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1/02/27 어떤 방식
  2. 2021/02/24 왜 중앙일보에 쓰는가
  3. 2021/02/20 노래하는 사람
  4. 2021/02/18 고래동무 후원처 명단
  5. 2021/02/13 20%
  6. 2021/02/09 정치가 저 꼴인 이유
2021/02/27 13:16
얼마 전 날 아빠라 부르는 둘 중 한 사람이 불쑥 말하길, 내 방식이 특이했단다. 살짝 긴장해서 무슨 말인가 되물으니 에피소드 하나를 꺼냈다.

초등 2학년 땐가 학교에서 선생님이 독도는 우리 땅인데 일본 사람들이 자꾸 자기네 땅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했단다. 집에 와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다 듣고는 내가 그러더란다. ‘그런데 독도가 우리 땅이면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생애 첫 애국심에 꽤 흥분했는데 말문이 콱 막히더란다.

사람들은 내가 평소 아이에게 사회 이야기 같은 걸 많이 해주는 아빠였을 거라 생각한단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가 이야기를 하면 다 듣고 질문만 던지는 방식이었단다.

“그래서 스스로 더 많이 생각할 수 있었고 그런 습관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방식이었어요.”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모든 아이에게 좋은 방식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의도하고 계획한 방식이라기보다는 그저 내 성격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아이의 성장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고, 그에겐 좋은 방식이어서 참 다행이다.
2021/02/27 13:16 2021/02/27 13:16
2021/02/24 09:21
근래 이따금 받는 질문이다. 내 활동 이력과 방식을 아는 분들은 대개 나름의 생각이 있으려니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그런 사람이 왜?, 할 수도 있다.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대단한 일도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 부러 해명하긴 또 어색했다. 마침 최근 한 인터뷰에 비슷한 질문이 있어 옮긴다. 내 답변을 내용은 유지하되 읽기 좋게 살을 조금 붙였다.

“그간에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에만 기고를 해왔는데, ‘중앙일보’ 칼럼도 쓰고 계십니다. 생각이 바뀐 겁니까.”  

“지금의 진보·보수 구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안티조선 등 자유주의 운동의 맥락에서 ‘조·중·동’ vs ‘한겨레·경향’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좌파 몇몇이 ‘최소한의 상식’이라는 명제로 연대했고요. 그러나 그 운동은 주류 자유주의 세력이 가장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자, 지배계급의 중심이 되는 데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한겨레 기자들의 집단 반발에서 보이듯 진영 논리에 빠지기도 했고요. 물론 여전히 신문들이 모두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는 예외라는 생각도 유지하고 있고요. 다만 현재 저로선 모두 ‘우리 신문’은 아닙니다. 제 생각을 시민과 소통하는 수단들일 뿐이죠. 중앙일보에서 칼럼을 제안한 건 중도 혹은 합리적 우파 이미지 전략의 일환이죠. 제가 수락한 건 다른 시민을 대상으로 써보려는 게 컸고요. 각자의 효용이 만난 셈입니다. 실은 요 몇 해 신문 칼럼을 중단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비슷한 독자를 대상으로 충분히 오래 말했다고 생각했죠.”
2021/02/24 09:21 2021/02/24 09:21
2021/02/20 16:23
친구가 술을 먹다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테제를 제시했고 내 생각을 물었다. 난 반색하며(거의 만세를 부르며) 동의했다. 제 방식으로 제 생각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노래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음악산업의 소비자 혹은 신도만 넘쳐난다. 물론 음악에만 국한한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혁명은 ‘노래하는 사람들의 회복’일 수 있다.
2021/02/20 16:23 2021/02/20 16:23
2021/02/18 14:07
후원처 명단을 통해, 고그가 어디에 얼마나 들어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래이모 삼촌들께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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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한 속깊은 어깨동무, 고래동무가 되어 주세요.
고래동무는 구독할 형편이 되든 안 되든 모든 어린이가 어린이교양지 고래가그랬어를 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고래동무의 연대로 전국의 지역아동센터, 아동양육시설, 분교 등 2,429곳 9만여 명 아이들이 고래가그랬어와 만나고 있습니다.
 
 
지역아동센터 : 1,874 (전체 4,386곳의 43%)
아동양육시설 : 190 (전체 280곳의 68%)
분교 : 100 (전체 198곳의 51%)
기타 : 265
(2021년 2월 현재)
2021/02/18 14:07 2021/02/18 14:07
2021/02/13 22:09
칼럼 '정치가 저 꼴인 이유'에서 “1:99이자 20:80인 사회”라는 표현을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어 적는다. 20은 현재 한국의 전체 임금 노동자 중 ‘대기업 정규직 및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 비율(%)이다. 고용형태공시제에 따르면 현재 300인 이상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300여만 명이며, 일자리행정통계에서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는 160여만 명으로, 총 460여만 명이다. 전체 임금노동자 수는 2천만 명이 좀 넘으니 20% 남짓이다. 20%는 조선시대 중기 전체 인구 중 양반의 비율이기도 하다.
2021/02/13 22:09 2021/02/13 22:09
2021/02/09 08:09
‘계급 투쟁’이라는 말이 현재 세계와 들어맞는다 생각할 사람은 사라진 듯하지만, 이따금 예외도 있다. 자본가의 자본가라 할 워런 버핏 같은 사람이다.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있고, 내가 속한 계급이 이기고 있다. 사실 내가 속한 계급은 그냥 이기고 있는 수준이 아니다. 다른 계급을 죽이고 있다. 궤멸시키고 있는 수준이다.” 버핏에 따르면, 계급 투쟁이 현재 세계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계급 투쟁이 사라져서도 우리가 더는 계급 사회에 살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한 계급의 일방적 승리 상태가 만들어내는 착시다.
 
다만 버핏이 말한 ‘내가 속한 계급’이 자본가 전체는 아니다. 상위 1% 자본가에 해당한다. 노동자 계급 전체가 ‘죽고, 궤멸당하고’ 있지도 않다. 상위 20%는 매우 다른 처지에 있다. 한국의 경우 300대 기업 정규직 연봉 평균은 8천만 원가량이고, 그 30개는 1억 원이 넘는다. 공기업 정규직도 비슷한 수준이다. 이들의 고임금은 나머지 노동자의 저임금, 고용 불안정과 짝을 이룬다. 우리는 자본가라고 다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라고 다 노동자가 아닌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다.
 
두 세기 넘게 진행된 ‘자본의 사회화’의 결과다. 애덤 스미스가 “교환하고 교역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라 설파한 이래, 경제학은 늘 자유시장을 찬미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기에 한껏 펼쳐진 자유시장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시장의 무서움을 깨닫게 했다. 시장의 위험과 불안정성에 대응하는 자본의 사회화가 시작된다. 오늘 기업의 일반적 형태인 주식회사는 그 첫 결실이다. 주식회사는 개인 기업보다 더 많은 자본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일 수 있지만, 시장의 위험은 분산시켰다.
 
19세기 말 자본의 사회화는 ‘독점’ 단계에 이른다.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며 독점자본은 국가와 결합한 형태로 발전한다. 국가가 금융, 통화, 경제정책 등을 관리하며 독점자본의 활동을 지원하는,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자본주의는 국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흔히 반대의 것으로 여기는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이 형태의 두 변형이다. 작은 정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국가가 위기에 빠진 독점 자본에 대한 지원에선 더 적극적이었다.
 
오늘 순수한 의미에서 자유시장은 영세자영업자, 자신과 가족을 착취하며 경쟁을 치르는 치킨집 주인들에게나 남았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챈들러의 말마따나 ‘보이는 손’이다. 한국에서 국가와 결합한 독점 자본(재벌)은 나머지 중소자본을 하청 계열화하고, 상당 수준의 ‘자본의 계획경제’를 실행한다. 이런 사회에서 주요한 독점자본과 대기업 정규직 그리고 그 파트너로서 국가·공공 부문의 정규직 노동자와 나머지 대다수 노동자가 임금과 생활 수준에서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건 당연하다.
 
한국 노동자 계급의 분리는, 80년대 말 이후 노동자 투쟁의 주력이 된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을 고리로 진행했다. 조직노동자들과 손실을 감수하며 정면충돌을 반복하던 독점자본과 국가는 전략을 바꾼다. 조직노동자들을 체제 내 중산층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들의 ‘묵인 혹은 협조 아래’ 신규 및 여타 노동자들을 불안정 비정규직으로 채워간다. 총 노동비용을 유지하면서 노동자 계급 전체를 무력화하는 전략이다. 파견이나 비정규직 관련 법제를 관철하여 그 작업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었다. 1:99이자 20:80인 절망의 사회는 그렇게 완성된다.
 
사무직 생산직을 불문한 상위 20%가 현재 민주당 지지의 주력이다. 그 상당수는 진보정당 지지자였지만, 관심이 계급에서 주식과 부동산으로 바뀌면서 진보정치는 불필요하거나 부담스러워졌다. 그들이 빠져나가면서 진보정치도 거의 궤멸했다. 옛 습관은 남아 국민의힘을 지지하진 않으니 민주당이 최선이다. 그게 그들의 희한한 ‘진보 의식’이다. 조국 지지파와 반대파의 윤리 수준은 다르겠지만, 그 점에선 다르지 않다.
 
영세자영업자를 포함한 80% 노동자는 생존에 매달리느라 계급이나 진보정치 따위에 관심 둘 여력조차 없다. 노동자 계급의 분리는 고스란히 교육의 분리로 나타난다. 대부분 아이는 노동자로 살아갈 터이지만, 입시 경쟁을 결정하는 건 부모의 경제력이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서민 부모의 의지는 해봐야 안 된다는 체념으로 바뀐 지 오래다. 여전히 학원을 보내지만, 다들 보내니까 보낼 뿐이고 형편 좋은 집 아이가 다니는 학원과 같지도 않다.
 
사정은 이러한데,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니 80%에겐 죽어라 죽어라 하는 세상이다. 여력이 있는 20%는 인터넷과 SNS 세계에서도 과잉 대표된다. 그들은 여전히 민주당과 국민의힘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놓고 정치 평론을 즐긴다. 정치는 사회 성원의 일반적 반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데 정치가 저 꼴이라는 생각은 버리자. 내가 현실의 본질과 구조를 못 보거나 눈 감기 때문에 정치가 저 꼴이다.

2021/02/09 08:09 2021/02/09 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