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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5:10
흔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감정이 섬세하고 풍부하다고 하지만, 실은 거꾸로 된 말이다. 남성이 그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남자 아이는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맞춰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감정들을 억압당하며, 결국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여성이 남성보다 잘 운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울어야 할 때 울 줄 모르는 것이다. 근래 아들에게 ‘울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자신의 감정과 연결할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남자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남성들은 감정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 작가의 소설이나 여성 감독의 영화는 이런 노력에 큰 도움을 준다. 이 작품들은 남성에게 그 자체로 감정 공부이며, 계몽적인 역할을 한다.
2024/09/11 14:13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고생이라곤 모르며 살아가는 해맑은 얼굴도 이면엔 나름의 상처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의 상처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치유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상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상처는 가스라이팅의 좋은 재료다. 상대의 마음에 남은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불안감과 무력감에 빠트려 지배한다. 이 모든 과정은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정치에도 이와 같은 가스라이팅이 있다. 역사의 상처를 이용한 지배다. 지배계급은 인민의 마음에 남은 역사의 상처를 들쑤시고 회복을 막아 불안과 두려움에 빠트림으로써 손쉽게 지배한다. 상처없는 역사는 없다. 좋은 정치는 인민이 마음에 남은 역사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즉 인류의 보편적 성원으로 서도록 돕는다. 해방 후 한국 정치는 정반대로 흘러왔다. 한국 근현대사만큼 상처 많은 역사도 드물다. 정치는 그 상처들을 악착같이 이용한 가스라이팅으로 점철했다.(계속)
2024/09/11 14:12
강연에서 친일 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내가 노동자라면, 보통의 시민 범주에 속한다면 관점을 바꾸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 지배(일제 강점)는 일본 민족 전체와 조선 민족 전체 사이의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민족 문제는 반드시 ‘계급의 체’로 걸러서 봐야만 합니다. 민족이 허상이어서가 아니라, 지배계급은 언제나 민족 감정을 정치에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2024/09/11 14:11
보통의 일본인과 보통의 한국인은 화해할 게 없다. 서로 가해도 피해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일본 지배계급, 즉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었다. 조선 인민은 그들의 첫 번째 피해자다. 내내 억압받고 착취당했으며 전쟁에 끌려나가 죽었다. 조선의 지배 계급은 대부분 일본 지배계급과 야합하여 안락을 누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두 번째 피해자는 일본 인민이다. 조선 인민에 대한 착취로 수혜를 입긴커녕 착취당했고, 전쟁에 끌려나가 죽었으며, 결국 최초의 원자폭탄 희생자가 되었다.
2024/09/11 14:10
노동을 주제로 한 영화는 대개 노동자와 자본가(측)를 축으로 한다. 이 이분법의 세계에는 구멍이 하나 있다. 자본가의 의지를 실행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무의미한 그림자로 처리되곤 한다. <해야 할 일>은 그런 이들을 조명한 영화다. 경영난에 처한 조선사의 인사팀원들은 정리해고 명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점차 내파되어 간다. 박홍준 감독은 실제로 조선사 인사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영화에는 취재와 조사만으로는 불가능한 사실적 디테일이 있다. 그리고 그만큼 극적 긴장은 적은 편이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미덕이라 생각한다. 현실은 상업영화나 넷플릭스 드라마와 다르다. 비극적 사건은 엄청난 빌런들과 극적 순간들보다는, 흔들리고 고뇌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곁에서 천천히 만들어진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되새기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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