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펴봤듯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 상품의 판매 대가(가격)이다.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들의 가치이므로, 임금은 노동자와 그 가족이 생활을 유지하는 비용이라 할 수 있다. 임금은 이윤과 반비례하며 자본가는 가능한 한 임금을 낮추려 한다. 하지만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보다 지나치게 적다면 노동자는 노동을 지속할 수 없다(굶어 죽는다.).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보다 뚜렷하게 많다면 노동자는 머지않아 임금 노동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대체로 '먹고살기 빠듯한' 수준이며, 노동자는 대부분 평생 임금 노동에 매달려 살아간다.
노동자의 임금은 같지 않다. 복잡하고 숙련이 필요한(혹은 장기적인 교육이 필요한 전문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보다 많은 가치를 생산하며,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러나 같은 노동을 수행하는데 임금 격차가 크다면 그것은 다른 의도가 들어 있다. 리카도나 밀 같은 사람들은 '임금 기금설'을 주장했다. 사회 전체로 봤을 때 임금 총액은 정해져 있고 그걸 노동자 수로 나눈 게 평균임금이라는 이론이다. 임금 총액이나 평균임금은 그 사회의 계급 투쟁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다만 한 기업/자본가의 경영 계획에서 임금 총액은 있다. 이걸 같은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에게 똑같이 지급할 수도 있고, 차등해서 지급할 수도 있다. 후자가 노동자에 대한 지배 전략으로 애용된다.
조직력이 약한 비정규 불안정, 하청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할 임금의 일부를 헐어 조직력이 강한 정규직 노동자에게 더 많이 지급하는 것이다.(이번 대우조선 상황을 통해 널리 알려졌듯 하청 노동자도 1차, 2차, 3차에 따라 임금 격차가 커져 결국 최저임금 수준에 이른다.) 그래서 자본은 같은 총임금으로 전자의 노동자는 더 무력하게 만들고 후자의 노동자는 더 순응하게 하여,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한다. 오늘 한국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임금 격차의 실체이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정규직 숙련 노동자는 식민지 노동자에 대한 초과 착취로 얻어진 잉여가치 가운데 일부를 제공받아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았다. 이들은 중산층화했고 노동 계급 연대보다는 자본과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처음으로 ‘노동 귀족’이라 비난받는다. 노동귀족은 단지 임금을 많이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 계급의 연대를 거부하고 자본가에 협력하는 노동자라는 설명은 맞다. 하지만 보통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귀족은 애초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은 높은 임금 그리고 그게 어디에서 오는가, 이다.
<자본> 번역자이자 해설자인 김수행 선생의 책엔, 대기업의 전문 경영인을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자라고 기술한 대목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기업에 대한 소유권은 없고 월급이나 연봉을 받으며, 회사를 옮겨다닌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다. 그들이 받는 월급이나 연봉은 그들의 노동력 가치가 아니라 노동자에게서 길어올린 잉여가치를 분배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귀족'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 노동의 복잡성이나 숙련에서 온다면 그들은 노동귀족이 아닐 것이다. 비정규 불안정, 하청 노동자에 대한 초과 착취에서 온다면 그들은 일단 노동귀족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임금이 높아 봤자 경영진에 비하면 턱도 없다든가, 그들의 높은 임금을 타박할 게 아니라 여느 노동자의 임금을 그들만큼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반박은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나, 논지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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