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6/07 23:50
고 이성욱 형은 나보다 두 살 많은 과동기다. 그나 나나 출석일이 부족한 학생들이라 자주는 못 봤지만 친했다. 내가 제대하자 그는 광주 망월동으로 해서 남도를 도는 여행을 제의했다. 보길도에서 동네 청년 넷과 달빛 한점 없는 해변에서 난투를 벌일 때, 함께 바다에 빠져죽자 매달리는 두 놈을 간신히 뉘어놓고 그를 찾으니 웬 걸, 그는 다른 두 놈에게 설교 중이었다. 그는 참 언변이 좋았다.

나를 서울영상집단에 소개해 준 것도 성욱 형이었다. 나에게 다도를 가르치려 애쓴 것도 한국에 처음 들어온 볼쇼이 발레 구경을 시켜 준 것도 그였다. 90년대 들어 그나 나나 어느 새 운동판을 벗어나 살게 되었다. 그는 문학평론과 문화평론을 겸하면서도 일정 수준을 잃지 않는 평론가였고, 이런저런 돈 안 되는 책만 골라서 내던 나도 어쩌다 글이랍시고 쓰게 되었다.

살다보니 조금씩 덜 보게 되었지만 연초엔 꼭 그가 전화를 했다. “규항아, 내 올해는 꼭 장가가야겠다.” “그래야지, 형.” 재작년엔 전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13일 그의 죽음을 신문에서 보고 알았다. 와세다 대에 유학 중이던 그는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가 간암3기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조용히, 심지어 <문화과학> 동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달 쯤 투병하다 죽었다.

그는 글을 적게 쓰는 편이 아니었는데 책은 한권밖에 내지 않았다.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이 책 한권 분량만 되면 제 얼굴 표지에 크게 박아 동작 빠르게 팔아먹는 시류에 비하면 특이한 행동이었다. 그가 죽은 지 한해 반이 지났고 그의 책 네 권이 한꺼번에 나온단다. 돌이켜보면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번도 못했다. 나중에 만나면 그 말부터 해야겠다.
2004/06/07 23:50 2004/06/0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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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paleo protein powder

    Tracked from paleo protein powder 2014/11/08 15:08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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