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9 14:18
이재명의 선정적인 말장난, 그리고 그에 대한 양측 아재들의 논평들은 그야말로 낡은 관념의 전시장이다. 개발독재 세력이든 민주화 운동 세력이든 한국의 50대 이상 인텔리 아재들이 다름없이 구시대의 유물인 건, 무엇보다 ‘사회’라는 개념의 결핍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회란 개인들도, 개인들의 연합도 아닌 단지 국가이다. 그래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도 그저 좋은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들 사유는 국가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다. 그들은 전체주의 신민으로 훈육 받으며 자랐고, 청년기엔 국가 자본주의자이거나 국가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기억이나 확신과 달리, 자유주의자인 적도 사회주의자인 적도 없다. 파시스트를 추앙하는 자유주의자가 말이 되는가. 국유화와 사회화를 구분 못 하는 사회주의자가 말이 되는가. 중년이 되어서도 그들은 사회를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제 청년기를 자원으로 하는 기득권 경쟁과 자산 축적에 온 힘을 다해왔다.

사회를 모르는 그들의 오랜 사회적 활약 덕에 사회는 이 꼴이 되었다. 그들이 또 ‘시장 vs 국가’를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 vs 사회’ ‘국가 vs 사회’이다. 문제는 사회를 망가트리는 시장, 사회를 망가트리는 국가이다.
2021/10/29 14:18 2021/10/29 14:18
2021/10/25 15:09
현재 위기를 넘어서려면 탈성장 코뮤니즘으로 가야 한다는<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사이토 고헤이) 의 기본 논지에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그게 바로 후기 마르크스의 견해이며, 마르크스가 <자본>을 1권에서 멈춘 이유라는 단언은 억지스럽다.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의 병이 있다. 하나는 제 주장을 펼치기 위해 마르크스의 말을 끌어다 꿰어맞추는 것(아전인수), 또 하나는 마르크스를 시공을 초월한 전능한 존재로 떠받드는 것(신격화)이다.

마르크스에겐 마르크스의 역할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겐 마르크스주의자의 역할이 있다.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의 일반적 본질과 작동법칙을 해명한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에도 물론 적용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운동하고 방어하는 유기체로서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 형태와 양상을 바꾼다. 그 부분은 해당 시대와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 급진적 활동가들의 몫이다.

오랫동안 마르크스는 생태 문제엔 개념조차 없는 생산력주의자라 여겨졌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를 떠난 사람들도 많다. (주요한 생태주의자들은 대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근래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물질대사(metabolism)로 파악했음이 드러나면서 오해를 벗고 있다. 여기까진 아전인수도 신격화도 아니다. 생산력주의에 빠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눈에 가렸을 뿐, <자본>에 분명히 기술된 내용이다.

19세기 사람은 충분히 제 몫을 했다. 21세기의 사람들은 그를 쉬게 해주고, 역시 제 몫을 하면 된다.
2021/10/25 15:09 2021/10/25 15:09
2021/10/23 18:12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음악책이 아닌)이다. 나는 대부분 책을 읽고 나면 치우지만, 음악에 관한 책은 예외다. 이를테면 위화와 하루키의 소설은 어디론가 사라졌어도 그들의 음악에 관한 책은 소장한다. 두고 이따금 꺼내 읽는다. 사이드나 홉스봄 같은 사상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비범한 머리통들의 존중받는 주저들을 나 역시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이 음악에 관해 말할 때 드러내는 희열과 위트, 고백, 다소 뒤틀린 통찰, 자기혐오 들을 사랑한다.
2021/10/23 18:12 2021/10/23 18:12
2021/10/22 15:13
친구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다. 다만 지나치게 배신감에 젖을 필요는 없다. 떠난 이유는 그에게, 떠난 원인은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배신감은 그걸 성찰하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다. 만일 배신감을 넘어 배은망덕의 감정을 느낀다면, 친구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2021/10/22 15:13 2021/10/22 15:13
2021/10/19 14:13
고래동무 이은 대표와 제가 함께 쓴 편지입니다. 새 후원자에게 드리는 인사 형식으로, 고래동무의 ‘속깊은 연대’ 원칙, 취지와 현황 등을 이야기합니다. 고래이모·삼촌이시라면 익숙한 내용이겠지만, 고래가그랬어나 고래동무를 잘 모르는 분도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뭘 하는 건지’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로 정리해 봤습니다.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온갖 주제의 글을 제법 오랫동안 끼적여왔지만, 고래가그랬어나 고래동무에 관해 쓰는 건 여전히, 처음처럼 어렵습니다.ㅎ

2021/10/19 14:13 2021/10/19 14:13
2021/10/14 15:37
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재명이니 윤석열이니 하는 아재들의 아수라에 갇히기 되었을까요. 벗어나고 싶다면,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유부터 해야겠죠. 그런 생각이 듭니다. ‘2년을 얼굴 절반을 가리고 살고도, 현재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지적인 종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지구에서 현재와 같은 지위를 갖는 게 적절한가?’ 이번 세미나에서 제 강연 제목이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말’이 아니라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소리’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 역시 클리셰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최 측에 양해를 구했습니다. 신청 못 한 분도 아래 이메일로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시면 참가 정보를 보내드립니다.

15일 오후 3시 줌 강연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소리>

gallery.loop.seoul@gmail.com
2021/10/14 15:37 2021/10/14 15:37
2021/10/12 12:02
교회는 교회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라 여겨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제 이해를 위해 자신들을 조직한 노동자들이다.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스타벅스 노동자들은 이미 그 자체로 노동조합이다. 자신들을 노동조합이라고 부르든 않든, 민주노총의 권유를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그들은 노동조합이다. 기존의 노동조합은 단지 노동조합의 기존 형태, 혹은 역사 속의 한 형태이다. 그들을 우려하고 짐짓 개탄하는, 새로운 현상 앞에서 급 교조화하는 인텔리들이야말로 노동조합이 뭔지 잊고 있다.
2021/10/12 12:02 2021/10/12 12:02
2021/10/11 10:33
‘목숨 값’이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적이 불편한 마음이 있다. ‘값’은 ‘가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전적으로 같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값은 가격(price)보다 가치(value)에 좀 더 가까운 말이다. 가격은 상품 가치의 화폐적 표현이다. 가치는 경제적 차원에 더해 윤리적 차원의 의미가 있다. ‘목숨 값’은 대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책임이 있는 기업이나 국가에서 지급하는 보상금을 말한다. 보상금은 경제적 차원의 해결이며, 사람의 생명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진다. 계산의 기본 근거는 노동력의 가격이다. 즉 보상금은 인간 노동력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유일한 사회(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한 생명 보상이다.

9·11 테러 사망자 유족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25만 불에서 700만 불까지 약 30배 차이가 났다. 사망자의 평생 예상되는 소득을 뼈대로 계산한 결과다. 오늘 한국에서 산재로 죽은 서민 자식들의 ‘목숨 값’과 곽아무개 아들의 ‘퇴직금’ 50억 원을 비교하는 일은 어떤가. 서민 자식들의 ‘목숨 가격’에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퇴직금 50억에 분노하여 ‘목숨 값’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을 비난하긴 어렵다. 우리가 노동력이 상품으로 교환되는 사회를 승인하고 있는 한, 위선일 것이다.
2021/10/11 10:33 2021/10/11 10:33
2021/10/08 21:40
‘자유주의는 평등보다 자유를, 사회주의는 자유보다 평등을 추구한다.’ 상식처럼 통용되는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그르다.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궁극적 목표는 다름없이 자유다. 자유 없는 평등, 자유를 생략한 평등은 사회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다만 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개인의 자유를 구현하는 최선의 사회 시스템이라 보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하에서 개인의 자유란 허울이며 새로운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에 대한 상반된 견해이자, 자유에 대한 상반된 견해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2021/10/08 21:40 2021/10/08 21:40
2021/10/02 21:44
2002년 대선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던 이회창은 아들 병역비리 의혹으로 무너진다. 한국인들이 대통령 후보에게 윤리적 잣대를 적용한 마지막 사례였다. 5년 후 대선 직전 이명박이 BBK가 제 것이라 말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지만, 아랑곳없이 유례없는 표차로 당선된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구호 덕이었다.

문재인은 촛불 덕에 대통령이 된, 일종의 과도적 예외라 할 수 있다. ‘어진 임금’ 이미지 유지에 전념하는 것만으로 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도 감옥에 있는 두 전임자에 반사되기 때문이다. 그의 임기에 조국 사태를 시작으로 ‘리버럴:보수’ 정치 시스템이 뒤엉켜 엉망진창이 된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경제는 단지 금융과 투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정치도 경제도 길을 잃을 때, 사람들은 ‘강한 지도자’에 끌린다. 이재명이 인기를 얻는 이유다. 그가 양아치에 사기꾼 면모를 가진 건 이미 비밀이 아니지만,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그래도 뭔가를 제대로 해낼 것 같은 인물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재명은 합니다’라는 구호는 이명박의 옛 구호 ‘경제 대통령’ 만큼이나 현재의 대중 심리에 주효하다.

이재명은 화천대유라는 치명적 스캔들을 특유의 말 바꾸기와 ‘프레임 흐리기’ 전술로 넘어서는 데 성공하는 듯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한층 가시화하고 있다. 그걸 재앙이라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면, 재앙을 견제할 힘은 주류 정치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깨문 보다 조국 반대파가 물론 낫겠지만, 둘의 차이는 윤리 차원이며 리버럴이라는 이념적 구획 안에 있다는 건 같다.

이번 대선에서 드디어 수십 년 동안 반복되던 ‘비판적 지지’ 망령이 사라졌다. 그럴 만한 건덕지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판적 지지는 극우 세력을 막고 진보정치도 성장하는 거시적 정치 연합이라 주장되었지만, 결국 리버럴의 부패와 진보정치의 소멸로 귀결했다. 재앙의 실체는 바로 그것이다. 정치와 경제의 혼란 상황도, 이재명 대통령의 가시화도 그 반영일 뿐이다.

진심으로 재앙을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넋 놓고 부르주아 후보 인물평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급진 정치의 힘을 모을 궁리를 시작해보자. 대선 기간을 정치쇼가 아니라 정치의 시간으로 채워보자. 너나없이 방안과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토론하자. 나 또한 그럴 생각이다.
2021/10/02 21:44 2021/10/02 2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