 일은 없다. 표현의 자유가 어지간해진 상태에서 흔히 사용되는 억압 수법은 '비평'의 문제와 '허용(금지)'의 문제를 정서적으로 뒤섞는 것이다. '더러운 잠'에 대한 여론을 보면 그런 현상이 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이 작품이 비평의 대상이 되기엔 지나치게 조야하다고 본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말과 '허용되어선 안된다'는 말은 차원이 다르다. 후자는 파시스트의 주문을 외우는 일이며, 이미 확보된 표현의 자유의 수준과 범위를 전반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 이미 확보된. 지금 당연하다고 믿는 표현의 자유들은 실은 상당한 시간 동안 허용 한계선을 넘나드는 싸움을 벌인 소수의 작가/예술가들이 쟁취해낸(준)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앞서 말했듯 파시스트와의 싸움이자 다수 대중 혹은 여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싸움은 이 순간에도 진행된다. 나를 대중과 분리하는 태도, 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충분한 양식을 갖고 있다는 자부는 의심되어야만 한다. 자유주의가 진전될수록 파시즘은 모든 곳에 편재(omnipresence)하기 때문이다. 내 안의, 우리 안의 파시즘이 괜한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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