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8/28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
  2. 2020/08/21 비판하지 않는 비판
  3. 2020/08/03 200호 인사
2020/08/28 22:27
지난 글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은 조응하는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절반은 싱거운 것일 수 있다. 개신교는 ‘자본주의 버전의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타락한 교회에 대한 개혁 운동일 뿐 아니라, 부르주아가 귀족의 세계를 제 것으로 접수하는 오랜 전쟁의 첫 승리였다.

중세 봉건제 사회를 지탱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가톨릭이다. 피지배계급, 즉 생산을 담당한 농노에게 제 곤궁한 삶도 영주의 호화로운 삶도 신의 뜻이었다. 진정한 삶은 죄로 물든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 있었다. 부의 추구는 죄악시되었으므로, 부는 신분으로 그걸 확보하는 귀족에게만 정당했다.

종교개혁은 그 모든 걸 뒤집는다. 칼뱅은 아예 최초의 자본가 정신을 설파한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막스 베버는 바로 그 개신교 정신이, 부르주아의 금욕 정신이 자본주의의 뼈대를 이루었다고 했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구조와 작동 법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었다. 부르주아가 봉건 귀족과 달리 부를 사치에 소모해버리지 않고 근검과 절제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부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부를 처음으로 자본, 즉 ‘증식하는 부’로 다루었다. 부르주아의 근검과 절제는 금욕이 아니라 이윤 추구와 축적 활동의 지속을 위해서다.

자본주의는 '개신교 정신' ‘부르주아의 정신’ 따위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무한정한 자기 증식 운동에 의해 작동한다. 자본가는 그 운동을 현실에서 담당하는 존재, 즉 ‘인격화한 자본’일 뿐이다. 그의 정신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본의 정신이다.

물론 오늘 가톨릭은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이 아니다. 교황과 사제를 가진 또 다른 개신교(자본주의 버전의 기독교라는 의미에서)이다. 결국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은 조응하는가’라는 질문은 ‘기독교 정신’이 ‘예수의 정신’이라는 의미에서만 제대로 성립하는 셈이다.
2020/08/28 22:27 2020/08/28 22:27
2020/08/21 13:09
알다시피 기독교는 하나의 통일 종교가 아니다. 한국을 중심으로 본다면 개신교와 가톨릭이 기독교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둘 안에서도 차이들이 있다. 로마교황청의 단일 시스템인 가톨릭보다 수많은 독립 교단으로 구성된 개신교 안에서 차이는 훨씬 더 크다.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이니 차이들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며, 차이는 존중되어야 한다.

문제는 차이가 아닌 차이다. 성서와 예수라는 기독교의 기본 정신을 완전히 벗어난 경우다. 한국의 극우(흔히 '보수'라 불리는) 개신교는 그 세계적/역사적 사례이다. 근래 많은 사람이 극우 개신교가 기독교 정신을 벗어났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 사실이야말로 보수 개신교가 한국에서 70년대를 중심으로 유례없는 성장을 이룬 이유이기도 했다. 즉 이 종교 형태가 70년대 한국 인민의 평균 의식과 성공적으로 조응했다는 말이다.

이제 이 종교 형태는 적어도 40대 이하 한국 인민의 평균 의식과 대립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소멸해가긴 할 것이다. 워낙 덩치가 커서 무시할 수만은 없지만 ‘죽어 사려져 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걸 비난하고 개탄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서 그친다면, '개독교' 욕만 하고 만다면 실은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반이명박 운동 이후 한국에서 ‘진보적 사회 비판’이란 대개 이런 방식, 최악의 부분을 비난하고 개탄함으로써 제 상식을 확인하는 데 머무는, 실은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 방식이다. 보다시피 안으로 곪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 대해 뭔가 실제로 말한다면, 그 출발점은 현재 정상적인 기독교라 여겨지는(극우 개신교가 70년대에 그렇게 여겨졌듯) 기독교 형태를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일이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이다. 기독교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조응하며 지속하여 왔는데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은 과연 얼마나, 어떻게 조응하는가? 극우적 자본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 형태의 쇠락, 혹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 형태의 일반화를 기독교 정신의 회복 혹은 ‘교회개혁’이라 할 수 있는가?  등등.
2020/08/21 13:09 2020/08/21 13:09
2020/08/03 17:01
지난 10일 고래가그랬어는 조용히 200호를 맞았습니다. 어린이 독자들에게 인사말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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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세상에서 지내기 쉽지 않죠? 이 바이러스는 원래 동물하고만 관계했는데 10여 년 전부터 변종과 변이를 거듭하며 인간을 공격하고 있어요. ‘공격’이라는 말은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말일뿐, 바이러스는 그저 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거죠. 인간 문명이 자연과 관계에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섰고, 그들은 파괴된 삶의 터전을 다시 꾸리고 있어요. 그러니 백신을 만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인간 문명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동무들도 짐작할 거예요. 물론 이 모든 상황의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고, 삼촌도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껴요.

200호 고그를 맞아 ‘교양’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봤어요. 고그 표지에는 ‘하나뿐인 어린이 교양지’라고 적혀있죠? 맨 첫 장엔 이렇게 적혀 있고요. “‘스스로 생각하는 힘’ ‘동무와 함께하는 마음’이 교양입니다. 교양은 나를 삶의 주인으로 만들고 내가 살아갈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없으면 나는 삶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된다, ‘동무와 함께하는 마음’이 없다면 내가 살아갈 세상이 더 나쁜 곳이 된다는 말이겠죠. 코로나19 세상도 결국 그렇게 온 거 아닐까요? 사람들이 성적만 생각하고 경쟁만 생각하느라, 교양을 잃어버린 결과로요.

‘하나뿐인 어린이 교양지'로서 고그는 할 일이 더 많아졌어요. 힘껏 고민하고 애써볼게요.

발행인 삼촌 김규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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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고래가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더 좋은 고래가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200호가 되도록 이윤 축적이나 성장이 아닌 발간 지속과 정체성 유지를 운영 원칙으로 삼게 해주신 139명 고래주주들께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구독료를 부담하기 어려운 어린이들과 속깊게 연대해온 1,396명(2,491곳)의 고래이모, 삼촌들께 존경의 인사를 드립니다.

200호 맞이 구독권 할인 행사는 7일까지 진행됩니다. 한정 인원이 거의 찼으니, 신청할 분은 조금 서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2020/08/03 17:01 2020/08/03 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