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9/04/29 마술
  2. 2019/04/27 에스프레소
  3. 2019/04/26 인사말
  4. 2019/04/22 노예
  5. 2019/04/21 부활
  6. 2019/04/20
  7. 2019/04/19 근대화, 지옥 2
  8. 2019/04/19 근대화, 지옥
  9. 2019/04/18 연결하기
  10. 2019/04/13 모든 사회는 사회 성원의 반영이다
  11. 2019/04/10 강연 퍼포먼스 - 물신 세계에서 세월
  12. 2019/04/04 적정 지식
2019/04/29 09:33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치는 당연히 존재하는 ‘기본값’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근대성의 요체는 자본주의를 반대/견제하는 좌파 정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유럽이든 북유럽이든 좀 낫다는 사회들의 공통점이며, 그 사회들이 ‘좀 나은’ 비결이기도 하다. 한국의 정치적 근대화는 ‘민주화’로 대변되는데 민주화는 곧  ‘독재 타도’였다. 문제는 독재가 해소되고도 정치적 근대성은 독재 타도(‘수구 청산’으로 이름 바뀌어)로 축소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갈수록 정치적 근대성은 퇴행해왔다.(참고로, 민노당의 2004년 의석수는 10명이다.) 독재가 해소된 지 30년이 더 지났지만 한국의 진보 시민들의 가장 큰 정치적 관심은 변함없이 독재 타도이다. 정치는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일이다. 지금 한국에서 현재와 미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제는 뭘까. ‘자유주의 정치와 수구 정치의 연합으로서 자본 독재’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치는 ‘과거의 무한 복기’를 의미한다. 정치권과 정치인의 기만과 후진성을 탓하는 건 터무니없다. 이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시민 스스로의 선택이며, 정치권과 정치인은 그 선택을 충직하게 반영할 뿐이다. 노동이나 교육, 집 등 시민들이 제 삶에서 토로하는 거의 모든 사회적 고통이 자본 독재에 기인하는데도 시민들이 자본 독재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기이한 일이긴 하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한국은 “마술에 걸려 왜곡되고 뒤집힌 사회이며, 자본 선생(Monsieur le Capital)과 토지 여사(Madame la Terre)가 사회적인 인물이자 단순한 사물로서 괴상한 춤을 추고 있는 사회”인 셈이다. 그러나 ‘마술에 걸려 왜곡되고 뒤집힌 사회’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엄연히 ‘이성과 합리성이 작동하는 온전한 세계’이다.
2019/04/29 09:33 2019/04/29 09:33
2019/04/27 16:30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못 먹겠는 걸 보면 전보다는 제법 커피 맛을 알게 된듯하다. 카페에선 대개 라테를 사 먹는다. 연희, 동교, 합정 등에 자주 가는 몇 개의 카페가 있다. 작업실에서는 언제나 에스프레소다. 코만단테 그라인더(전동 그라인더와 맛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줄 안다기보다는 이 기계가 마음에 들어 쓴다)로 콩을 갈아 모카포트 브리카로 추출한다. 콩은 이코복스 가로수길점에서 사는데 떨어져 갈 무렵 강남 갈 일이 있을 때 들르거나 친구에게 부탁했다. 얼마 전 우주소년과 전광수커피가 세계문학 커피를 내놨다고 해서 이걸 한번 사 먹어봐야겠다 싶던 참에, 우주소년 박우현 선생이 보내주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커피. 마초 작가는 영 취향이 아니지만(난 스스로 병들어 세계의 병듦을 드러내는 작가가 좋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처럼) 커피는 꽤 마음에 든다. 짙고 깊으며, 시지 않다.
2019/04/27 16:30 2019/04/27 16:30
2019/04/26 10:51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공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수 정태춘・박은옥을 굳이 ‘예술가’라 부르는 건 그들 노래에 담긴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사유 때문일 겁니다. 사유는 개인의 내면적 성찰에서 출발하여 민족이나 계급과 같은 사회적 지평으로 확장되며 깊이를 더해갔습니다. 그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동행하길 멈칫거렸고, 그들은 노래를 멈추었습니다.

예술가는 가장 전위적인 존재입니다. 예술가는 ‘제한 없는 상상력’(정태춘의 표현으로 ‘무책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관객이나 청중과의 동행으로 구현됩니다. 바로 그래서, 때로는 ‘예술의 중단’이 예술가가 전위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40주년 공연’은 정태춘・박은옥과 우리가 오랜만에 주고받는 편지와 같습니다. 중년의 관객은 이 공연이 빛나는 젊은 시절을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일 겁니다. 또한 우리는  근래 제 나라를 스스럼없이 ‘헬조선’이라 말하는 젊은 시민들이 정태춘・박은옥의 노래에 깊은 인상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단지 ‘좋은 옛 노래’를 발견한 게 아닙니다. 노래의 전위성은 ‘현재성’으로 살아납니다.

특별한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정태춘은 제 안에서 이야기가 샘솟는 이입니다. ‘40주년 프로젝트’가 잘 치러진 후 노래 만들기를 멈춘 그로 돌아간다 해도, 인간과 사회 현실에 반응하는 이야기는 식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바로 우리를 통해 노래는 지속됩니다.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 위원장 김규항


(정태춘・박은옥 40주년 공연 팸플릿 인사말)
2019/04/26 10:51 2019/04/26 10:51
2019/04/22 08:37
임금이 높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가 자신이 ‘임금 노예’라 생각하긴 어렵다. 아예 노동자라는 생각도 안 할 가능성이 높다. 로마인들은 노예에 대한 가장 직관적 정의를 남겼다. ‘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  인간이 제 운명을 만들어가는 방법은 노동이며, 자유인인가 노예인가는 노동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있다. 고대 노예라고 모두 채찍을 맞아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린 건 아니다. 시를 낭송하고 연극을 하고 건축을 하는 예술가 노예도 있었고, 로마의 교사 노예에겐 자유인 학생에 대한 일정한 체벌까지 허용되었다. ‘고급 노예’는 교육 수준이 높았고 가난한 자유인보다 안락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타율적 노동을 수행하는 노예였다. 다만 여느 노예와 삶의 외형적 격차 때문에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오늘의 고급 노예들이 그렇듯 말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두가지 소망을 갖는다. 고급 노예가 되는 것, 친절한 주인을 만나는 것. 전자는 오늘 부모들의 소망이자 교육의 목표다. 후자는 어떤가? 오스카 와일드는 ‘친절한 노예주는 최악의 노예주’라 갈파한 바 있다. 노예로 하여금 노예임을 자각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 해방’은 많은 경우 ‘노예의 두가지 소망’으로 오해되곤 한다. ‘노동 해방’은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일이다. 물론 그 일은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로부터 시작된다.
2019/04/22 08:37 2019/04/22 08:37
2019/04/21 12:55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죽음 후에도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을 주려는 쇼가 아니다. 신앙심이 깊은 어떤 사람도 그런 희망을 걸진 않는다. 예수의 부활은 오히려 우리가 육체로만 살아있음에 대한 환기이며 질문이다. 예수는 육체의 죽음을 극복해보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적 존재’로서 삶을 잊고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사건인 부활은 그의 첫 사건인 ‘메타노이아(삶의 전면적 전환) 요청’과 연결된다. ’영적 존재로서 삶’이란 현실을 초월한 어떤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삶’을 의미한다. ‘자유’는 단지 법적 형식적 차원을 넘어 ‘자율적 삶’이며 그 뼈대는 당연히 ‘노동의 자율성’에 있다. ‘개인’은 고립된(외로운) 인간이 아닌 독립된(고독한) 인간이다.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는 ‘삶의 사상가’이자, 그 연합으로서 세계의 주인이다.
2019/04/21 12:55 2019/04/21 12:55
2019/04/20 21:42
영화 <더 세션>을 봤고 대사가 남았다.

“사랑을 하면 어떤 일이 생기죠?”
“서로에게 시를 쓰고 섹스를 하죠.”

그래, 우리는 사랑을 하면 서로에게 시를 쓰고 섹스를 한다. 더 이상 섹스하지 않게 될 때 우리는 사랑이 식었음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가 섹스보다 먼저 사라졌음은 알지 못한다.
2019/04/20 21:42 2019/04/20 21:42
2019/04/19 18:11
같은 맥락에서 또 하나의 착각은 ‘근대적 개인’(자유로운 개인)을 ‘자본주의적 개인’(자유주의적 개인)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런 착각은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어 온 사회에서 20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군사 파시즘과 전근대적 습속이 결합한 극단적 집단주의에 시달린 한국인이나, 러시아와 동유럽 등 공산주의를 참칭한 전체주의에 시달린 인민들이 대표적이다. 두 사회의 인민은 오랫동안 ‘자유’와 ‘민주’를 갈구했다. 그러나 예의 두가지 착각의 덫을 극복하진 못했다. 두 사회에서 자유화와 민주화는, 견제 없는 자본화로 귀결했고, 개인들은 집단주의의 억압에서 풀려난 대신 자유주의적 개인으로 흐트러져 각자도생의 바다를 부유한다.
2019/04/19 18:11 2019/04/19 18:11
2019/04/19 08:27
근대와 자본주의가 같다고 보는, 혹은 자본주의가 근대를 실어다 준다고 보는 착각이 만들어낸 대표적 참상이 현재의 한국과 중국이다. 자본주의는 이전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력을 비약시킴으로써 근대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근대를 ‘경제 환원’하는, 근대성을 잡아먹는 속성을 갖는다. 서구 사회의 근대적 면모는 자본주의가 저절로 실어다 준 게 아니라, 자본주의와 투쟁과 견제로 만들어졌다. 박정희로 본격화한 한국의 근대화 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으로 본격화한 중국의 근대화 운동은 이 사실에 대한 철저한 몰이해에 기반했다. 결국 두 사회는 소망대로 ‘경제 대국’이 되는 데 성공했지만,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경제 환원된 끔찍한 사회로 귀결했다. 예컨대 오늘 한국인들이 제 나라를 ‘지옥(헬조선)’이라 부르는 건 예전보다 가난해져서가 아니다.
2019/04/19 08:27 2019/04/19 08:27
2019/04/18 08:29
기억하기란 ’내 삶과 연결하기’다. 참사를 특별한 불행을 당한 사람들과 그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들로만 기억하는 일은, 참사를 내 삶에서 분리하려는 노력일 수 있다.
2019/04/18 08:29 2019/04/18 08:29
2019/04/13 11:16
근래 한국 시민들은 북유럽 사회들이 한국과 얼마나 다른지 많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사회 시민들이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왔기에 다른 사회를 만들 수 있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랜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 같은 수사는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오래 지속된 비결이 제 식구나 챙기며 군사독재에 순응하던 국민이 좀더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 성원으로서 책임감을 갖기보다는 책임을 묻고 떠넘길 대상 찾기에 몰두하는, 진영 논리에 따라 윤리적 판단마저 달리하는 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사회는 어떤 것일까? 사회에 관한 불변의 진리를 되새겨볼 때다. ‘모든 사회는 사회 성원의 반영이다.’
2019/04/13 11:16 2019/04/13 11:16
2019/04/10 11:08
세월호를 말하기란.. 언제나 어렵다.
어려움은, 또한 다음의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기억하고 애도하는 우리는 과연 무사한가?
우리의 바다는 세월호의 바다와 다른가?
우리는 이 바다에서 우리를 구출할 수 있을까?

‘환원 근대' 논의는 의미있는 지점들을 드러낸다. 근대화는 정치, 법, 과학, 예술, 윤리, 종교, 교육, 가족, 에로스 등 인간 삶의 전 영역의 변화인데. 한국의 근대화는 ‘경제 성장으로 환원’됨으로써 오히려 근대화를 억압했다. 헬조선은 그 귀결이며 세월호 참사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스 베버의 전통에 선 이 견해는 근대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담는다. 사태의 본질은 근대의 ‘경제 환원’인가, 근대의 ‘자본주의 환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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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준 X 김규항 강연 퍼포먼스
물신 세계에서 세월

4월 11일(목) 저녁 7시

별도 신청 없이 오시면 됩니다.
2019/04/10 11:08 2019/04/10 11:08
2019/04/04 17:11
‘적정 기술’은 구매력을 가진 상위 10퍼센트를 위한 기술이 아니라 90퍼센트의 삶에 소용되는 기술을 뜻한다.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인간을 노예화하는 기술이 아닌 인간의 자유로운 삶에 소용되는 기술이기도 하다. 슈마허나 일리치 같은 이들에 의해 사유되어 왔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적정 지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에 봉사하는 지식은 물론 소수 중산층 인텔리의 관념 놀이에 사용되는 지식이 아닌, 대다수 인민의 삶에 소용되는 지식이다. 적정 지식은 고급 지식과 대비되는 대중 지식, 어려운 지식에 대비되는 쉬운 지식이 아니다. 적정 지식은 인민을 제 삶의 주인으로, ‘삶의 사상가’로 만들어주는 지식이다. 적정 지식만이 혁명의 지식일 수 있다.
2019/04/04 17:11 2019/04/04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