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8:34 그러고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35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36 온 세상을 벌어들인다 해도 제 목숨에 손해를 본다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37 사실 사람이 제 목숨의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38 간음하고 죄짓는 이 세대 가운데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게 될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앞에서 불같이 화를 낸 예수는 제자들에게 매우 강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물로 제자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영광이 아니라 수난과 죽음의 길이라는 것이다. 목숨을 살리려 하면 읽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라 말한 예수는 바로 뒤이어 “목숨은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핏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예수는 사람에겐 두 가지 목숨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우리가 집착하는 육체의 목숨은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육체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나라를 만드는 일에 나설 때 진정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몸은 살아있되 목숨은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은 지 오래이나 목숨은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한낮 세포 덩어리의 목숨을 선택할 것인가, 영원하고 진정한 목숨을 선택할 것인가?’ 2천년 전에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는 예수는 육체의 목숨에만 집착하는 우리에게 묻는다.
마가 12: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께 와서는 질문하여 이렇게 말했다. 19 "선생님, 모세가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긴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형제가 죽고 부인만 남아서 자식을 두지 못한 경우, 그 동기는 그 부인을 맞아 자기 형제에게 후사를 세워 주도록 해야 합니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아내를 맞았다가 죽고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인을 맞았지만 또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그렇게 일곱이 다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모두 죽고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 그 여인은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사실 일곱이 모두 그 여인을 아내로 삼았으니 말입니다."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들지도 않고 시집가지도 않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에 관해서, 그들이 일으켜진다는 사실을 두고 모세의 책 가시덤불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못했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라 하셨습니다. 27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느님의 말씀이라 생각했는데 거기엔 부활이라는 게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지배자들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활이나 영생, 내세, 후천 세상 등은 피지배 계급의 가치관에 속한다. 현실적 기득권와 안락을 가진 사람들은 내세에 집착하거나 소망할 이유가 별로 없다. 고통스런 현실을 보내는 사람들은 도래할 세상이나 부활 이후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 염원이 올바른 사회의식과 결합하면 미륵사상이나 동학처럼 매우 유장한 진보적 에너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염원 이 지배체제에 포섭될 때 더 악랄한 억압과 착취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현실은 죄로 물든 무상한 것이며 진정한 삶은 내세에 있다는 주장은 서양 중세의 지배 체제가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가장 중요한 논거였다.
예수는 부활이 단지 세포의 재생, 즉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부활이 그러 것이라면 부활은 영생일 수 없다. 되살아난 세포는 다시 노화하고 결국 생명은 죽기 때문이다. 삼일 동안 죽었다가 부활했다면 그저 노화가 삼일 지연되었다는 것 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는 부활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고 한다. 천사는 세포 덩어리가 아니다. 그래서 천사는 수명이 없이 살아 소통한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건 세포덩어리인 몸을 떠나 영원히 살아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이다.(8:34-38) 우리는 흔히 몸이 죽으면 목숨도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이 죽음으로써 오히려 영원한 목숨이 시작되는 것이다. 몸의 목숨에 집착하면 진정한 목숨을 잃는다. 몸을 사용하는 목숨은 단지 목숨의 일부일 뿐이라는 걸 잊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목숨을 잃게 된다.
댓글 ::
죽고 싶을만큼 힘들었던 밤에, 바로 위 구절을 성경에서 읽고, 힘을 얻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예수와 성경에 담긴 예수의 말씀들이 이 시대, 이 세상, 인간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생으로서 학교에서 또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지만, 그런것들보다도 내 내면의 고통과 아픔들로 깊게 들어가는 것만이, 저 위의 구절처럼, 제 십자가를 지고 어둠을 완전히 등에 짊어지는 것만이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항상 규항님의 글들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한면만을 보려 하는 이들의 말들에, 너무 개의치 마시고 앞으로도 계속 올바른 시각과 깊은 견해들을 제시해 주시길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고래를 비롯해 규항님의 행보를 말없이 응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힘 내세요!
고통스러울 때 감수성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평온할 땐 대수롭지 않던 구절이 고통스러운 어느 때는 와락 눈물이 쏟아지게 만들어 주지요. 그렇게 못난 게 사람이고 또 그래서 바로 사람인 듯 싶습니다. ^^
하지만, 예수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진정한? 목숨으로서 우리에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또 얼마나 믿을만한 자료인가요? 목숨론?은 진부합니다 이순신 장군도 아시는걸요
우선 기본적으로 복음서(사도서)는 과학적 근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초기 로마가톨릭의 입맛에 맞는 복음서를 추려낸 것이고 긴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왜곡이 있었습니다.
부활이 단지 예수와 크리스트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로 전세계 모든 종교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부활로 인한 죄의 씻김은 인본주의와 극렬하게 대치되며 사람들에게 죄의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었죠.
기독교를 옹호하는데 성경을 근거로 드는것처럼 어리석은것은 없다고 봅니다.
아래 어느분도 말하셨는데 댓글 기능은 닫는게 좋지 않을까요... ^ ^
뭘 보고 댓글 기능 닫는게 좋다고 하시는건지?
이정도 논쟁가지고 그러는 것이면 이외수작가님이 보고 크게 한번 웃고 가시겠군요.
스스로를 진보지식인이라고 자처 한다면 대중과의 의사소통 교류는 당연한 것이고 이정도의 제한적 교류도 싫다면 아예 블로그를 운용하지 말거나 진교수처럼 이웃블로거들하고만 이야기 하면 되겠죠.
물론 귀를 닫고 말만 하는것에 대해서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저 또한 김규항님 블로그에 많은 좋은 글들을 봤으니까요.
하지만 악플이 무서워서 의사소통을 피한다면 비겁하단 생각이드는것도 사실입니다.
아직은 악플도 없고 비겁한 처신도 없는걸요.^^ 역시님의 의견은 아마 ‘댓글 달 여력을 아껴서 제대로 된 글을 더 써라’ 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댓글 관련해서 제 고민은 제가 댓글 기능을 운영할 만한 여력이 있는가, 입니다. 이번에 댓글 기능을 연 건 온라인 토론장을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블로그 이전도 하고 해서 방명록 삼아 잠깐 연 것인데, 그래도 댓글이니 제 글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의견 교환은 자연스레 포함되었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확대된 논의(기독교 전반에 관한 논의나 무신론 유신론 논쟁)가 되면 제가 응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공들여 써 보낸 독자 편지에도 일일이 답을 못하는 제가 그럴 순 없지요. 하여튼 조금 더 지켜보면서 판단하겠습니다. 그 가능성의 개요는 이미 저 밑(‘부활’의 댓글에)에 밝힌바 있습니다만..
저는 댓글 기능 아주 좋은데요. 늘 와서 읽기만 하고 기척도 없이 가곤 했는데 인사라도 남길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규항님의 예수론이 제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제가 매주 듣는 설교도 비슷한 입장인 탓에 훈련이 된 듯. 몸이 죽은 후엔 영혼도 죽었으면 하는게 저의 게으른 마음이긴 하지만...ㅎㅎㅎ 그 뒷일이야 아무도 모르는 것, 살아있는 동안에나 죽은 것처럼 살지 말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참, 지난번에 이곳에 고래 pdf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제가 잘 보고 있습니다.
"몸이 죽은 후엔 영혼도 죽었으면 하는 마음"은
게으른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어떤 경지인데요. ^^
블로그 디자인이 전과 같아서 미처 못 알아봤는데, 블로그를 옮기셨군요. 속도도 빨라지고 검색도 잘 돼서 보기 편해졌습니다. 차나 한잔 마시고 자려다가 방문인사 한번 처음으로 남겨봅니다. 저도 한국의 덧글문화에 대해서는 아직은 다소 회의적입니다.
저도 평소 읽기만 하고 돌아가는 독자입니다만, 인사라도 드릴 수 있어 좋다는 에어님의 말씀에도 공감하는 한편, 저 자신도 포털 블로그를 하면서 덧글 기능을 안쓰는 터라 끽다거님 말씀에 좀더 공감합니다. 소통과 소모의 문제랄지, 안쓰면 일견 귀막고 혼자서만 떠드는 모양새가 되어 소통거부자(혹은 비판거부자)로서 오해받거나 스스로도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막상 열고나면 글의 성향에 따라 불필요한 논쟁이 오고가거나 블로거의 의사에 상관없이 소커뮤니티화가 되어 부담을 받게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응대하지 않았을 때의 오해도 번거롭구요. 소통과 소모에 적절한 조율을 늘 서툴러하는 제 개인적 의견이지만요. 그나마 규항님의 이 공간은 별도의 공간이어서 그렇지 포털의 통로 속에 자리잡았다면 조용히 읽다 가는 이마저 질겁하는 덧글로 난무했을지도 모르겠어요. / 아무튼, 글이 길어졌는데 늘 해주시는 말씀 감사히 읽고 듣고 새기고 있습니다. ^^
제가 어리지도 않고 아이도 없어서 고래 독자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김규항님 글을 좋아했고 사실 일반 대중과의 교류가 뜸해진 이후에도 블로그에는 틈틈히 들리며 좋은 글들을 많이보고 갔습니다.
다만 김규항님의 기독교적 인식론만이 저와 대치 될 뿐이죠.
때마침 댓글 기능이 열리고 기독교에 대한 글이 올리시자 규항님 팬이자 기독교관의 비판자로서 의견을 단 것입니다.
댓글이 조금 공격적인것은 기독교관은 제가 양보하기 힘든 부분이라 그랬던 것이죠.
다시 한번 말하자면
저 또한 모태신앙이였고 학창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지만 저 스스로에게 문답을 하며 과학적 접근을 통해 기독교 전반에 대해 회의적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안티크라이스티수준은 안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진보적 지식인이라면 기독교 신자라도 사회에 그것을 투영하는것은 위험하단 생각이 들어서 더욱 김규항님에게 비판적 댓글을 단 것이죠.
김규항님의 소신에 대해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종교는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입니다.
모든 기독교적 생각들이 다 해롭다는 주장은 기독교만이 옳다는 생각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라 잘못된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만일 현실 기독교가 성서를 위에 적은 정도로 해석하고 설파한다면, 기독교가 이명박의 기독교와는 정반대의 것이 된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이롭겠지요.
'과학적 근거'라는 개념은 근대 들어 생긴 것입니다. 그 이전엔 그런 사고가 없었지요. 우리 할머니들만 해도 과학/비과학, 생물/무생물 하는 식의 이분법적 구분이 없었지요? 게다가 양자물리학의 성과를 통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적 태도는 오히려 비과학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 시대의 문제들은 과학적 잣대로 판단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태극님에게 그런 것들보다 좀 더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건, 조금만 더 정중하고 사려 깊은 태도를 가지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끼리의 예의가 온라인에서만 하향 조정 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
우선 공격적인 댓글을 단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디시인사이드에 댓글 논쟁을 하다보니 공격적인 댓글이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우선 기독교관 모두가 해롭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류사에 부정적인 역활을 했다는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제 스스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라고 주장한 것이죠.
더불어 갈릴레오와 뉴턴 이 후 근대과학의 잣대로 예수 시대를 판단하면 안되다고 했지만 고대 그리스시대에 이미 이성적이며 합리적 사고가 존재했습니다.
단적으로 그 그리스 시대의 과학을 로마가톨릭 바로 크리스트교(기독교) 억누르며 다크에이지로 간 것이지요.
그런면에서 김규항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해악을 더욱 극명하게 들어낸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와 성서(경)의 좋은 부분을 발췌해서 사회에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교회 승인 이 후 인류사에 기독교가 끼친 좋은점이라 근 천년동안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죠. 반면에 그 해악은 몇일밤낮으로 말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이명박식의 기독교와 선의 기독교가 있다는것은 기독교도인안의 교리싸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양자론이 근대과학 이 후 인간의 이상적 사고관을 흔들었다는것은 매우 잘 못 알고 있으신 것 입니다.
현대 과학은 거시적 상대성 이론과 미시적 양자론이 두 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 두 이론을 실험적 근거로서 그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혹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확률 해석에 대한 오해시라면 제가 그점을 설명할 내공도 못되고 내용도 방대하니 시중에 나와있는 양자론에 대한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기독교는 이미 천년동안 인류의 실존적 경험으로 인류의 진보에 아무론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진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최근의 사실을 돌아보자면
작게 보면 국내의 대형교회와 기독교의 권력화와 미국의 지적설계론자들의 득세
크게 보면 미국의 제국주의 전쟁도 기독교적 사고관에서 나왔다는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제가 김규항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김규항님이 기독교적 사고관을 간혹 진보적 사고관과 결합하는데에 많은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각자의 신념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며 정의구현사제단처럼 의로운 활동을 하시는 성직자분도 많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라 생각 됩니다.
오히려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종교 자체가 없어지는것이 인류의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로 인한 미움과 고통이 없어진다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워질까요?
한결 낫군요. ^^
자.. 저는 이쯤 하겠습니다.
태극님께서 지적하시는 것과 같이 기독교가 인류사에 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 악 영향을 준 기독교라는 것이 예수의 모습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기독교가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것이 인간사에 해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지금의 거의 모든 기독교의 모습이라고 해도, 쉽게 부정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제 생각은, 규항님의 글은 기독교에 대한 글이 아니라, 예수이야기라는 것이지요.
댓글에 끼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드는 생각을 이야기 해보고 싶어 적고 갑니다.
"예수전"은 언제쯤 책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어느 목사님 말씀처럼 요즘 부자들은 '사후세계'까지 투자영역을 확대하는 거 같아요. 살아서 호사를 누리는 것을 축복이라 믿으니, 죽어서도 좋은 자리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겠죠. 그래서 '지독한 예수쟁이들'이란 말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지배계급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히(자기들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쓰시는 거라 말하며, 죽어서 천당가는 것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보다 더한 이 시대 신자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시편 73편) 4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5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6그들에게는 오만이 목걸이요, 폭력이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 기대한 것보다 더 얻으며, 8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9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음...김규항님이 예수전을 왜 집필하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태극님은 한번 더 검색해서 찾아보시는 게 규항넷의 예수이야기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너무나 공감하는 글이기에 말씀드리고 좀 퍼가겠습니다.^^
댓글로 많은 말씀들이 오가지만 종교가 인간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크게 작용해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것 같습니다. 부정적이던지 긍정적이던지 말이지요. 현 우리사회에서는 부정적인 부분이 더욱 크다는 것도 인정합니다만.. 우리사회에 영향력있는 종교를 부정하는 것보다는 이를 바로잡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실 전 "부정하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중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힘들기도 하지만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