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렬 씨는 개탄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재명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말이 쏟아지는 것도 아니다. 나라가 공포스릴러물이 되었을 거라는 말이나 나온다. 두 사람은 대통령직 수행보다는 각각 기초교양 학습과 격리 정신치료가 더 시급한 인물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대 양당에서 민주적인 절차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최선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둘은 양당의 최근 상태를 정직하게 반영한다.
양당은 자유주의 기반의 우파 정당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1970-80년대 '극우독재 vs 민주화운동'의 상황에서, 현실적 차이와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바꿔 말하면 양당의 차이와 정치적 의미는 '극우독재 vs 민주화운동'의 상황에 한정된 것이다. 1987년 정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주요한 시효를 다 했다.
1997년 구제금융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면서 양당은 완전히 동질화한다. 정당의 정체성은 '재벌의 파트너로서 정치집단'이며, 정당의 목표는 사회와 무관한 사적 기득권 추구가 된다. 양당은 다수 시민의 삶을 거스르고, 다수 시민에게 양당은 극복 대상이 되었다.
이후 20여 년 이상의 정치 상황은 전적으로 인민/시민의 선택으로 결정되어 왔다. 만일 시민이 양당 체제의 시효 만료를 분명히 하고, 양당 체제 너머의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갔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양당도 새로운 정치의 견제 속에서 여러 노력을 하게 되어, 질적으로 더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시민은 양당에 '보수 vs 진보' 심지어 ‘우파 vs 좌파’라는 실재하지 않는 차이와 정치적 의미까지 부여하며 양당 체제에 머물고 있다. 한국 시민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비판적인 편이다. 그러나 비판은 양당 체제 극복의 의지를 포함하지 않는다. 양당이 번갈아 집권하듯 시민의 비판도 쳇바퀴 돌듯 대상을 바꾼다. 시민은 정치적 비판을 양당 체제 내로 엄격히 제한함으로써, 양당 체제를 유지한다.
뭐든 상품과 소비의 관계로 설명하는 시대이니, 이 상황도 그래 보자. 시민은 제 삶에 사용가치/유용성이 사라진 지 오래인 상품(양당 체제)을 새로운 상품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구매 습속을 고수한다. 객관적 유용성이 사라진 상품에 주관적 효용을 부여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합리적이지 않은 소비의 대가는, 없는 사용가치에 갈수록 질만 더 나빠지는 상품들(더 저급한 정치와 더 저질적인 정치인)이다.
시민이 저급한 정치와 저질적인 정치인에 고통받고 있다는 말은 맞다. 다만 그 정치와 정치인을 유지하는 건 전적으로 시민이며 시민의 선택이다. 극우독재 하에서 시민은 정치의 일방적 피해자일 수 있었다. 민주화한 사회에서 시민은 정치의 피해자이되 자발적 피해자이다. 앞으로 정치 상황 역시 전적으로 시민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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