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0 20:15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오독을 발견하곤 한다. ‘감히 박유하를 아렌트에 비교하다니’ 식의 천박한 기지촌적 태도 따윈 접고 가기로 하자. 아렌트의 특별함은 아이히만이라는 악마가 실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한 데 있지 않다. 그런 발견은 아렌트가 아니어도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냉정하게 지켜본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아렌트의 특별함은 그런 발견을 사회적으로 개진한 ‘용기’에 있다. 동족들에게서 어떤 매도와 고초를 당하게 될지 잘 알면서도 말이다. 박유하는 아렌트와 물론 다르다. 그러나 박유하의 용기는 아렌트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다. 박유하의 책에 나오는 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사실관계를 아는 사람은 박유하 한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걸 사회적으로 개진했을 때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를 보인 사람은 박유하뿐이다. 박유하를 친일파라 분개하는, 일본 극우에 봉사한다고 비난하는 진보적인 인텔리들에게 물어보자. 친일파에 분개하는 데 용기가 필요한가. 일제 말기에 친일파에 분개하는 덴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 친일파를 반대하는 덴 아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오늘 한국에서 용기가 필요한 건 오히려 친일파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이다. 아이히만 재판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옹호하는 덴 각별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인텔리가 악의 평범성을 옹호하는 건 용기는커녕 술자리 안주도 못된다. 아렌트 당시의 이스라엘이든 일제 말기의 조선이든 오늘 한국이든 혹은 다른 시간 다른 곳이든,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좀더 나은 현실은 만들어가는 건 오로지 용기, ‘지금 여기’의 용기뿐이다.
2015/03/20 20:15 2015/03/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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