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20/10/26 이건희의 죽음
  2. 2020/10/19 소중한 개인주의
  3. 2020/10/16 사욕
  4. 2020/10/14 조정래는 대작가인가?
  5. 2020/10/12 예술가들
  6. 2020/10/12 청년 문제
  7. 2020/10/08 가을날
  8. 2020/10/06 내부 갈등
  9. 2020/10/05 매끈한 사회 대립
2020/10/26 18:35
이건희 씨가 죽고 그에 대한 논평들이 많다. 좌파연/진보연하며 알뜰히 시장 이득을 챙기는 쪽보다 일관성을 가진 시장주의자를 오히려 존중하는 편이라서인지, 내 타임라인에는 그를 상찬하는 글도 눈에 띈다. 인상적인 건 비판하는 사람들은 윤리적 서술이 많고, 상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서술이 많다는 점이다.

전자에게 개인 이건희는 매우 탐욕스럽고 잔혹하며 양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다. 이 경우 그가 만들어낸 사회적 문제들은 그의 끔찍한 인격에 기인하는 셈이다. 후자에게 이건희의 개인 인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이런 경향은 확실히 달라진 면이 있다. 나는 전자의 사람들도 윤리적 차원을 벗어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건희 씨가 사회적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고 개인적으로도 나쁜 인간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설사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아니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단지 공적인 차원과 사적인 차원을 구분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가 자본가였음을 기억하자는 말이다. 자본가는 자본의 무한정한 축적운동을 수행하는 인간, 즉 ‘인격화한 자본’이다. 자본가로서 이건희의 행동은 그의 개인 인격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건희 씨는 인격화한 자본으로서 특별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즉 평가의 기준은 모호하고 종종 감상적이기 쉬운 윤리가 아니라 평가하는 사람의 세계관과 철학이어야 한다.

(굳이 덧붙이자면 한 인간으로서 그보다 더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존엄사'가 무엇인지 안다. 그는 존엄사에 반하는 죽음을, 그것도 몇해에 걸쳐 맞아야 했다. 그 특별한 비참 역시 인격화한 자본으로서 특별한 성취 덕이었다.)
2020/10/26 18:35 2020/10/26 18:35
2020/10/19 09:33
자유인으로서 삶에 개인주의가 기본적인 덕목임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시스템은 집단주의로, 즉 개인들을 단지 집단의 구성물로 만들어 개인으로서 힘을 소거한다. 전통적인 형태는 물론 국가주의/민족주의의 사용-악용이다. 그러나 더 새롭고 보편적인 형태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이다.

‘경쟁하는 경제 주체’로 축소된 개인은, 개인이 아니라 또다른 집단의 구성물일 뿐이다. 이 형태의 특별한 강력함이 있다. 국가주의/민족주의 형태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바람직한 개인주의로 여겨진다. 개인이 이른바 근대적 의식으로 국가주의/민족주의 형태 집단주의를 넘어서면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라는 더 큰 함정이 기다리는 셈이다.

대개 개인들은 국가주의/민족주의 형태 집단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형태 집단주의의 구성물로 살아간다. 두 그룹의 개인들은 ‘전근대:근대’ ‘보수:진보’ ‘구세대:신세대’ 등의 양상으로 대립하며, 집단의 구성물이라는 공통점을 유지한다. 개인주의는 여전히 가장 소중한 숙제이다.
2020/10/19 09:33 2020/10/19 09:33
2020/10/16 17:25
조정래 씨에 대한 글에 마음 상해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마음 쓰인다. 우선 작가로서 조정래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그가 지나치게 과대 평가되었고 과도한 권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강요할 생각은 물론 없다.  다만 ‘조정래는 대작가인가?’ 한 번쯤 되물어보는 건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통념화한 권위는 해롭기 마련이니.

‘사적 욕망’이라는 표현에 대해 좀더 설명드린다. 나는 조정래 씨가 노무현-문재인 정권으로 대변되는 주류 리버럴 세력을 지지하는 일은, 내가 그 세력에 비판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권리라 본다. 문제는 방법이다. 그는 함께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한국 사회는 반공주의, 국가주의, 지배이념으로서 민족주의의 폐해가 오랫동안 사회를 갈기갈기 찢고 많은 사람을 죽고 상하게 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더는 그것들을 사용한다면 진영을 넘어 사회의 적이 분명하다.

누가 사용하는가도 문제다. 그것들을 사용해온 건 언제나 극우 세력이었다. 그런데 그 세력에 대한 저항을 훈장 삼아 지금 권력과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이 사용한다면 용서받기 어렵다. 몇 달 전 죽창가 운운 지껄인 조국과 이번 조정래는 그 최악의 경우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무리한 행태를 보이는 원인은 단지 과도한 진영논리일까? 아니다. 사욕이다. 진심으로 진영을 생각하는 사람은 즉각적으로 진영 내의 호응을 얻더라도 진영에 해를 가져올 수 있는 짓쯤은 분별할 수 있다.
2020/10/16 17:25 2020/10/16 17:25
2020/10/14 12:51
조정래 씨가 했다는 말은, 그 관점이나 내용 이전에, 한 노년 남성의 극히 사적인 욕망이 역사의식(!)이라는 거대한 가면을 쓰고 공중 앞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가련하고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정작 불편한 건 조 씨에 대한 거의 모든 논평이 공유하는 ‘대작가’라는 전제다. 80년대, 감상적 민족주의와 감상적 계급의식의 범벅으로서 86들이 만든 권위가 여전히 사회 일반에 작동하는 건 기이하다. 그러니 ‘대작가 조정래가 저런 말을?’이라는 반문은 이렇게 바꾸는 게 좋겠다. ‘조정래는 대작가인가?’

참고로, <태백산맥>이 86의 필독서 대접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나, 모든 86은 아니었다. 나도 2권 중간에 놓았다. 중학 2학년 때 읽은 <여명의 눈동자>보다 낫지 않았으므로.
2020/10/14 12:51 2020/10/14 12:51
2020/10/12 18:06
“전통적으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 ‘억압받는 인민’ ‘고통받는 민중’ 등으로 표현됩니다.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열악한 상황은 시스템에 대한 질문보다는 무력감과 순응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듯합니다. 조직 노동은 상위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며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과 대안적 비전을 잃었습니다. 급진적 인텔리들은 포스트모던 유행 이후 대학과 제도 학술시장에 대부분 포박되었습니다. 코로나 시대는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와 재구성을 요청합니다. 그 현재적 주역은 예술가일 거라 생각합니다. 직업으로서 예술가만이 아닌, 여전히 상상하고 실험하며 시도하는 유일한 사람들 말입니다. 예술가들, 그리고 예술가로서 살기 원하는 시민들과 함께 세미나는 계속됩니다.”

<예술가를 위한 자본주의 세미나 1>을 마치며 보낸 편지.
2020/10/12 18:06 2020/10/12 18:06
2020/10/12 15:52
내 삶을 억압하는 구조에 질문하고 분석하려 하기보다는,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끼리 위로와 교감이라는 이름의 감상주의에 머문다고 해서 탓하긴 어렵다. 다만 뒤에서 웃는 사람들이 있다. ‘청년 문제’(세대의 탈을 쓴 노동 문제)는 당사자에게서나, 그들의 급진화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는 시스템에서나 대체로 그렇게 흘러가는 듯하다. 아직은.
2020/10/12 15:52 2020/10/12 15:52
2020/10/08 09:00
자전거 타기 좋은 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가을날이 올 거라 확신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난여름 기후는 내내 기이하고 불안정했다. 감사한 일이다. 이쯤 해서 더 늦기 전에 본질적 사유를 놓지 말라는 사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 파괴와 자연 파괴는 언제나 하나다.
2020/10/08 09:00 2020/10/08 09:00
2020/10/06 14:26
‘내부 갈등’엔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다. 단지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일 수도 있고, 노선이나 견해 차이와 관련한 갈등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자보다 후자를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후자를 앞세운 전자인 경우도 있긴 하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내부 갈등, 즉 근래 한국 리버럴 진영에서 벌어진 내부 갈등은 독특하게도 윤리적 추문에 대한 견해 차이로 시작되었다.

윤리 문제는 정의 추구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법적 차원과는 합치하지 않는다. 원론적으로 법 정신은 윤리를 담으려는 경향을 갖지만, 현실에서 법은 여러 이유와 사정으로 결함과 구멍을 갖는다. 그래서 조국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윤리적 비판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반박하는 건 적절치 않다. 합법적이지만 얼마든 비윤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조국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설사 조국이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법에 결함이 있어서라 생각할 것이다.

내 글에서 말하고자 한 건 ‘윤리’가 아니라 ‘변화’에 관해서이다. 윤리 문제는 물론 중요하며 앞서 말했듯 그 자체로 정의 추구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윤리와 변화는 같은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쉽게 말해서 ‘윤리적 조국’ ‘윤리적 윤미향’이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내진 않는다. 구조를 정상화한다. 조국이나 윤미향 등에 대해 윤리적 비판은 리버럴 진영을 급진화하거나 넘어서는 일이 아니라, 리버럴 진영을 정상화하는 노력이다. 그걸 소망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진보나 좌파라 여기는, 시스템의 변화를 바란다는 사람이 그런 윤리적 비판에 전념한다면, 심각한 착각(리버럴 정상화 작업이 좌파 활동이라 믿는)에 빠져있거나, 지독한 지적 게으름에 빠져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 내가 바라는 게 현재 시스템의 ‘정상성 회복’인지 ‘정상성의 변화’인지 생각해보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20/10/06 14:26 2020/10/06 14:26
2020/10/05 13:12
조국이니 윤미향이니 하는 인물들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 가장 주요한 사회비판이 되고, 대통령을 간신들에 휩싸여서 충신을 멀리하는 왕으로 상정하며, 옛왕(노씨 성을 가진)을 그리워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멀쩡하게 유통되는 상황은 심란스럽고 불길한 구석이 있다.

사회비판으로서 인물비판은 사회 운영에 참여하는 공식적 권한이 소수 귀족에게만 있던 사회에서 결정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비판이 인물비판으로만 흐른다는 건, 다수 인민에게서 사회의 주인이라는 자부가 해체되고 있음을 뜻한다.

조국이나 윤미향의 행태에 대한 분노에 공감한다. 그러나 본질은 그들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그걸 양산하는 구조다. 조국과 윤미향은 그 구조의 반영이며, 그 구조의 수많은 양산품(조국들과 윤미향들)의 일부다. 둘은 구조를 상징할 수 있지만 둘을 솎아낸다고 구조가 붕괴하진 않는다.

최근 한국에서 사회비판이 인물비판으로 흐르는 다른 주요한 이유는, 비판하는 쪽과 비판받는 쪽이 이념이나 사회 전망에서 차이가 없다는 데 있다. 조국 사태 직전까지 둘은 한편이기도 했거니와, 격렬하게 대립하는 지금도  개인 윤리를 둘러싼 ‘내부 갈등’의 성격을 벗어난다고 하긴 어렵다. 구조 비판은 어렵거나, 애당초 불가능하다.

두 그룹 사이에도 정의의 자리는 있을 것이다. 존중한다. 그러나 오늘 대개의 사람들의 삶을 좌우하는 노동-경제 의제나 이후 사회 모델 의제에서 둘은 대립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정의는 둘 모두의 너머에 있다. 또한 우리는 둘의 요란스러운 대립이, 마땅히 있어야 할 대립, 이념과 사회 전망에서 분명한 차이를 갖는 사회 대립을 매끈하게 대체하고 있음을 지나치기 어렵다.
2020/10/05 13:12 2020/10/05 1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