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먹은 제 딸에게 제가 주례를 선다고 했더니, “아빠는 안 어울리는데.” 그랬습니다. 그 아이가 생각하는 주례 선생님의 이미지와 그 아이의 아빠는 많은 거리가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신랑 최호찬 군보다 고작 열 살 쯤 많고, 주류 사회 혹은 제도권 사회에서 내세울 만한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니, 일반적인 의미에서 주례의 자격은 갖추지 못한 셈입니다.
그런 제가 두 사람의 주례 부탁을 받아들인 이유는, 두 사람이 사는 모습이 예뻐 보여서이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저에게 주례를 부탁하는 이유라고 말한 ‘주례의 세 가지 조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첫째, 신랑과 신부 둘 모두 존경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본받을 수 있는 부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 본받을 수 있는 자녀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두 사람은 참 욕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저는 그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두 사람이 저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고맙고, 두 사람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그 고마움을 제 삶에서 책임지는 계기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두 사람에게 다시 세 가지 당부를 합니다.
첫째, 두 사람은 대화를 지속하길 바랍니다. 결혼을 하고 살다보면 연애 시절의 열정은 시들해지고 대화가 적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느 새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잃게 됩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지만 대화는 특히 부부 생활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대화는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민주적이지 않다면 대화가 아닙니다. 특히 신랑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남성 위주의 사회이고, 자신이 그런 사회에서 오랫동안 길들어져 있다는 걸 늘 생각하기 바랍니다.
둘째, 두 사람은 존경을 지속하길 바랍니다. 서로 존경하려면 바로 살아야 합니다. 오랜 권위주의 시절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어느 새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경쟁력이 있으면 살아남고 경쟁력이 없으면 죽어나가는 세상에 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두 사람이 가진 경쟁력을 두 사람의 삶을 안락하게 하는 일보다는, 이 불공정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데 사용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두 사람은 비로소 내 아내 내 남편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서로 존경할 수 있습니다.
셋째, 아이를 세상에 이로운 사람으로 키우길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에 한 인간을 추가한 장본인들로서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길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교육은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서로 존경하며 민주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 바로 교육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아이도 제 부모를 제 부모라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경할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린 세 가지 당부의 말은 제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이 한번쯤 되새겨보는 말이길 기대합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 가운데 혼인 잔치처럼 기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선한 사람들이, 오래도록 두 사람의 출발을 기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두 사람이 살아가길 빕니다.
2004/06/11 23:31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73
-
Subject: 주례사
Tracked from 그냥 그저 그래 2 2004/06/13 04:45 삭제원래 결혼을 하게 되면 김진균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 암으로 돌아가셔서 계획을 바꿀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 또한 아직까지 결혼하지 못한 내
-
Subject: 주례사
Tracked from HOCHAN.NET 2004/06/18 23:48 삭제주례 선생님의 말씀, 항상 기억하면서 살겠습니다.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습니다. 사람은 빚지지 않고 살 수는 없는가 봅니다. 김규항 선배님의 주례사...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