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에 해당되는 글 18건
- 2019/08/30 저항 세력
- 2019/08/29 미신 2
- 2019/08/28 미신
- 2019/08/27 삶의 의미
- 2019/08/26 기억
- 2019/08/24 리버럴
- 2019/08/23 계급의식
- 2019/08/22 철학의 복원
- 2019/08/22 자기 해방
- 2019/08/20 정치의 에토스
- 2019/08/20 김대중의 지혜
- 2019/08/17 합법에 질문하자
- 2019/08/15 광복절
- 2019/08/13 아류 제국주의
- 2019/08/11 비근대인
- 2019/08/11 괴물 사회
- 2019/08/08 국제 연대
- 2019/08/02 토론회
2019/08/30 18:25
한 시절 저항 세력이 시간이 흘러 새로운 기득권 세력으로 변해가는 일은 역사에서 흔히 반복되는 풍경이다. 386의 특별함은 기존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는 기득권 세력이 된 후에도 저항 세력으로서 자의식을 고스란히 유지한다는 점에 있다. 그들의 그런 모순적 정체성이 현실 인식에서 파탄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조국이 왜 이렇게까지 비난받는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삶의 철학과 교육 철학에서 조국과 일치하는 그들에게 조국은 저항의 선두에 서서 고통받는 동지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분노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사회 모순의 실체를 모르는 철없고 이기적인 아이들일 뿐이며, 모든 건 가짜뉴스의 폐해다.
2019/08/29 13:49
어제 글에서 ‘미신’이라는 표현에 대해 무속 관련하여 공부하고 가르치는 분이 비판한 걸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종교와 미신을 ‘제도성’ 여부로 구분하는 것에 반대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미신을 이렇게 말한다. “비과학적이고 종교적으로 망령되다고 판단되는 신앙. 또는 그런 신앙을 가지는 것. 점복, 굿, 금기 따위가 있다.” 한마디로 제도 종교가 아닌 건 미신이라는 이야기다.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이야기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과학적ㆍ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음. 또는 그런 일.” 헛소리일 뿐이다. 과학적ㆍ합리적 근거가 있는 것만 믿는 건 종교가 아니다.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는 건 제도성도 과학적ㆍ합리적 근거도 아닌 ‘종교성’이다. 인간이 부질없는 욕망과 번민의 더께로 가려진 제 신성을 자각하고 다른 인간의 신성 역시 인정하는 일, 우주 만물과 연결된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 종교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오늘 한국을 대표하는 미신은 ‘보수 개신교’라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도 가장 심각한 미신은 강력한 제도 종교인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표준국어대사전>의 ‘종교’ 항목은 이렇다.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그 대상ㆍ교리ㆍ행사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애니미즘ㆍ토테미즘ㆍ물신 숭배 따위의 초기적 신앙 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ㆍ불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 따위의 세계 종교에 이르기까지 비제도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이 있다.” ‘미신’에 대한 내용과 완전히 배치된다. 국립국어원은 대체 뭐하는 곳인가?)
2019/08/28 13:16
’빨갱이 청산’이든 ‘수구 청산’이든, 한 개의 구호가 모든 사유와 분별력에 우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주문(呪文)이며, 정치가 아니라 미신이다. 미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2019/08/27 13:28
<사피엔스>도 그런 식이었지만, <팩트풀니스>의 저자들은 여러 통계와 지표들을 나열하며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는데 ‘팩트를 부정하는 과도하게 극적인 심리’로 사람들은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믿는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부러움을 살 만큼의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우울증이 만연하고, 10대 아이의 ‘예측 못 할 자살’을 근심하는 이유도 ‘팩트를 부정하는 과도하게 극적인 심리’ 때문일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잘살아가게 하는 건 제 나름의 ‘삶의 의미’다. 경제적 안정이나 안전은 그걸 위한 조건일 뿐이다. 자본주의 물신숭배 현상은 그 조건으로 삶의 의미를 일괄 대체한다. 물신숭배의 강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끝없이 고통받는다. 그러나 그 이유를 해명할 수 없기에 ‘팩트를 부정하는 과도하게 극적인 심리’로 이유가 실재하는 가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팩트를 부정하는 과도하게 극적인 심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결국 이런 부류의 책들은 두 가지 심각한 결여를 갖는 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의 결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결여. 물론 그것이야말로 그 책들이 유행하고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9/08/26 19:38
만일 당신이 이번 상황으로 분노한다면, 그리고 그 분노가 온당하다고 믿는다면, 평소 당신이 선호하는, 당신이 세상을 보는 주요한 창으로 삼거나 도움을 얻은 미디어와 지식인들이 그 분노를 어떻게 담고 있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그리고 기억하기 바란다. 지금 당신의 분노를 축소하거나 무력화하는 데 여념이 없는 미디어와 지식인을, 실은 그들이 이미 오랫동안 당신의 분노를 축소하고 무력화해왔음을.
2019/08/24 22:13
역사 속의 혁명가에겐 무한한 애정을 표시하지만 현재의 혁명가는 끝없이 혐오하는 사람, 역사 속의 파시즘에는 목숨이라도 걸듯 반감을 표시하지만 지금 여기의 파시즘은 식별조차 못하거나 그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 가련한 이름 ‘리버럴’. 교양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죽은 자.
2019/08/23 09:40
계급의식이 필요한 이유는 물론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긴요한 이유는 지배계급이 철저한 계급의식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계급의식 없는 지배계급 같은 건 없다. 계급의식 없는 피지배계급, 자신을 온전한 착취와 동원의 대상으로 내주는 피지배계급이 있을 뿐.
2019/08/22 18:30
자식 교육에서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특혜를 취하는(혹은 부와 권력 앞에 주어지는 특혜를 취하는) 부모에게 여느 부모들이 반감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질문이 필요하다. ‘그 특혜는 아이에게 이로운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반감은 단지 ‘경쟁의 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해롭다고 생각한다면(아이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수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반감은 경쟁의 공정성을 넘어 ‘교육 철학’에 관한 것이다. IMF 사태 이후 후자에 해당하는 부모는 지속해서 소멸해왔다. 물론 경쟁의 공정성은 중요하다. 문제는 경쟁의 공정성이 교육의 유일한 주제라는 것, 교육 철학이 사라진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아이 교육에서 어떤 특혜도 취하지 않은 부모는 ‘못난 부모’로 전락한다. 특혜가 일상화한 부모는 ‘떳떳한 부모’로 활보한다. 망해가는 사회의 풍경이다. 우리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일을 지나치게 오래 잊고 살았다. 질문을 재개하자. 교육 철학을 복원하자.
2019/08/22 11:53
많은 인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조국이 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부와 온갖 기득권을 취하는 첫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조국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민이 틀렸다. 한국에서 ‘진보’라 불리는 세력이 보수 기득권 세력에 맞서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옹호한 건 30년 전 이야기다. 진보가 다수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뽑아 올려 제 부와 기득권을 취하는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된 지 이미 20여 년이다. 보수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적이 아니라 경쟁자다. 그들이 여전히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옹호하는 시늉을 하는 이유 또한 ‘경쟁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민이 진심으로 분노할 대상은 20여 년이나 그런 시늉을 믿고 기대를 버리지 않는 자신이지, 이해 추구에 성실한 개인으로서 조국은 아니다. 조국은 진보의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다. 조국이 아니라면 제2 제3의 조국이 있을 뿐이다.
오늘 한국은 하나의 민족도 국가도 아니다. 진보 보수로 나뉜 사회도 아니다. 일반적 범주의 자본주의 사회라 하기도 어렵다. 소수의 진보/보수 기득권 계급이 다수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순수한 약탈 사회다. 인민은 아귀다툼의 한 진영에 자발적 동원됨으로써 약탈 사회를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 그중에서도 결정적 역할은 진보 기득권 세력에 자발적 동원되는 인민이다.(보수 기득권 세력은 실제로도 보수 기득권 세력이며 어떤 다른 시늉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지지하는 인민을 그리 비웃을 건 없다.) 진보 기득권 세력의 최근 행동대장으로서 조국의 ‘애국이냐 이적이냐’ 선동에 열렬히 호응하는 인민이, 그 실체도 모호한 사법개혁이나 공수처 설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실을 바꿔줄 거라 믿는 인민이, 조국의 이해추구 행태에 새삼 실망하고 분노하는 건 슬픈 코미디다.
인민이 제 노동과 권리를, 삶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발적 동원을 멈추는 것이다. 약탈 시스템 안에서 상대적 기대를 미련없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현실 너머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좌파 정당이나 대안 정치 세력도 없지 않으냐 한탄할 것도 없다. 그런 게 없어진 이유가 인민이 약탈시스템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듯, 빠져나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꾸려진다. 관심을 두지 않아서일 뿐, 그 작업에 부릴 수 있는 진지한 활동가와 지식인들도 보여지는 것보다는 많다.
더 밀릴 게 별로 없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좌파가 씨가 마른 지 반세기가 넘은 미국에서도 사회주의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가. 조국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다시 알려주었다. 어떤 우호적인 얼굴을 한 정치 세력이나 엘리트도 이 약탈 사회에서 인민을 ‘대신 해방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있는 변화는 오로지 인민의 자기해방, ‘자기해방하려는 인민’에 달려 있다.
(추신: 약탈 시스템의 진보 측에 기생하며 안정을 구가하는, 바로 지금 온갖 교활한 논리로 조국 임명의 정당함과 부득이함을 늘어놓는 펼치는 교수, 지식인, 기자, 예술가들은 ‘수치’라는 단어를 떠올려보길 권한다.)
2019/08/20 21:36
딱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밀리면 다 죽는다는 계산을 하는 모양인데, 계산할 일이 아닌 걸 계산하면 다 죽는 것이다. 우습게도 상황의 본질을 묘파한 건 조국 측이다. 그들은 며칠 전 ‘국민 정서와 괴리는 인정하지만 적법하다’고 했다. 여기에서 ‘국민 정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의 에토스다. 정치는 로고스(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에토스(정서적 신뢰)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국민 정서와 괴리’는 참작할 문제가 아니라 결정적 본질이다. 에토스가 사라지면 정치도 사라진다. 이 정권의 정치적 에토스는 조국 덕에 이미 상당 부분 손상되었지만, 기어코 임명을 강행한다면 완전히 날아가고 만다.
2019/08/20 09:40
극우세력을 물리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에 약탈 자본주의나 노동 문제 같은 것들은 얼마간 보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극우세력에 대한 반감이야 물론 동감하지만, 그 생각이 한국 사회의 심각한 퇴행을 만들어내는 요인인 것도 사실이다. 사실 그 생각은 70년대에 북한의 위협을 막는 일이 시급하니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보류할 수 있다던 생각과 빼닮았다. 사회 상황과 시민의식의 변화를 고려한다면, 두 생각은 ‘같은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70년대 생각’의 어리석음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거의 유일하게 사상가의 면모를 가진 대통령인)은 언젠가 명쾌하게 해명한 바 있다. ‘최선의 반공은 최선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이다.’ 극우세력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도 다르지 않다. 덧붙이자면, ‘70년대 생각’은 박정희 파시즘을 유지하는 결정적 힘이었다.
2019/08/17 12:32
세상은 불법으로 썩지만, 합법으로 더 썩는다. 이를테면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돈을 세계의 이리저리 옮기는 것만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일은 합법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그런 수익이 합법이기 때문에 세상이 썩는 것이다. 돈은 옮겨 다닌다고 해서 그 자체에서 아무런 새로운 가치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 수익은 실은 수많은 사람의 노동이 만들어낸 가치를 긁어모아 옮겨간 것이다. 보수의 윤리는 합법에 있다. 그러나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이게 바로 상식적인 사회의 윤리 틀이다. 오늘 한국에서 보수의 윤리는 불법에 머물고 진보의 윤리는 합법을 핑계삼는다. 다수 인민은 그런 보수를 보수로 그런 진보를 진보로 지지함으로써 ‘보수+진보’ 약탈시스템이 유지된다. 합법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자.
2019/08/15 13:44
진보적이라 알려진 학술단체들이 주최한 한일 문제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거의 모든 사람이 한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의 경쟁력 등 국가 단위로만 말한다는 사실이었다. 양국 노동자, 독점자본, 인민, 정권, 지배계급 등으로 나누어 말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지나치듯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그건 진보적인 학자나 연구자들만의 변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전반적 변화를 반영한다.
우리는 인식하든 않든 세상을 보는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한국, 일본, 미국, 중국 식으로 세로로 나누어 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서민, 기득권 세력, 인민, 지배 계급, 노동자와 독점자본 식으로 가로로 나누어 보는 방법이다. 전자의 방법에서 각 사회 안의 계급, 이해관계의 차이나 적대들은 생략된다. 쉽게 말해서 이재용과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일치’된다. 지배계급과 기득권 세력은 당연히 이 방법을 선호하며, 모든 제도 교육과 미디어들 역시 이 방법을 기반으로 한다. 세상을 보는 두 방법은 결코 대등한 상태에 있지 않다.
가장 나쁜 건 전자의 방법이 압도하는 상황, 인민의 절대 다수가 전자의 방법을 선택하는 상황이다. 어떤 우연한 혹은 기획된 계기에 의해 국가와 민족의 구호들이 온통 만연할 때, 사회 안의 모순과 모든 실재하는 현실들이 그 구호들에 묻히거나 ‘애국과 이적’의 이분법에 겁박당할 때다. 인민의 권리와 힘은 급격히 위축되고, 삶은 더욱 어려워진다. 지배계급이 신장하는 다수 인민의 권리와 힘을 크게 한 번씩 꺾는 유용한 수법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그 재료는 오랫동안 ‘북괴’와 일본이었다.
다시 광복절이다. 3.1운동 백 주년의 광복절이기도 하다. 나라의 해방이란 무엇인가.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며 인민이며 시민이다. 나라의 해방 또한 백성의 인민의 시민의 해방이다. 나라의 주인이 소수 지배계급과 기득권세력이라면 해방된 나라는 아니다. 지배계급과 기득권세력이 일본인에서 조선인으로 바뀌었다고, 일제부역 극우 세력에서 민주화운동 출신 세력으로 바뀌었다고 달라지진 않는다. 한국은 분명히 독립국가로 존재한다. 그러나 해방은 여전히 한국의 숙제이다.
2019/08/13 18:05
강제징용 문제 등과 관련한 갈등은 빌미일 뿐 본질은 ‘경제 전쟁’이라는 이야기는 그르지 않다. 다만 ‘민족 경제’ 간 전쟁이 아니라 양국 ‘독점자본’과 그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 간의 전쟁이다.
한국은 지난 세기 후반 일본으로부터 첨단 소재 부품이나 기계들을 들여와 전자와 자동차, 조선 등의 산업을 발전시켰다. ‘재벌’이라 불리는 한국 독점 자본은 중소기업들을 하청 계열화하고, 생산 시설을 세계로 확장해간다. 2천년대 들어선 장기 불황에 시달리는 일본을 추월하면서 ‘아류 제국주의’의 면모를 갖추어간다.
소재 부품의 공급도 중국 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일부는 여전히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일본의 기술 수준 측면도 있지만, 미국 애플처럼 일본산 부품소재를 활용한 반도체 공급을 삼성에게 의무화하는 국제적인, 수직적 분업구조도 있다.) 그리고 결국 일본 독점자본을 대변하는 아베가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대응은 서민과 노동자의 편인 양 행세하는 그들이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걸 넘어, 명실공히 지배정치의 주류로서 재벌과 한몸임을 스스로 폭로했다. 그들은 인민이 이 전쟁을 ‘민족 경제 전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선동에 온 힘을 다한다. ‘애국이냐 이적이냐’ 같은 극우의 언어까지 불사하며 재벌의 충견 노릇을 한 ‘진보 법학자’ 조국은 최선의 법무부장관 후보로 지명된다.
역사를 되새겨 본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독점과 제국주의 수탈로 거대한 초과 이윤이 만들어지고, 상위 노동자 일부(영국 노동자 전체가 아닌)가 수혜를 받는다. 빠르게 중산층화, 체제내화한 그들은 노동자 계급 전체가 아닌 자신들의 임금이나 노동 시간 등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비난하며 생긴 말이 바로 ‘노동 귀족’이다.
그 풍경은 80년대말 한국의 민주 노동운동의 구심이던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변해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한국적 노동귀족의 출현은 한국 독점 자본이 성장을 거듭하고 아류 제국주의의 면모를 갖추어가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대다수 한국인과 새로운 세대는 비정규 불안정 노동의 나락으로 쓸려들어갔다. 현재 삼성전자 아시아 공장들의 월 평균 임금은 37만원이다.
2019/08/11 19:22
한국이 근대화한 적 없다는 말은 단지 ‘전근대’(premodern) 사회라는 의미가 아니다. ‘비근대’(non-modern) 사회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의 장년 세대는 대체로 의식과 삶에서 도무지 ‘개인주의’를 발견할 수 없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에 민주화 이후 세대는 대체로 자유주의적/자본주의적 개인주의에 매몰된 경향을 보인다. 단지 ‘이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동일화하여 가격만 다른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와 그 기반 위의 세계를 최선이라 보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개인주의라는 말이다. 자유주의적/자본주의적 개인과 근대적 개인, 즉 ‘자유로운 개인’은 융합할 수 없다. 오늘 한국에서 후자의 사람들이 전자의 사람들을 전근대적이라 비판하고 혐오하는 건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대비를 통해 근대인임을 자부하는 그들 역시 ‘비근대인’일 뿐임을 알기 바란다. 괴물 사회로서 한국의 참상은 갈수록 전근대성보다 비근대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2019/08/11 12:37
식민지 근대화론도 말이 안 되지만 그에 대한 비판 역시 말이 안 된다. 한국은 근대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다만 자본주의화했을 뿐이다. 한국의 보수는 자본주의의 토대로서 경제 건설을 근대화라 믿었고 진보는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로서 자유주의화를 근대화라 믿었다. 근대는 ‘자유로운 개인’의 탄생이다. 근대화란 그 기반 위에 정치, 법, 학문, 과학, 예술, 윤리, 종교, 교육, 가족, 에로스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구축하는 역사적 작업이다. 한국에서 탄생한 건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적 개인’이자 ‘자유주의적 개인’이며, 오늘 한국은 철저하게 그 기반 위에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구축되어버린 괴물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빈곤하든 부유하든 ‘삶의 의미’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불거지는 자살률과 출산율은 그 반영이다. 여전히 많은 한국인은 근대화를 파괴한 두 경로 중 한 편에 서서 참상의 모든 원인과 책임이 다른 한편에 있다고 소리 높인다.종북좌익 세력 척결! 친일독재 세력 척결! 희망은 그 둘 모두에 휩쓸리길 거부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을 모색하는 소수의 근대인에게 있다.
2019/08/08 10:48
한국 시민과 일본 시민의 연대는 지금처럼 국가주의가 불거진 시기에는 구축하기 어렵다. 우리가 광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든 이성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든, 사태의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사태 이전’에 만들어진다. 사태를 통해 발현될 뿐이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의 시민 연대가 지나치게 부족했고, 그래서 양국 지배 세력의 의도에 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성찰하게 된다. 다음 사태를 위해서라도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연대를 모색해보자. 단 그것은 ‘한일 친선’이 아니라 ‘시민들의 국제 연대’ ‘노동자의 국제 연대’로서다. 연대는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인류애와 개인 존엄에 바탕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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