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4/25 07:06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아빠는 즐겁다. 갈수록 사람들은 빠르고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만 좋아한다. 그러나 아빠는 이런 아무 것도 아닌 시간, 느리고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시간이 참 좋다.

술을 먹다 단이가 생각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말하는 단이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아빠는 그럴 때 담담한 체 하지만 속으론 아주 많이 기쁘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생각’을 ‘옳은 생각’처럼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아빠는 단이가 아빠의 잘못을 들추어내길, 그래서 아빠가 잘못을 인정하길 기대하곤 한다. 기대는 점점 더 잘 이루어지고 있다.

단이는 단이 이름을 닮았다. ‘丹’(붉을 단). 처음 그 이름을 지었을 때 좋다는 사람이 없었다. 칭찬은커녕 “이름이 그게 뭐야?” “배추 단이냐 무단이야?” 따위 놀리는 말만 가득했다. 그런데 단이가 이름과 합쳐지면서 확 달라지더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말은 아빠가 억울할 만큼 빨리 나왔다.

아빠도 아빠 이름을 조금 닮았다. 단이는 아빠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니? 홀 규에 늘 항, ‘늘 홀로’라는 뜻이다. 아빠는 어른들이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아빠는 이릴 적부터 왠지 그 이름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아빠가 외롭냐고? 그래 아빠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단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다. 사람은 외롭지 않아도 생각은 외로울 수 있단다.

이오덕 할아버지를 기억하니? 아빠가 누구보다 좋아했던 분이지. 아빠는 그분을 돌아가시기 오년 전쯤부터 사귀었다. 할아버지는 워낙 훌륭하게 사셨기에 그 뜻을 따르는 이들이 참 많았다. 그분이 아빠 글을 읽고 연락을 해오자 아빠도 한달음에 만나러 갔다. 그분을 사귀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분은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너무나 외로워하셨다.

아빠는 그분의 외로움이 그분의 올바른 삶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단아. 올바르게 산다는 게 뭘까? 아빠 생각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삶’이다. 사람들은 지난 올바름은 알아보지만 지금 올바른 건 잘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가장 올바른 삶은 언제나 가장 외롭다. 그 외로움만이 세상을 조금씩 낫게 만든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서나 늘 그렇다.

예수님은 가장 외롭게 죽어갔다.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죽인 힘세고 욕심 많은 사람들뿐 아니라 따르고 존경한다는 사람들에서 오히려 더 많았다. 그 후 2천년 동안도 그랬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넘쳐나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예수님은 ‘2천년의 외로움’이다.

단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으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아빠보다 더 많을 거다. 하지만 단이의 거짓 없는 성품과 행동이 단이를 외롭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단이가 외롭길 바라지 않지만 단이가 올바르게 산다면 단이는 어쩔 수 없이 외로울 거다. 단이가 외로울 거라 생각하면 아빠는 마음이 아프다. 외로움은 어디에서 오든 고통스럽기 때문이야. 단이가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 이 편지를 기억하면 좋겠다.

아빠는 아빠 책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었다. “그러나 내 딸 김단이 제 아비가 쓴 글을 읽고 토론을 요구해올 순간을 기다리는 일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아빠는 정말 그 순간을 기다린다. 지금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단이도 술을 좋아하게 될 거다. 내 딸아, 너의 외로움을 사랑한다.
2005/04/25 07:06 2005/04/25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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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딸에게 보내는 편지.

    Tracked from M P S T Y L E 2005/04/25 13:02  삭제

    퍼 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도 이렇겠죠. ^^* 출처 : http://gyuhang.net/archives/2005/04/25@07:06AM.html 딸에게 보내는 편지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

  2. Subject: 딸에게 보내는 편지 (김규항)

    Tracked from Roaring Silence 2005/04/25 13:09  삭제

    딸에게 보내는 편지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3. Subject: 지금 <아프다>는 사실

    Tracked from somedaythere 2005/04/26 23:20  삭제

    딸에게 보내는 편지

  4. Subject: 너의 외로움을 사랑한다

    Tracked from vavy + blog = vlog 2005/04/27 10:30  삭제

    &nbsp; 딸에게 보내는 편지 &nbsp; 편지 쓰신 분, '김규항' 편지 받는 분, 그의 딸 '김단' &nbsp; &nbsp;

  5. Subject: 연습1

    Tracked from RED YANG 2005/05/02 21:12  삭제

    목적도 없이 다른 블로그들을 보다보니 나도 있어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만들기는 했지만 여기에 무엇부터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목적으로 어떤주제로 나의 블로그를 만?

  6. Subject: (김규항)딸에게 보내는 편지

    Tracked from RED YANG 2005/05/02 21:21  삭제

    멋져

  7. Subject: 딸을 사랑하는 스물 여섯가지 방법

    Tracked from 성경번역선교 2005/05/03 23:44  삭제

    1. 건강하고 예쁜 여자는 물을 좋아한다. 여자에게 물 마시는 습관은 아주 중요하다. 물은 습관적으로 충분히 마시면 칼로리를 효과적으로 소모시킬 수 있고, 배고품과 목마름을 혼동해 불필요

  8. Subject: 단이는 어떤 아이일까

    Tracked from brain farts coming your way 2005/05/04 01:23  삭제

    규항.넷에 가끔 들어가본다.늘 막연하게만 내 안에 있던 '저건 fair 하지 않아'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은 좋지 않아' 이런 생각들, 정의와 유익함과 옳음과 선함에 대한 막연한 생각들은 커가면서 ?

  9. Subject: 김규항님 블로그에서 퍼온 글

    Tracked from 윤수달 2005/05/04 03:10  삭제

    딸에게 보내는 편지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10. Subject: [펌]김규항 블로그에서...<딸에게 보내는 편지>

    Tracked from 중심을 가지자~~!! 2005/10/22 20:09  삭제

    단아. 아빠는 지금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다.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아저씨 집이야. 일 때문에 왔지만 “날씨가 죽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둘이 술만 먹고 있다. 아빠는 즐겁다. 갈수?

  11. Subject: &#39;어른&#39;이라는 이름으로

    Tracked from Hasmin의 세상사는 이야기 2005/11/05 11:24  삭제

    어린왕자! 너의 아저씨(생 텍쥐베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더라.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동무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분들은 ‘그

  12. Subject: 김규항, 딸에게 보내는 편지

    Tracked from 매일매일, 생의 한가운데 2007/04/28 18:18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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