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은 조응하는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절반은 싱거운 것일 수 있다. 개신교는 ‘자본주의 버전의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타락한 교회에 대한 개혁 운동일 뿐 아니라, 부르주아가 귀족의 세계를 제 것으로 접수하는 오랜 전쟁의 첫 승리였다.
중세 봉건제 사회를 지탱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가톨릭이다. 피지배계급, 즉 생산을 담당한 농노에게 제 곤궁한 삶도 영주의 호화로운 삶도 신의 뜻이었다. 진정한 삶은 죄로 물든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 있었다. 부의 추구는 죄악시되었으므로, 부는 신분으로 그걸 확보하는 귀족에게만 정당했다.
종교개혁은 그 모든 걸 뒤집는다. 칼뱅은 아예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막스 베버는 바로 그 개신교 정신이, 부르주아의 금욕 정신이 자본주의의 뼈대를 이루었다고 했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구조와 작동 법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었다. 부르주아가 봉건 귀족과 달리 부를 사치에 소모해버리지 않고 근검과 절제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부를 처음으로 자본, 즉 ‘증식하는 부’로 다루었다. 부르주아의 근검과 절제는 금욕이 아니라 이윤 추구와 축적 활동의 지속을 위해서다.
자본주의는 '개신교 정신' ‘부르주아의 정신’ 따위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무한정한 자기 증식 운동에 의해 작동한다. 자본가는 그 운동을 현실에서 담당하는 존재, 즉 ‘인격화한 자본’일 뿐이다. 그의 정신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본의 정신이다.
물론 오늘 가톨릭은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이 아니다. 교황과 사제를 가진 또 다른 개신교(자본주의 버전의 기독교라는 의미에서)이다. 결국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은 조응하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 정신’이 ‘예수의 정신’이라는 의미에서만 제대로 성립하는 셈이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