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연대가 시민의 상식일 수 있다면 희생이나 양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렵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역시 사회가 나를 돕고 지켜준다는 믿음에 기반한 상식이다. 한국처럼 각자도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80의 사람들에게 사회연대의 요구는 일방적 희생이나 양보의 강요라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더 나아가기 위한 비판과 토론은 필요하지만, 인격적 비난이나 폄훼는 온당하지 않다. 사회연대가 있든 없든 큰 문제없이 살아가는 20의 사람들에게서 라면 특히 그렇다. 모욕감은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 않는다.
'2020/01'에 해당되는 글 8건
- 2020/01/31 모욕감
- 2020/01/29 켄 로치 선생
- 2020/01/26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2
- 2020/01/24 기생충
- 2020/01/22 두 번째 책
- 2020/01/14 배운 사람
- 2020/01/13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 2020/01/03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2020/01/31 11:02
2020/01/29 18:57
<미안해요 리키>를 이제야 봤다. 전통적으로 계급적이고 당파적인 영화들은 선악 이분법을 따른다. 노동자나 인민은 선량하고 온정적인 인간들로, 자본가나 관리자는 잔혹하고 야비한 인간들로 그려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실제 현실에서 인간은 꼭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분법은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 인격과 윤리 차원으로 치환함으로써 정서적 공감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특히 관객이 매체에 대한 경험과 반응에서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이 무구하던 시절 에이젠슈테인이나 푸도프킨의 영화는 선동과 집단 결속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가 그런 영화를 내놓는다면, 우리 가운데 그를 작가로서 감독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켄 로치 선생의 오랜 필모그래피에서 선악 이분법은 애초부터 없다. 그는 즉각적 선동은 물론 설사 전선 강화를 거스를 우려가 있더라도, 시스템 안에서 인간들을 낱낱이 드러낸다. <랜드 앤 프리덤>이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역사물이라면 모를까 <네비게이터>처럼 현실에서 진행 중인 투쟁과 결부한 작품에서 그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켄 로치 선생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한다. 나쁜 인격을 가진 노동자가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건 정당하다는 사실과,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으로서 임무를 회피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그런 창작 철학을 접은 영화이다. 리키와 에비는 선량하고 온정적인 불의한 시스템의 순수한 피해자들이며, 그들을 부리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옛 영화의 ‘배 나온 악덕 사장’처럼 잔혹하고 야비하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관객을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게 아니라, 울게 한다.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비슷했다. 알다시피 두 작품은 켄 로치가 2014년 <지미스 홀>로 은퇴를 선언했다가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것이다. 선생에게 현재 세계는 작가로서 창작 철학보다는, 당장 가용한 공감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할 만큼 참혹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창작 철학이 갖는 미덕 때문에 그의 영화를 좋아했다. 이젠 그 미덕을 접을 수 있는 그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 켄 로치 선생은 1936년생이다. 선생은 한 인간이 일생에 걸쳐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념과 이상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잘 늙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2020/01/26 19:18
‘거지 로봇으로 환생한 예수의 열두 제자.’ 권병준의 로봇 작업은 그렇게 시작했다. 첫 버전은 지난해 1월 루프에서 전시로 소개되었고, 두 번째 버전이 플랫폼엘에서 공연 형태로 열린다. 알다시피 꽤 오랫동안 개성 있는 밴드 뮤지션으로 활동했던지라 공연은 좀 더 흥미롭다. 나와는 재작년 아르코에서 협업 이후 장기적인 계획으로 렉처 퍼포먼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중 지난해 세월호 5주기 때 보안여관에서 기억. 질의응답 시간에 관객 한 분이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들의 노래들을 채록하고 관심을 두는 이유를 묻자 그가 답했다. ‘결국 희망은 그들에게서 나올 거라 생각해요.’ 동의한다. 근본적 희망은 언제나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나온다.
31일부터 2월 2일까지 총 5회 공연
2020/01/24 11:24
기생충은 두 번에 걸쳐 봤다. 처음 볼 때 중간에 나왔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중반부에 이르자 진부한 느낌과 얼마간의 불쾌감이 생겼다. 박차고, 나온 건 아니고 나머진 다음에 봐도 되겠다는 동행자와 합의가 이루어졌다. 마저 봤을 때 역시 깔끔하게 잘 만든 영화라는 건 확인했지만 예의 불쾌감도 확인했다.
영화든 다른 예술이든 대상화에 좀 더 엄격한 윤리가 따르는 문제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빈곤이다. 빈곤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이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을 대상화하여 제 작품을 만들 때 유일하게 윤리적인 방법은 빈곤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에 맞서는 일과 결부 지어서이다. 켄 로치와 그의 영화들은 그 사례라 할 수 있다. 기생충엔 그 점이 말끔하게 소거되어 있다.
기생충은 빈곤 상태에 있지 않거나 빈곤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의 일원인 사람들이 아무런 불편이나 책임감 없이 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냄새 맡고 가지고 놀게(수익, 명예, 행사, 파티 등) 해준다. 피시의 본디 의미를 존중하는 전제에서 말하자면, 기생충은 서구 피시충들이 애완하기 맞춤한 영화다. 보다시피.
2020/01/22 18:59
책들 가운데 매체에 발표한 글 모은 걸 뺀 전작 집필은 <예수전>(2009) 뿐이다. 그리 보자면 <혁명노트>는 두 번째 책인 셈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긴요한 이야기들을, 최대한 간결하게, 담는 걸 목표로 했다. 작은 분량에 방대한 내용을 서술하는 작업이라 꽤 애를 먹었다. 물론 그만큼 나에게 약이 되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사유의 총체성이 보완되었달까. 덕분에 다음 책 작업은 좀 더 수월할 듯싶다. 설 직후 예약 판매를 시작하고 2주 후 발간한다고 한다. 디자이너의 작업 컨셉은 이렇다. ‘뭔가 주장하거나, 설교하거나, 과장되는 것 없이 깔끔 건조한 이미지. 약간의 여백과 거리 두기.’
2020/01/14 10:13
억압받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인간적인 태도이다. 지성적 태도란 그에 더해, 억압에 질문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억압받는 원인은 무엇인가?’ ‘저 사람은 억압받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억압을 없애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스템에 대해 질문하고(비판) 시스템 속의 나에 대해 질문하며(성찰) 시스템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 질문한다(실천). 배운 사람의 기본 태도이자 배우는 이유이다.
2020/01/13 12:12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물론 우리는 대체로 동의할 테지만, 좀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먼저 모든 노동이 존중받지 않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에 기여하지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지도 않지만 부자의 소득을 늘리는데 기여하는 노동은 이미 과하게 존중받는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란 모든 노동이 아니라 현재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의미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주의와 어긋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자본의 이윤 추구에 사용되는 상품이다. 자본은 공장이나 사무실을 임대하고 기계, 원자재를 구매하는 일과 동일한 이유로 노동력을 구매한다. 자본이 시장에서 낮은 가격이 매겨진 상품(저임금 노동력)을 제가격에 구매하고 가격에 맞게 취급하는 게 비난받을 일일까. 결국 근본 문제는 인간 노동이 상품인 사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사회주의라 부르든 코뮤니즘이라 부르든 노동이 상품이 아닌 사회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회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란 동정이나 시혜의 범주에 머문다.
현재 한국보다 훨씬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라 지목되는 사회들의 특징은 노동이 상품이긴 하되 가격을 시장에만 맡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사회들 역시 노동이 상품이 아닌 사회를 만들려는 투쟁(과 그에 위기를 느낀 시스템의 타협)으로 만들어졌다. 새로운 사회는 현재 사회의 정의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조국과 윤석렬 사이의 혹은 유시민과 진중권 사이의 사회정의를 말하는 건 의미있는 일이지만,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2020/01/03 14:44
TV의 변함없는 정치적 소임은 세계의 일부를 말하면서 전부를 말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그 꽃은 ‘TV토론’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구도는 지배계급의 ‘보수 분파 V 자유주의 분파’의 대립이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사회문화 부문에서 보수 분파가 괴멸하다시피 함으로써, 자유주의 분파끼리 대립이라는 희한한 구도가 나타나고 있다.
아직 한국 TV의 컨텍스트(부르디외 선생이 말한), 즉 이념적 상한선은 자유주의이므로 ‘자유주의 V 좌파’ 구도는 기대하기 어렵다. TV 토론에서 계급이나 사회주의 이야기를 하는 건 방송사고에 해당한다. 그러나 구도가 어떻든, TV의 정치적 소임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게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하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아무리 진전해도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행여 이 이야기를 상투적인 이데올로기론으로, TV가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허위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식의 이야기로 오해하진 않길 바란다. 사태의 진실은 TV가 시민을 잡아먹는 게 아니라, 물신화한 시민이 TV를 양식으로 한다는 데 있다. TV의 정치적 소임을 실제로 구현해주는 건, ‘정치의 주체’가 되길 회피하기 위해 ‘정치극장의 관객’이 되는, TV 토론 시청과 허세에 찬 논평에 열중하는 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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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 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는 길 스콧 헤론이 1970년 발표한, 랩과 힙합의 효시가 된 곡 제목이다. 내가 참여한, 2017년 SFX 서울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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