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22/03/30 박경석 좌판
  2. 2022/03/27 방준석
  3. 2022/03/26 착취 3
  4. 2022/03/24 문재인
  5. 2022/03/23 청교도
  6. 2022/03/22 착취 2
  7. 2022/03/20 착취 1
  8. 2022/03/10 작가
  9. 2022/03/03 조금은 더 담대하게
2022/03/30 08:38
정치 양아치 이준석이 오히려 장애인 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불러일으켰다. 박경석과 그의 동료들은 오랫동안 '동정과 시혜를 넘어서는 장애인 운동'을 말해왔다. 연대란 물적 후원과 더불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김규항 = 근대 이전에 장애인은 본인이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신의 벌을 받는 죄인으로 취급되었는데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장애인은 죄인인 것 같다.

박경석 = 자본주의는 경쟁과 속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뒤처지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받으니 장애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 셈이다. 뒤처지는 게 죄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는 세상으로 가는 운동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 체제와 반목할 수밖에 없다.

2022/03/30 08:38 2022/03/30 08:38
2022/03/27 11:50
방준석 씨는 친구의 친구라서 이따금 스치듯 봤을 뿐이지만 ‘고운 사람’이었다. 한국 남자 중에 저런 사람이 많으면 좋겠구나 생각했다.

그의 노래 중에 ‘그날1’을 좋아한다. 안식을 빈다.


2022/03/27 11:50 2022/03/27 11:50
2022/03/26 20:50
구입한 세탁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세탁기를 구입하는 건 세탁이 아니라 세탁기 처분권을 구입하는 것이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일도 그렇다. 물론 대체로 회사(자본가)는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뽑아내기 위해 노동력을 최대한 사용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가령 복직 투쟁에서 이긴 노동자를 제발로 나가게 하려고 매일 아무 일도 안 주고 앉아있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력을 구입하는 건 세탁기를 구입하는 것과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회사가 노동자의 인격 전체의 처분권을 구입하는 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다. 회사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입할 뿐이며, 노동자는 여전히 법적으로 자유로운 인격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걸 우리는 안다. 왜 그럴까. 노동자의 노동력과 인격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입했지만, 노동자는 제 인격은 집에 두고 노동력만 갖고 출근할 수 없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시간 동안 인격도 회사에 묶이게 된다.

노예와 자유로운 노동자 중 누가 더 열심히 노동할까. 노예라고 답할 사람이 많겠지만, 노동자다. 첫째, 노예는 외적 공포 때문에 노동하지만,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기 필요에 따라 노동한다. 둘째, 노동자는 모든 상품 판매자가 그렇듯이, 제 상품(노동력)에 책임을 지고 있고, 또한 동종 상품의 다른 판매자와 경쟁 상태에 있다. 셋째, 노예와 주인 관계의 연속성은 주인의 직접 강제로 유지된다. 반면에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신이 관계의 연속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와 그 가족의 생존은, 그의 끊임없는 노동력 판매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노동자를 ‘임금 노예’라 부르기도 한다.(계속)
2022/03/26 20:50 2022/03/26 20:50
2022/03/24 13:28
밀려난 윤석열을 파격 발탁한 사람, 대통령은 꿈도 꾼 적 없다는 윤석열을 대선 후보로 만든 사람, 대선 후보 윤석열에 대한 압도적 실망과 냉소 속에서 정권 교체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아 결국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 그 모든 국면에서 제 몸을 조국과 추미애와 이재명 따위 뒤로 숨겨, 임기 말 지지율 45%를 차지한, 유례없이 비겁하고 노회한 사람.
2022/03/24 13:28 2022/03/24 13:28
2022/03/23 17:51
음악 취향이 ‘매우 잡식’에 해당함에도 좀처럼 안 듣게 되는 장르도 있긴 한데, 오페라가 그렇다. 형식이 주는 본원적 불편함 같은 게 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벨리니의 <청교도>. 왕당파니 공화파니 내용 이전에, 선을 넘는 아름다움이 취향을 넘어섰달까. 아리아 A te, o cara는 ‘배가 산으로 가는’ 영화 <피츠카랄도>에서, 오페라에 미친, 미친 사내가 마지막 낭만을 발산하는 곡이기도 하다.
2022/03/23 17:51 2022/03/23 17:51
2022/03/22 10:11
상품 교환은 원칙적으로 등가 교환이다. 우리는 가격 9백원인 라면을 9백원을 주고 산다. 착취가 윤리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인 이유도 등가 교환이라는 상품 교환의 원칙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착취는 노동자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보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적은 데서 일어난다. 이 상황은 부등가 교환처럼 보인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의 오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격이다. 어떤 상품의 구매자가 그 상품으로 얻는 이득은 판매자와 관련이 없다. 회사(자본가)가 노동력을 사서 얻는 이득은 노동력 판매자(노동자)와 관련이 없다. 회사가 노동자에게 계약대로 임금을 준다면, 등가 교환에 조응한 ‘공정한 임금’이다. 바로 그래서 착취 반대는 자본주의 시스템 반대와 극복의 의미를 갖는다. 자본주의 내에선 해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착취가 부등가 교환이라면 (가령 계약한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처럼),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 시스템 내의 문제가 된다.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는 그 해결을 법으로 보장한다. 근래 한국도 꽤 엄격한 편이다. 이때 착취 반대는 자본주의 법에 대한 준수 요구가 된다. 착취를 근거로  자본주의 극복이나 노동 해방을 말할 이유도 사라진다.
2022/03/22 10:11 2022/03/22 10:11
2022/03/20 16:29
우리가 세탁기를 사는 건, 세탁을 사는 게 아니다. 세탁기의 처분권을 사는 것이다. 청소기를 사는 것도 청소를 사는 게 아니라 청소기의 처분권을 사는 것이다. 회사(자본가)가 노동자와 고용 계약을 맺는 것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고 노동을 사는 게 아니다. 그의 노동력(노동력의 처분권)을 계약서에 명시된 시간만큼 산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대부분 화폐로 표현되므로, 가격)이다.

회사가 노동력을 사는 이유는 하나다.  그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그에게 주는 임금보다 많을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게 마르크스가 밝힌  '착취'(exploitation)다. 착취는 그 어감처럼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다. 지나치게 적은 임금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착취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정상적 상황이다. 착취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즉 노동자에게 그의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만큼 임금을 준다면 회사는 노동자를 고용할 이유가 없다. 노동자 역시 회사든 자본주의든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임금을 노동의 대가로 보는 관점과 노동력의 가격으로 보는 관점이 대립한다. 경제학, 초중고 교과서, 주류 미디어 등은 모두 당연히 전자의 관점에 있다. 물론 이건 사실을 날조한 것이므로 관점이라기보다는 거짓 선전 선동에 가깝다. 현재는 이 관점이 압도하는 시기이며, 노동운동이나 투쟁 현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같은 말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 같은 건 애초에 없다. 임금을 계약한 대로 주지 않거나, 법적 최저 임금보다 적게 주는 건 착취가 아니라 절도이자 사기다. 기억하자.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격이다.(계속)
2022/03/20 16:29 2022/03/20 16:29
2022/03/10 19:35
한국 작가 -문학 및 예술-는 평소 이념과 선거에서 선택이 동떨어진 경우가 많다. 노동을 말하고 신자유주의를 말하고 때론 리버럴의 한계를 말하다가, 선거에선 어김없이 리버럴 지지에 나선다. 아예 수백 명이 집단 연명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런 행동을 선거에서 현실적 선택이라 설명한다. 뒤집힌 이야기일 것이다. 선거에서가 진짜 그들이고 평소 이념이 허세일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은 평소 이념에서 작가 연의 허세를 빼는 것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는 단지 그럴싸하게 쓰고 그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인가. 자본가가 자본이 인격화한 존재라면 작가는 상상력과 이상주의가 인격화한 존재다. 작가는 비현실적인 존재다. 도무지 현실적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 당장 유용성 없는 것을  쓰고 그리고 노래하는 게 작가의 사회적 역할이다. 작가의 비현실성은 사회의 현실성에 생명력을 공급한다. 작가마저 현실에 발 묶인 사회, 모든 사회 성원이 현실적 사정과 상황만 계산하는 사회는 걸음을 멈추고 썩어간다. (선거 전에 쓴 글.)
2022/03/10 19:35 2022/03/10 19:35
2022/03/03 10:19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매우 주요한 경로임이 분명하다. 다만 유일한 경로는 아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한국 시민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주요한 정치적 변화들, 이를테면 4/19 혁명, 5/18 민중항쟁, 1987 정치 민주화, 그리고 2017 박근혜 탄핵 중에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건 없다. 모두 선거 밖에서, 시민의 직접 행동으로 이루어졌다. 한국 시민은 제도 정치와 선거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치적 식견과 능력을 보여왔다.

애석한 건, 한국 시민이 그런 성취를 시쳇말로 죽 쒀 개주듯 넘겨주는 관습 또한 가진다는 사실이다. 관습은 선거에서, 특히 대선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시민은 일제히 두 우파 정치세력의 범주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진보적 시민은 퇴행을 막기 위해 퇴행한다. 대통령을 탄핵해 세계를 놀라게 한 촛불도 그런 과정을 통해, 이른바 촛불 정부(애초 박근혜 탄핵에 동의하지도 않았던 인물로 구성된)에 떠넘겨졌고, 결국 파산했다.

대통령제의 특성상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가는 언제나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로선 희망의 씨앗이, 보이든 안 보이든 당선권 밖에 있다는 것, 당선에만 몰두한다면 희망의 씨앗을 포기하는 일이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은 더 담대해도 좋지 않을까. 제도 정치와 선거를 넘어서는 능력을 보여준 시민은, 제도정치와 선거 자체를  바꿀 능력을 갖춘 시민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번 선거, 그리고 다음 선거에 걸쳐 당선권 밖의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율을 뚜렷하게 바꿔냄으로써, 전체 정치 지형에 균열을 만들어갈 수 있다.
2022/03/03 10:19 2022/03/03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