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과 정서의 차이가 있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말하는 게 부적절하게 느껴지거나 억울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보며 그것들을 관통하는 형용사 하나가 떠올랐다. ‘던적스럽다.(하는 짓이 보기에 매우 치사하고 더러운 데가 있다.)’ 그렇다. 그것은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이었다.
대개의 사람이 그런 대로 사람꼴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은 두 가지 눈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나를 보는 눈’이다. 양심, 윤리의식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이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만일 눈이 그것뿐이라면 단지 자기 내면 안에서 시야일 뿐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실제로 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보완하는 또 하나의 눈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눈’이다. 체면이나 위신, 인정 욕구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전자의 눈은 ‘이득이긴 하지만’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지만, 후자의 눈은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매우 현실적인 그래서 좀 더 강력한 억지력을 가진 전제가 들어 있다.
에피소드들은 우리 사회가 첫 번째 눈은 고사하고 두 번째 눈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손해를 보는 행동조차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에 몰입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좀 더 분명한 이유는 그 에피소드들이 결코 개인의 즉흥적 해프닝이 아니라는 것, 일련의 조직적 논의의 결과라는 데 있다. 누군가 그 아이디어를 내고 여럿이 진지한 숙고와 토론을 벌였으며 좋은 안이라는 합의와 결론이 내려져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물론 이건 막 시작된 일은 아니다.
15년 전 내가 ‘어린이 교양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어느 날 불현듯 ‘누구도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극우 꼴통 아비도 제 아이에게 ‘사람이란’ ‘인생이란’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사람이 공부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동무들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 ‘돈은 꼭 필요한 거지만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받는다.’ 자신은 전혀 그렇게 살지 않더라도 ‘어른은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도 어릴 적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전 수백년 동안도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의 진보적인 부모, 아니 사회주의자 부모조차도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길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시장에서 싸게 팔리는 상품이 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고래가그랬어’ 창간 독자이던 초등학생들은 이제 20대를 넘긴다. 인천 동구청장 이홍수가 예의 반발과 비난 여론 속에서도 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그 후 우리 사회에서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이 어디까지 갔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언론에서 괭이부리 체험관 때문에 야단이 났다. 이 체험관을 누가 계획하고 추진했는지 아직 관광개발과에 묻고 있지 않다. 난 그 사람이 누구든지 적당한 기회를 봐서 칭찬하고 격려해 줄 생각이다. 진정 용기있고 일할 의욕이 있는 직원이기 때문이다. 변화와 개혁. 누군가가 그랬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전쟁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이 소신 충만한 언사 앞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갈수록 줄고 있다. 오늘 던적스러운 일은 내일 그다지 던적스럽지 않다. 상한선은 넘은 지 오래고 속도는 오히려 가파르다. 이대로라면 ‘가난 체험 상품’ 정도는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의 도래가 그리 머지않다. 너나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는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삶과 관련해 가질 수 있는 자부는 그 대열의 비교적 후미에 있다는 사실에나 근거한다. 정말 이렇게밖엔 살 수 없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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