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따금 작업실 근처 기독교 서점에 들른다. 꽤 큰 곳이지만 사람이 많지 않아서 (예수를 부적으로 삼는 쓰레기들이 쌓인 코너만 피하면) 모처럼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앉아서 책보는 곳도 있고 커피도 타먹을 수 있다. 이번엔 문고 두 권을 고르고 작은 액자 한 개를 샀다. 렘브란트가 죽던 해 그린 <돌아온 탕자>.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온갖 되어먹지 못한 짓을 하다하다 더는 갈 데가 없어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물론 하느님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받아들임’은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에게만 가능하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이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임을 말한다.(예수는 ‘하느님이 아버지에서 엄마로 변하셨다’고 말하는 것일 수도, ‘하느님은 본디 엄마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른쪽에 간단치 않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건 큰 아들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이 매우 부당하다고 여기지만 이 순간엔 일단 잠자코 서 있다. 큰 아들은 바로 우리다. 정의와 합리를 좇는, 그래서 하느님에게 늘 불만과 존중의 양가감정 상태를 갖는 우리 말이다. 물론 하느님 역시 그런 우리에게 불만과 존중의 양가감정을 갖는다. 그게 신과 인간의(모든 신과 모든 인간이 아닌, 괜찮은 신과 괜찮은 인간의) 최선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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