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새로운 시위 문화를 주도한 세대라고 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대략 5배 많았다. 경제 양극화와 노동 불안정이 남성 청년의 극우화로 나타나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다. 한국의 특징은 남성 청년의 분노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세대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 청년의 반감 역시 상당하다. 이 ‘내전’ 상황에 대해 깊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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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7 12:52
(이어서) 새로운 시위 문화를 주도한 세대라고 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대략 5배 많았다. 경제 양극화와 노동 불안정이 남성 청년의 극우화로 나타나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다. 한국의 특징은 남성 청년의 분노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세대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성 청년의 반감 역시 상당하다. 이 ‘내전’ 상황에 대해 깊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2024/12/17 12:51
2011년 3월 초·중등교육법 개정으로 한국의 학교에서 체벌이 금지되었다. 그해 중학생이 된, 즉 체벌 금지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는 올해 27살 안팎이다. 시위 문화의 뚜렷한 변화는 ‘체벌 금지 세대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매를 맞고 자란 세대의 시위 문화와 맞지 않고 자란 세대의 시위 문화는 다를 수밖에 없다. 상명하복을 강요당하며 자란 사람들은 조직과 대오, 집단에 좀 더 친화적이다.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개인들의 연합을 이루기 어렵다.
2024/12/07 11:55
여전히 널리 쓰이는 거짓말 하나가 “오랜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이라는 말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비결은 오히려 신음하던 국민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제 식구 챙기며 순응한 국민이 더 많았기 대문이다. 다수는 신음하고 저항하는 소수를 보며 말했다. “북한과 대치 상황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는 어렵지.” “정치라는 게 완벽할 수 있나.” 내 기억 속에 1980년대 중반까지도 군사독재가 물러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돌멩이나 화염병을 넘어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수십만의 군대와 경찰을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런데 1987년 어느 순간 군사독재는 총격전 한번 없이 무너졌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는 늘 그렇다.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사회 성원의 반영이다. 한국의 군사독재는 군사독재에 순응하는 한국인이 더 많아 유지되었고, 나치의 독일 통치는 나치에 순응하는 독일인이 더 많았기 때문에 유지되었다. 인민을 피해자라고만 묘사하는 건 실은 인민을 노예 취급하는 것이다. 주인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군사독재 체제든 나치 체제든 궁극적 책임은 사회의 주인으로서 인민에게 있다. 1999년 무렵, 출소 후 미디어 활동이 한창이던 옛 노동운동가가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실패하면 군사독재가 다시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칼럼에 적었다. “군사독재가 다시 오려면 군사독재 시절의 국민이 필요하다.” 이번 윤석열의 미친 짓이 일단 실패로 돌아간 이유 역시 같다. 한국의 시민은 계엄이 선포되고, 한 도시가 완전히 고립되고, 대놓고 사람들을 가두고 죽이는 게 가능했던 때의 시민이 아니다. 오늘 한국에서 독재 정치나 계엄령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을 꿈꾸거나 시도하는 자들이 완전히 없어져서는 아니다. 사회의 주인으로서 다수 인민의 하한선을 넘기 때문이다. 이제 주인들이 저 미친 윤석열을 끌어내릴 차례다. 2024/12/04 08:57
“결국 윤석열 탄핵 시위에 더 많은 사람이 나오게 할 수 있는 건 윤석열 자신뿐일지도 모른다. 그는 외부 요인과 무관하게, 자신의 말과 행동만으로 인민의 분노와 실망을 증폭시킬 능력이 있다.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 그가 가진 유일한 능력이 아닐까.” 예정에 없던 술자리를 두 군데나 가다니, 어젠 나로서도 좀 이상한 날이었다. 두번째 자리에서 계엄 소식을 들었다. 낮에 저런 글을 썼었는데 말이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낮게 중얼 거렸다. ‘정말 이상한 날이야.’ 하지만 어김없이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모두에게 안부를. 2024/12/03 12:21
랑시에르는 우리가 종종 치안(Police)을 정치(Politics)라고 오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관점에서 진정한 정치는 인민이 법적 통행 공간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변형하는, 시위이다. 한국은 이에 딱 들어맞는 사회다. 주요한 정치 변화가 의회 정치가 아니라 인민의 직접 시위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그만큼 의회 정치가 인민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며, 인민의 정치 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라는 뜻이기도 하다. 윤석열 탄핵 시위가 진행 중이다. 박근혜 때처럼 많은 사람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사람들이 윤석열이 대통령직을 유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그렇진 않다. 분노와 실망이 박근혜 때보다 작다고 보기도 어렵다. 검찰 독재가 윤석열의 문제를 덮고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그건 오히려 대중의 분노와 실망을 가중하는 요인일 것이다.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결정적 이유는 대안의 부재다. 박근혜 탄핵 때는 문재인이 있었다. (당시는 그가 매우 무능하고 비굴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 전이다.) 지금은 어떤가. 이재명? 조국? 결국 윤석열 탄핵 시위에 더 많은 사람이 나오게 할 수 있는 건 윤석열 자신뿐일지도 모른다. 그는 외부 요인과 무관하게, 자신의 말과 행동만으로 인민의 분노와 실망을 증폭시킬 능력이 있다. 자신을 탄핵시킬 능력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 그가 가진 유일한 능력이 아닐까. 하지만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그가 탄핵된다 해도, 그다음은 무엇인가. 교수들의 비장한 시국 선언이 사람들의 더 많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이를 결국 민주당 지지 선언으로 본다. 참여 교수 중 일부가 진보 정당 지지자라면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오해를 만든 건 민주당을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교수들 자신이다. 기존 진보 정치가 인민의 신망을 잃은 것도 독자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비판적 지지니 선거 연합이니 하는 논리로 양당 체제에 포섭되어 갔기 때문 아닌가. 교수들이 완전히 기업화·자본화한 대학을 뛰쳐나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면서도, 시국 선언이라는 고전적 형식을 선택한 건, 사회 지성의 중요한 담당자로서 책임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들은 양당 체제를 넘어서는 대안을 말해야 한다. 대안은 당장 현실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현실 구현은 정치인의 일이고, 지식인의 일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사회를 비판 속에서 상상하고 말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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