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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10/27 흔한 습관
  2. 2022/10/25 최진기의 오류
  3. 2022/10/23 동무들과 토론을 위한 메모 1
  4. 2022/10/20 쇼라도, 쇼마저
  5. 2022/10/17 마녀들
2022/10/27 18:52
86 리버럴의 공통 습관 하나는, 20대 때 급진주의자였음을 시도 때도 없이 강조하는 것이다. 20대 때는 이상주의적이고 열정적이었지만 이젠 현실적이고 현명하다는, 내 인생은 언제나 적절하고 최선이라는 너스레다.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이 가련한 아재들을 위해 진실을 말해주자. 20대 때 급진주의자가 중장년이 되어 보수화하는 이유는 그저 둘이다. 자산이(지킬 게) 많아지고, 정신이 늙었기 때문이다. 한국 86뿐 아니라 20대의 급진운동이 펼쳐졌던 어느 사회에서든 볼 수 있는 현상이다.
2022/10/27 18:52 2022/10/27 18:52
2022/10/25 15:08
출판사 측과 탈고 일정에 두어 달 여유를 가지기로 한 덕분에, 원고를 조망해볼 기회가 생겼다. 직간접적으로 관련한 주제의 대중서와 강연들도 훑어보고 있다. 그 중 최진기 씨의 ‘마르크스 자본론 완벽 이해하기’는 기본적인 개념에서 심각한 오류들이 있다. 간략하게 바로잡아 본다. 짧고 명랑한 강의이니, 되도록 전체를 보며 맥락을 확인하시길 권한다.

1편 9:15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같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사용가치는 상품이 가진 유용성이고 교환가치는 상품끼리 교환되는 비율이다.(우리에게 익숙한 ‘가격’은 상품과 화폐의 교환가치다.) 한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같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사용가치는 상품의 질과 형태에 관한 것이고 교환가치는 양과 크기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씨가 예를 든 휴대폰은 분필보다 교환가치가 훨씬 크다. 하지만 그만큼 사용가치가 큰 건 아니다. 둘의 사용가치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10:00
“상품이 교환되는 이유는 사용가치가 같기 때문이다.”

정반대다. 상품이 교환되는 이유는, 사용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용 가치가 같다면 교환할 이유가 없다. 덧붙여, '사용가치’라는 개념은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의 의미도 가진다. 상품 교환은 서로 다른 사용가치의 교환이기도 하다.

10:15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다른 상품은 딱 두 개가 있다. 명목 화폐와 노동력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한 상품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양이나 크기로 비교할 수 없다. 명목 화폐(금 태환이 아닌, 국가의 강제 통용력만 가진 종잇조각으로서 현재의 화폐)의 속성을 말하고,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한다는 건 의미 있어 보인다.

16:50
"마르크스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약이 정당하다고 봤다."

마르크스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약(노동력과 임금의 교환 계약)이 등가 교환이라는 상품 교환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점에 주목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래서 정당한 계약이라고 본 건 아니다. 부당한 계약(착취 관계)이 정당한 계약의 외피를 쓰고 있다고 봤다. 만일 착취가 상품 교환의 원칙을 어긴 부등가 교환이라면(계약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거나, 법정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다거나 등), 착취는 자본주의 안에서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착취가 상품 교환의 원칙을 준수하기 때문에, 착취를 극복하려면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해야 하는 거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모든 계약은 자발적이며, 자발적이라는 건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는 제 노동력 외에는 팔 수 없는 게 없으므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계약은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와 맺는 계약이다. 자발적이지 않아도(내키지 않아도), 이익이 되지 않아도(제 노동의 상당 부분이 착취된다는 사실은 알아도), 생활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계약이다.

2편 3:10
‘마르크스는 노동을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자본이라는 뜻에서 가변 자본이라고 한다.’

가변 자본에서 ‘가변’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치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자본가는 화폐로 두 가지 종류의 상품을 구매하여 생산한다. 생산수단(기계, 원료 등)과 노동력이다.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의 가치는 그대로(기계는 마모된 만큼, 원료는 사용된 만큼 등) 생산물로 이전한다. 반면에 노동력의 가치는 늘어난다. 그래서 전자를 불변 자본이라 하고 후자를 가변 자본이라 한다.

(노동력 사용으로 늘어난 가치에서 임금을 뺀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다. 잉여가치는 이윤, 이자, 지대의 형태로 자본가 계급에 배분된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

11:38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평균 이윤율 저하의 법칙을 일반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진기 씨의 자부가 사실에 부합하는가를 따지기 전에, 좌파들이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 나 역시 ‘시민을 위한 자본주의 세미나’를 표방하는 이번 책의 쓸모를 다시 생각해본다.)




2022/10/25 15:08 2022/10/25 15:08
2022/10/23 21:18
기후/생태 위기의 원인이 생산력 과잉 때문이라거나 인구가 너무 많아서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생산력이 지나치게 낮아서 빈곤과 열악한 생활 조건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들도 많고, 사람들이 떠나버려 황폐화한 지역들은 도처에 있다. 문제는 생산력이 아니라 생산력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다. 그것은 개인들의 의지나 윤리를 넘어 경제 체제의 규정을 받는다.

자본주의는 생산이 인간의 필요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유일한 경제 체제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오로지 이윤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우파들은 시장과 가격이 인간 필요를 알려주는 최선의 사인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윤의 사인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기대할 수 없다면 제아무리 인간의 필요가 있어도 생산하지 않고, 이윤이 있다면  인간의 필요가 없거나 인간을 해쳐도 생산한다. 예의 터무니없는 사회별 생산력 격차도 그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력은 이윤을 취하고 축적하는 자본 간의 무한 경쟁을 통해 빠르게 발전했다. 그 덕에 인류(의 일부)가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자본주의적 생산력은 인류의 재앙이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고려해 생산력을 조절하는 능력이 없다.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개인들의 선의와 실천은 아름답지만,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바꿀 순 없다. 자본주의하에서 기후/생태 위기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이며, 기후/생태 위기는 노동 위기와 병행한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모든 사람이 반나절만 일하고도 충분히 제 삶을 즐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지 오래다. 그러나 생산의 목적이 이윤 축적이기에, 절반으로 줄어드는 건 노동 시간이 아니라 일자리다. 실업 상태 노동자는 자본 축적 운동의 지렛대로 사용된다. 장시간 노동과 실업은 자본주의에서 필수적이다.

생산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이루어지는, 생산력 발전과 사용이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체제로 전환이 필요하다. 생산력 과잉, 산업주의, 인구 과잉, 인본주의, 인간의 탐욕 같은 두루뭉술 한 말들은 그 자체로 그른 건 아니지만, 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고 그 극복이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흐리고 은폐하는 데 애용되곤 한다.
2022/10/23 21:18 2022/10/23 21:18
2022/10/20 11:48
한국 정치인들이 진정 한심스러운 이유는 진지한 기대감 때문은 아니다. '쇼마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 부르주아 정치의 임무는 독점자본(재벌) 기반의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있고, 한국 또한 그렇다. 다수 인민의 관점에서 정치는 최소한 진보정치/좌파 정치에서 시작하며 본격적으로는 의회 밖 정치운동에 있다. 노동자가 끼어 죽고 빠져 죽고 떨어져 죽진 않는 정도라도 사회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부르주아 정치에 할 수 있는 기대란, 그저 ‘쇼라도’ 잘하는 것이다. 일상의 고통과 낙심 속에서 그래도 희망은 남아 있다는 위로를 주는 ‘아편으로서 쇼’다. 좋은 부르주아 정치인이란 이 쇼를 잘하는 정치인이다. 세계 자본주의 불황이 40여 년 지속하고 근래 위기가 더욱 심화함에 따라, 부르주아 정치에서 쇼의 기술도 어느 때보다 발전하고 있다. 오바마와 트럼프는 (통합과 배제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용하지만) 그 정점에 선 인물들이다. 오늘 한국 정치인들은 어떤가. 정치인으로서 그들의 언어는 대부분 쇼는커녕, 자해를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어느 정치인이 한순간 눈곱만큼이라도 말이 되는 말을 하면 열렬한 각광을 받는 지경이다. ‘쇼마저’ 못하는 부르주아 정치인, 세상에 이보다 쓸모없는 물건은 없다.
2022/10/20 11:48 2022/10/20 11:48
2022/10/17 18:48
판타지를 좋아하는 딸이 어릴 때 <어스시의 마법사>를 선물하기도 했고, 어슐러 르 귄이라는 이름을 안 지는 꽤 오래지만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나는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당하게 말하면, 나는 판타지를 좀처럼 읽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슐러 르 귄은 내가 존경심을 갖는 작가다. 2014 미국 도서상 수상 연설문을 우연히 읽고부터였다. 나는 '수상식장에서 급격히 겸손해지는'  작가들(대체로 중장년 남성들, 왜 안 그렇겠는가!)에 흥미가 있는데, 선생의 연설은 위엄과 기개가 흘러넘쳤다. 이후 그의 산문과 서평 같은 것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그가 이른바 장르 문학 작가로서 주류 문학(이른바 리얼리즘 문학)의 권위주의에 평생 맞섰던 걸 생각할 때, 여전의 그의 작품을 제대로 못 읽는 건 외람된 일이지만 말이다. 2018년 사망 이후 그가 그토록 개탄하던 문학과 예술의 자본화는 갈수록 더 가속도를 내고 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H(여성, 중견 현대미술 작가인)는 내내 프리즈 서울 풍경을 개탄했다. 나 역시 몇몇 대자본가의 파티장으로서 프리즈 서울과 그들 앞에서 애써 미소를 유지하는 작가들에 한숨이 나오던 차였다. 나는 내심 H가 어슐러 르 귄처럼 늙어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오늘 세계의 형편을 고려할 때, 문학과 예술에서 마녀들이, 마녀 할머니들이 더 많이 출현하는 일은 인류에게 복되다.
2022/10/17 18:48 2022/10/17 1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