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길 선생이 <자본>을 번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파시즘의 대중 심리>(빌헬름 라이히)와 <노동자 평의회>(안톤 판네쿡), <자본의 축적>(로자 룩셈부르크) 등을 번역했다. 모두 현대 사회를 읽는 데 필수적인 책들이다. 일주일 전 <자본> 1권이 나왔다.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아 서점에 깔리는데 한 주 이상 걸린다기에 출판사에 가서 구입했다. 며칠 훑어본 결과는 만족스럽다. ‘정확하고 읽기 쉬운’ 한국어판 <자본>이 나왔다는 건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번역자의 노고를 응원하며 <자본>이라는 책에 대해 몇자 적어본다.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특히 현실 사회주의 덕에 많은 사람에게 부정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낱 쇼핑몰과 다름 없는 타락한 교회에도 예수의 십자가는 걸려 있는 법이다. 모든 게 국유화되고, 노동과 생산이 중앙의 계획과 관료의 관리와 통제 아래 이루어지며, 개인의 자유가 없는 집단적 삶은 마르크스와는 전혀 무관하다.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고민은 오히려 ‘자유로운 개인’이었다. 그가 자본주의 극복에 일생을 바친 이유 역시 자본주의 하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은 피지배계급인 노동자든 지배계급인 자본가든 물신의 노예로 살아간다. 물신 현상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위의식이 아니라 ‘전면적 상품생산 사회’라는 경제 구조 자체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 시스템은 공산당 독재가 아니라 ‘협동조합’이다. 단 협동조합은 전인민의 재산으로,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그걸 위해서는 정치 권력의 획득이 필연적이라 봤다. 그렇지 않을 때 협동조합은 (오늘 우리 앞에 존재하는 수많은 협동조합들이 생생히 보여주듯) ‘중간 계급의 주식회사’에 머문다.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은 혁명론이나 다음 사회의 청사진을 담은 책이 아니다. <자본>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원리’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데 집중한다. 흔히 <자본>은 19세기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쓴 책이라 현재 자본주의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들 한다. 실은 정반대다. <자본>이 해명해낸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원리’ 가운데 상당 부분은 19세기 자본주의에 들어맞지 않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이전 사회의 잔재와 습속 같은 사회적 조건이 자본주의를 제약했기 때문이다. <자본>이 제대로 효용을 드러내는 건 오히려 현재다. <자본>의 통찰은 세계화, 금융화, 양극화, 경제위기는 물론 인공지능, 플랫폼 노동 같은 자본주의의 최근 주제들을 꿰뚫는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때 월가의 엘리트들에게서 <자본> 읽기가 성행하여 화제가 되었다. 하여튼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놈들이 모여있다는 풍문은 사실임이 분명하다. <자본>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물론, (마르크스 본인은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겠지만) 자본주의에서 성공을 위해 자본주의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도 결정적이다. 1950년대에 사르트르가 1990년대에 데리다가 거듭 말했듯 ‘마르크스는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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