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9/09/30 혁명 노트
  2. 2019/09/30 좌파의 집
  3. 2019/09/27 구경거리
  4. 2019/09/25 노예근성
  5. 2019/09/22 누가 검찰개혁을 반대하는가?
  6. 2019/09/17 질문의 회복
  7. 2019/09/16 염치 2
  8. 2019/09/16 염치
  9. 2019/09/11 나쁜 말과 틀린 말
  10. 2019/09/10 먼 산, 2010
  11. 2019/09/09 모습
  12. 2019/09/08 어리석은 부모
  13. 2019/09/07 ‘검찰 쿠데타’에 대하여
  14. 2019/09/04 ‘강남’ 좌파, 강남 ‘좌파’
2019/09/30 16:09
며칠 전 <혁명 노트>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부제는 ‘물신세계에서 삶의 회복’. 작은 책인데, 내용이 방대해서 꽤 애를 먹었다. 물론 공부와 사유의 부족 때문이다. 후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는 흔히 ’혁명이 아니곤 달라질 게 없다’고 말한다. 또한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다’라고 말한다. 많은 진지한 사람들이 지적 우울로 접어드는 원인이다. 그러나 ‘혁명이 가능한가’보다 중요한 건 ‘혁명이 무엇인가’이다. 20세기 혁명의 참담한 실패는 혁명에 대한 오해와 생략의 결과이기도 했다. ‘개인’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엘리트 혁명가에 의한 ‘구출’을 인민의 ‘해방’이라 여겼으며, 새로운 사회 시스템이 저절로 새로운 인간을 주조해낼 거라 믿었다. 혁명은 ‘현재 사회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construction)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새로운 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정부’ ‘새로운 지배 시스템’이다. 혁명은 건설이 아니라 ‘이행’(transition)의 일이다. 현재 사회가 새로운 사회로 물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언제나 어떤 수준으로든 ‘진행 중’이며, 질문은 ’새로운 사회가 올 것인가?’가 아니라 ‘내 삶 안에 새로운 사회의 편린이 있는가?’이다. 책이 나오면, 합당한 실천과 활동을 해나갈 계획이다.
2019/09/30 16:09 2019/09/30 16:09
2019/09/30 10:00
‘진보/보수’는 상대적 개념이므로, 기준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 기준을 ‘극우 체제’로 두면 현정권과 그 지지세력, 즉 자유주의 세력은 ‘진보’가 맞다. 그러나 기준을 자본주의로 두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유주의 세력은 극우 세력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에 기반한 ‘우파’이다. 이런 개념적 혼선은 ‘계급적 이념적’ 차원의 사회적 비판과 토론을 ‘윤리적 인간애적’ 차원으로 바꿔놓는다. 누구도 윤리와 인간애를 대놓고 부인하진 않기에 사회적 비판과 토론은 공전한다. 비판과 토론은 자유주의 세력의 ‘단계론’, 일단 극우 세력 청산이 우선이라는 논리로 빨려들어간다. 근래 사태와 상황은 좌파가 이 수렁을 빠져나갈 때가 지났음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좌파는 생각과 말에서 진보/보수라는 혼선의 기원부터 버려야 한다. ‘진보세력의 이중성과 기만’에 대한 윤리적 배신감이나 인간애적 분노 또한 버려야 한다. 그 배신감과 분노로 좌파로서 행동과 실천을 탕감하는 ‘기생적 생활’을 청산해야 한다. 자유주의 세력은 우파이며 우파로서 정당하고 당연하게, 매우 성공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고 있다. 좌파는 좌파의 집을 지어야 한다.
2019/09/30 10:00 2019/09/30 10:00
2019/09/27 11:16
거듭 밝혔듯 나는 이번 사태를 ‘지배계급 내 분파들끼리 권력 투쟁’이라 본다. 다수 인민으로선 지배계급의 실체가 드러난다는 미덕이 있으며, 일단 어느 진영의 동원도 거부한 채 상황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견해는 현재 한국에서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좌파적 소수 의견’에 속한다. 그와 별개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진보적’ 중간계급 인텔리의 행태다. 의외라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중간 계급의 이중성’을 참으로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다. 그들의 욕망과 계급적 이해는 물론 ‘조국 지지’에 부합한다. 그러나 ‘빠’처럼 경박할 순 없다. ‘비판적 지지’(한계가 있지만 현실적 최선, 이라는 그들의 애용 논리. 특히 대선에서 전면화한다)가 기본 태도가 된다. 그런데 조국이 ‘조로남불’의 조롱거리가 됨으로써, 그들은 조국 지지의 새 핑계를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검찰의 지나친 행태에 조국 지지를 결정했다’는 논리다. 상대가 상사인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인데다, 사모펀드의 전모 파악에 필요한 수사 분량이나 시간만 고려해도 과연 검찰이 지나친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설령 지나치다 하더라도, 그게 조국의 ‘적임자 아님’을 부정할 이유는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적임자로 교체’가 훨씬 더 합리적이다. 즉 그들의 논리는 합리성과 거리가 먼 일종의 ‘논리적 야바위’다.
인텔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고 강의하는, 지적 생활을 지속하는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지성적 삶을 위해서다. 인텔리에게 제 중간 계급으로서 욕망과 계급적 이해를 대상화하는 능력은 지성의 가장 중요한 기초다. 그러나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의 경우, 지적 생활은 제 욕망과 계급적 이해와 일치한다. 평소엔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지금처럼 필요한 순간에는 노골적이고 이악스럽게 드러난다. 신좌파, 포스트 구조주의, 중국사상, 한국문학, 페미니즘, 신학 등 온갖 지식이 징발되고(혹은 폐기되고), ‘성찰적 비판’이 ‘교조적 순수주의 비판’으로 둔갑하는 풍경은, 교과서적일 뿐이지만 그래서 더 새삼스러운 구경거리다.
2019/09/27 11:16 2019/09/27 11:16
2019/09/25 21:50
동정심은 방향이 있다. 동정심은 나보다 처지가 못한 사람, 약한 사람에게로 흐르는 감정이다. 그 상황이 일회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구조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동정심은 분노로 변화한다. 그리고 연대와 투쟁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위엄을 보이는 순간이다. 인간이 분별을 잃을 때 동정심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나보다 처지가 훨씬 나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로 흐르는 동정심을 우리는 ‘노예근성’이라 부른다.
2019/09/25 21:50 2019/09/25 21:50
2019/09/22 14:20
‘지금 중요한 건 검찰개혁이다!’ 아마 가장 최근의 구호인 듯한데, 참 맹랑한 프레임이다. 구호는 ‘조국 반대’와 ‘검찰개혁 반대’를 등치시키며, 조국을 반대하는 시민들을 검찰개혁을 반대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대체 누가 검찰개혁을 반대한단 말인가? 대부분의 시민은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중 상당수는 아예 한국 검찰이 ‘인가 난 조폭’이라고까지 생각한다. 현재 논점은 ‘검찰개혁이 필요한가?’가 아니다. 검찰개혁이 필요한데 ‘적임자가 누구인가?’이다. 당연히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적절한, 개혁의 대상인 검찰조차 쉽게 부정하기 어려운 수준의 정당성과 신망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 점에서 많은 시민은 ’조국은 부적절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검찰개혁을 망가트리는 건, 그런 여론을 무시한 채 임명을 강행하고, 매일같이 추가되는 ‘부적절의 근거들’을 가짜뉴스라 눈감음으로써, 개혁의 대의와 에토스를 갉아먹는 사람들이다. 애초부터 그들이 할 수 있는 검찰개혁이란 시민이 열망하는 그것이 아닌, 기껏해야 진영논리에 입각한 ‘검찰 길들이기’였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마저도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2019/09/22 14:20 2019/09/22 14:20
2019/09/17 16:59
교육의 ‘공정성’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보수 진보를 불문한 기득권 세력이 교육 경쟁을 선점하는 상황이 고착되면서, 근래 몇 해는 자연스럽게 교육에 관한 논의도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공정성을 요구하면 아이들이 교육에서 공정한 권리를 갖게 되는 걸까?
한국 교육은 1997년 IMF 사태를 기점으로 급격히 시장주의화 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공정성 역시 ‘시장 경쟁에서 공정성’이다. 경쟁에서 편법이나 불법을 없애고 공정한 경쟁의 룰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이들이 교육에서 공정한 권리를 갖게 되는 게 아니라, 부모의 ‘순수한 경쟁력 순’으로 줄 세워지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편법과 불법이 없(적)다면, 부자와 기득권 세력의 경쟁 선점은 오히려 더 정당해진다.
아이들이 교육에서 공정한 권리를 가지려면, 먼저 교육을 ‘시장 경쟁의 수렁’에서 구출해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공정성의 요구가 아니라, 시장주의에 맞서는 우리의 ’교육 철학’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 거창한 이론과 개념을 말하는 건 아니다. 교육 철학의 회복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본디 질문의 회복이다.
질문은 이어지고 확장한다. ’아이들은 왜 공부하는가?’ ’교육은 단지 경쟁인가?’ ‘교육은 인간의 성장 과정인가, 상품(인적 자원)의 생산 과정인가?’ ‘자본주의 하에서 교육은 어때야 하는가?’ 등등.

*

2012년 고래가그랬어는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캠페인을 벌였다. 1만여 명의 부모와 시민이 약속(서명)에 참여했다. ‘질문의 회복’에 작은 도움이 되길 빌며, 그때 만든 교육 칼럼집을 다시 나눈다. 편히 받아보시고, 공유도 부탁드린다.


2019/09/17 16:59 2019/09/17 16:59
2019/09/16 13:42
386이 다 똑같진 않았다. 아이를 특목고에 보내거나 조기유학을 보낼 여건이 되면서도, 여느 아이들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게 한 386 부모들이 있다. 좌파로서(혹은 옛 좌파로서) 염치를 갖기 위해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상한선을 스스로 제한한 사람들이다. 더 적극적으로, 비입시 대안교육이나 탈학교 운동을 시작하고 제 아이들과 함께 실천한 것 역시 386 부모들이다. 그 첫 아이들이 20대 중후반을 넘어서고 있다.
사회의 여러 공간에서 차근차근 제 삶을 꾸려나가는 그들은 대체로 우월한 스펙을 갖지 않았다. 제 나름의 이유로 대학을 안 간 경우도 꽤 있다. 그들은 부모의 염치나 이상주의 때문에 희생된, 교육적 ‘실패 사례’일까? 오늘 한국 교육의 일반적 관점, 교육을 ‘인적 자원의 생산 과정’으로 보는 관점에선 그렇다. 그러나 교육을 ‘인간의 성장 과정’으로 보는 기준에선 그렇지 않다. 그들이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시하길 기대해볼 수 있다.
그들 부모 중엔 여전히 급진적 운동에서 활동하거나 '자발적 가난'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수는 오늘 비난받는 386과 크게 다르지 않게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고 사회문화적 기득권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을 더는 가난하지 않다고, 기득권을 가졌다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배운 사람이 역시 다르다’는 덕담이나 할 것이다. 누구도 염치를 아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2019/09/16 13:42 2019/09/16 13:42
2019/09/16 07:57
합법적이지만 비윤리적일 수 있고 윤리적이지만 염치없는 일일 수 있다. 법은 윤리에 못 미치고 윤리는 염치에 못 미친다. 염치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염치는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미의식’에서 온다. 염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음, 추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사유재산권의 자유로운 처분에 기초한 경쟁 체제’(하이에크의 표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최대치를 좇는 삶은 법과 윤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우파의 염치는 그걸로 족하다. 그러나 좌파는 그런 삶을 ‘염치없어’ 한다. 좌파에게,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최대치를 좇는 삶은, 가질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결코 아름답지 않다.
2019/09/16 07:57 2019/09/16 07:57
2019/09/11 12:17
한 중학교 교장이 학생들에게 ‘형편에 맞게 꿈을 가지라’ 말해서 욕을 많이 먹는 모양이다. 나쁜 말을 하면 욕을 먹는 법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의 말이 나쁜 말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는 데 있다. 한국은 중학생이 형편(부모의 부와 기득권)과 무관하게 꿈을 가질 수  있는 교육 시스템과 사회 환경을 가진 나라인가?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없다면, 부끄러움은 그 교장만의 몫은 아니다. 오히려 그 교장의 위악은 모두의 위선을 들춰내고 있지 않은가? 그는 나쁜 말을 했다. 그러나 그를 욕하고 싶다면, 적어도 나쁜 말은 당연히 틀린 말이기도 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쯤은 필요하다.
2019/09/11 12:17 2019/09/11 12:17
2019/09/10 15:19
[2010년에 쓴 글. 어느덧 우리는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먼 산

 
<소꿉>은 놀이운동가 편해문 씨가 인도와 네팔을 오가며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담은 사진집이다. 작년에 책을 내고 나서 몇몇 사람들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책엔 그저 무표정하게 가만있는 아이들 사진이 꽤 들어있는데 이게 무슨 놀이 사진이냐는 거였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사진들을 포함하여 책을 발간한 이유는 그 또한, 아니 우리 현실에선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놀이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이니 놀이캠프니, 놀이도 상품화하다보니 적어도 눈과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정도는 지어야 노는 아이들이구나 싶다. 그러나 빠르고 센 놀이가 있듯 느리고 부드러운 놀이도 있다. 혼자, 혹은 동무와 함께 가만히 앉아 별다른 목적도 내용도 없이 느리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인 것이다.  

며칠 전 충청도 어느 시골 고개를 넘다 눈에 들어온 풍경에 가슴이 저렸다. 외딴집 툇마루에 두 아이가 나란히 걸터앉아 땅에 채 닿지 않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먼 산 보는 아이를 본 게 대체 얼마만인지. 만일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한참 먼 산을 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그 평화로운 풍경을 훼방할세라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지나칠까?

사람이 복잡한 존재인 건 사람에겐 영혼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수치로 계량할 수도 없는 참으로 참 모호한 것이지만, 영혼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며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영혼의 상태로 좌우된다는 걸 우리는 안다. 아무리 초라한 처지라 해도 영혼이 충만한 사람은 아랑곳없이 행복하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도 영혼이 결핍된 사람은 외롭고 허무해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

몸이 아이 시절에 성장하듯 영혼의 크기와 깊이도 아이 시절에 성장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종교활동을 하거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고르듯 이런저런 영성 프로그램을 구매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영혼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잠시 위무할 순 있으되 영혼의 크기와 깊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영혼은 아이 시절의, 상업적으로 프로그램화할 수 없는 놀이 시간에, 느리고 의미 없는 시간에, 그윽하게 먼 산 보는 시간에 성장한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명박이니 반이명박이니 수구니 개혁이니 꽤나 치열하게 미래를 도모하는 듯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일찌감치 영혼을 거세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지구를 휘감은 신자유주의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경쟁할 것을 요구하고, 그 승리의 요건은 삶을 경제적 기준으로 얼마나 효율화하는가, 즉 삶에서 영적 시간을 얼마나 도려내는가에 있다. 그러나 그런 요구를 아이들에게 이토록 철저하고 잔혹하게 적용하는 사회는 없다.

아이들은 놀 시간의 대부분을 사교육 자본가들에게 빼앗기며, 참으로 눈물겹게 확보한 자투리 시간들마저 교활한 연예산업 자본가들과 게임산업 자본가들과 통신산업 자본가들에게 모조리 빼앗긴다. 한국인들을 소를 잡아 그 고기는 물론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먹어치우는 걸로 유명한데 한국 아이들이 바로 그 짝이다. 한국에서 교육이란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할 시간을 1분 1초도 허용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매일같이 그 잔혹극 속으로 밀어 넣으며 말한다. "이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나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우리에겐 아직 영혼이 남아 있는 걸까? (한겨레 2010. 3. 3.)
2019/09/10 15:19 2019/09/10 15:19
2019/09/09 10:53
크고 깊은 산에서 혼자 자는 일.
근사한 점들 가운데 하나는 헤드랜턴 빛으로 텐트 칠 자리를 고를 순 있지만,
주변의 정확한 모습은 아침이 되어서야 드러난다는 것.
2019/09/09 10:53 2019/09/09 10:53
2019/09/08 13:27
아이를 지성인으로 키운다는 건 무엇보다 슬퍼할 일에 슬퍼할 줄 알고 분노할 일에 분노할 줄 알며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을 때 잠 못 이루는 능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지식은 그다음이다. 어리석은 부모는 그 모든 걸 스펙으로 환원하여 아이를 한낱 상품으로 만든다.
2019/09/08 13:27 2019/09/08 13:27
2019/09/07 13:45
국가 기강, 법질서 수호, 대통령의 고유 권한 등은 마치 모든 사회 성원에 해당하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대체로 지배 계급 내에서 기득권 싸움을 미화하는 말들이다. 지배계급은 제 싸움에 인민을 동원하고 여론을 확보하기 위해 그런 말들을 애용하곤 한다. ‘국익’이 국가의 전체 성원의 이익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이익’을 미화하는 말이듯 말이다.

현정권이 말해 온 ‘검찰개혁, 사법개혁’ 또한 그렇다. 그 실제 의미는 전통적으로 자신들(진보 기득권 세력)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검찰 조직을 장악하는 작업이다. 그들은 보수 기득권 세력과 경쟁에서 승리하고 기득권을 안정화, 영속화하는 데 검찰 장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그들의 지난 정권(노무현 정권)에서 뼈저리게 확인했다.

작업은 크게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단계는 검찰에 대한 부정적 정서를 이용하여 검찰개혁이 마치 검찰이 다수 인민의 삶에 봉사하도록 개혁하는 것인 것처럼 여론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것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윤석렬 검찰총장과 조국 법무부 장관이라는 조합으로 검찰 장악을 신속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 예상치못한 상황을 만났다.

문 대통령은 윤석렬을 임명하면서 “살아있는 권력 눈치도 보지말라”고 덕담했지만, 그가 이럴 거라곤 현 정권의 누구도 예상 못했을 것이다. 그 주요한 원인은 윤석렬이라는 좀처럼 보기드문 캐릭터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자의식(“기존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는 기득권 세력이 된 후에도 저항 세력으로서 자의식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 8월 30일에 쓴 글 참고)에 있다.

검찰이 정경심을 기소한 건 현 정권 입장에선 당연히 쿠데타나 반역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다수 인민의 입장에서는 ‘지배 계급 내에서 벌어진 뜻밖의 상황’일 뿐이다. 현 정권과 진보기득권 세력은 물론 이 상황이 전체 인민에 대한 쿠데타나 반역인 것처럼, 금세라도 민주주의 시스템이 파괴되고 검찰 국가로 전락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선동한다.

혹시 검찰로 인해 신변이나 기본권에 직접적 위협을 느끼시는가? 검찰은 단 한명의 평범한 인민도 압수수색하거나 기소하지 않았다. 검찰은 전국민이 아는 범죄 혐의를 가진 한 인물을 불구속 기소 했을 뿐이다. 물론 그 일이 갖는 정치적 맥락과 함의가 있다. 그러나 추측과 예단만 난무할 뿐, 아직 아무것도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오히려 현정권과 진보기득권 세력의 선동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냉정함이다. 더 이상은 지배계급의 사정을 내 사정인 것처럼 일희일비하며 끌려다니지 않는, 주체적 태도다. 그리고 이 ‘뜻밖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이후 펼쳐질 상황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2019/09/07 13:45 2019/09/07 13:45
2019/09/04 18:15
이른바 강남좌파의 논리, ‘부자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한다’는 논리는 타당하다. 흔히 ‘유럽에는 성(城)을 가진 공산주의자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실은 매우 역사가 깊다. 심지어 예수에게도 기득권 부자 조력자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활동에 매우 섬세하게 연대하고 개입한다. 평소 인구보다 다섯배의 순례자가 몰려들어 몸을 누일 방 한칸을 구하기도 힘든 유월절 축제 기간에 최후의 만찬을 위한 넓은 공간을 마련한 것도 그들이고, 예수가 처형된 후 여느 정치범처럼 짐승의 먹이로 놓이지 않고 장례를 치르고 무덤에 묻힐 수 있게 한 것도 그들이다. 사회진보를 위한 노력은 개인의 계급과 관련이 있지만, 개인의 계급으로 사회진보를 위한 노력을 부인하거나 제한할 순 없다. 강남좌파는 타당하며, 많아서 나쁠 게 없다.

조국이 비난의 대상이 된 건, 그가 강남좌파가 아님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강남좌파로 이미지로 인민의 호감과 지지를 얻으면서, 실은 제 사익과 정파적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비난을 해명하기 위해 자청한 기자간담회에서 조국은 다시 정색하고 말한다. “부자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해왔는데,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있다는 얼굴로 말이다. 가히 사이코패스급 말 뒤집기(‘조적조’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조국의 언어는 대체로 그렇다.)인데, 희한한 일은 소란이 일긴커녕 반박하는 기자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희한한 일은 그 기자들의 '저급한 수준'을 개탄하는 시민들이 조국의 말을 새삼 곱씹는다는 사실이다. ‘맞아. 부자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조국과 강남좌파의 문제는 그들이 ‘강남’이라는 사실에(부자이고 기득권 세력이라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좌파’가 아니라는 사실에(오로지 사익과 정파적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에) 있다.
2019/09/04 18:15 2019/09/04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