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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12:42
부유하지 않고 권력이 없다는 사실이 불의한 시스템의 억울한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시스템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소수가 아니라 부유하지도 않고 권력도 없는 다수의 가담자 덕에 유지된다.
2019/01/23 16:40
자본주의를 흔히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고도 하는데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도 시장은 있었다. 유독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라 부르는 건 시장이 전면화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인간 노동력을 포함, 거의 모든 것들이 상품으로 교환된다. 그러나 여전히 전부는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도 인간은 (뚜렷하게 의식은 않더라도) ‘상품이 되어선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믿음 같은 게 있다. 믿음은 사회적 힘을 이루면서 어떤 것들의 상품화를 막아낸다. 예컨대 교육의 의미를 고민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정체와 역할을 토론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건 그 사회에서 그것들이 완전히 상품화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사회의 또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이미 상품이다. 그들은 교육을 ‘인적 자원’의 차원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문화산업’으로 이해한다. 한 사회가 살 만한가는 그런 상황의 정도, 상품이 되어선 안 되는 것들이 얼마나 상품화되어있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절대빈곤 상태가 아니어도 상품화 정도가 지나치게 높다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사회가 된다. 상품화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도 그렇다. 한국은 구제금융 사태 이후 20년간 상품화의 정도와 속도에서 유례없는 사회였다. 지옥일 수밖에.
2019/01/20 15:06
손혜원 씨 논란을 보며 착잡한 마음에 몇자 적는다.
문자와 관련한 문화행사에서 전직 국회의장 정세균 씨가 축사를 하는데 요지는 두가지였다. 우리나라는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어서 고유한 문화가 있다, BTS는 유구한 한국 문화사의 자랑이다. 엘리트 영역에서 ‘문화’와 ‘문화산업’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전무하다는 사실처럼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일도 없다. 전직 국회의장도 현직 문화부장관도 이른바 문화 예술계 인사들도 문화에 대해 말하는 걸 보면 모조리 문화산업에 대한 이야기다. 문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수십 채의 집을 사들였다는 손혜원 씨도, 그의 행동을 두고 투기 목적이다 아니다 순수한 의도다 아니다 논란을 벌이는 사람들도 물론 마찬가지다.
문화와 문화 산업의 차이는 단지 상품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문화는 인간의 내면과 영혼에 관계하는 것이다. 문화는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일깨운다. 문화산업은 20세기 중반 고도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산업주의적 생산물이다. 문화산업은 개인들의 개성과 자율성을 소거하고 동일성을 부여한다. 문화는 자본주의와 긴장과 적대를 이루며 인간의 내면과 영혼의 공간을 확보한다. 문화산업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구성물이자 무기다.
신자유주의 이후 문화와 문화산업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은 세계적인 데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전면적인 사회는 지구 어디에도 없다. 잘 사는 나라라 불리는 한국이 정작 ‘지옥’인 이유도 결국 그것이다. 문화를 삭제해버린 한국인들은 내면과 영혼의 질식 상태에 놓였다.
2019/01/15 11:28
‘개혁이냐 혁명이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로자 룩셈부르크 100주기. 잿빛 대기 속에 그가 던진 화두들을 떠올려 본다. 결코 혁명가와 사회주의자만의 화두는 아니다. 개혁이란 그 자체로 구현되지 않는다. 개혁은 혁명적 지향의 부산물이다. 혁명이 사라진 사회는 개혁도 불가능하다.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꿈꾼다면 자본주의적 야만을 벗어날 수 없다. 역사가 보여주듯 자본주의의 의미 있는 수정은 언제나 사회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계급 타협이다. 개혁을 바란다면 혁명을, 좀더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바란다면 사회주의를 생각해야 한다.
2019/01/14 15:53
배철현 씨 문제의 본질은 표절일까. 그는 인문학자라 불리는데, 인문학은 대체 무엇인가.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어 한없이 진행되는 사유의 총체다. 인문학은 인간을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살도록 돕는다.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이상적 사회상을 구현해가도록 돕는다. 인문학의 적은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파괴하는 것들 일체다. 인문학 최대의 적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비롯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가치들을 ‘상품의 가치’로 환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파괴하여 ‘가격만 다른’ 동일 상품으로 만든다. 자본주의의 그런 속성에 맞서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사수해내는 게 인문학과 예술이다. 근래 인문학의 현황은 어떠한가. 자본에 패퇴를 넘어 투항하거나 앞잡이가 되었다. 인문학은 자본가의 자기 혁신에 애용되는 기술이며, 자본의 이윤 추구에 동원되는 ‘인적 자원’의 필수 교과다. 인문학자들은 그 일에 앞장섬으로써 제 ‘가격’을 비약적으로 높인다. 배철현이 최진석 등과 꾸리는‘건명원’은 그런 일을 공식화한 학교다. (배철현은 ‘견명원은 제2의 이병철을 길러내는 학교’라고 말한 바 있다.) 배철현은 인문학자가 아니라 인문학의 적이다. 그의 표절이 밝혀졌든 안 밝혀졌든, 표절을 했든 안 했든 다르지 않다.
덧붙여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언론이다. 특히 ‘한겨레’나 ‘경향’처럼 적어도 자유시장주의를 표방하진 않는 언론이라면, 최소한의 개념 분별은 했어야 한다. ‘이병철을 길러내는 학교’를 말하는 자칭 인문학자가 ‘침묵과 고독’을 말할 때 감상에 빠져 받아적기만 하다가, 표절이 밝혀지니 ‘스타 인문학자의 몰락’을 전하는 정도의 안목이라면, 대중 앞에서 굳이 언론 행세를 지속할 이유가 있을까.
2019/01/13 22:05
1928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생을 상대로 ‘우리 손주 세대를 위한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특강을 한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었고, 배우고 똑똑한 젊은이는 다 빨갱이라는 말이 도는 시기였다. 케인즈는 ‘어리석은 열정’에 빠질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에게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힘주어 설파한다. ‘자본주의가 현재 상태로 부의 축적을 지속하고 생산력이 발전하면 대략 한 세기 후면 모든 사람이 주 15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가 예언한 시점에 이른 지금 그 절반은 이미 이루어졌다. 현재 자본주의 생산력은 대개의 사람이 적정한 삶을 유지하는 데 주 10시간 노동이면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주 15시간 노동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2016년 기준으로 OECD 35개국 평균 노동 시간은 주 34시간이고 한국은 주 41시간(물론 실제로는 더 많다)이다. 이상한 일이다. 케인스의 말마따나 생산력이 발전하면 당연히 그만큼 노동 시간도 줄어야 하지 않는가.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 추구를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윤의 근원은 잉여노동에 있다. 자본은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노동이 주 15시간인가 10시간인가엔 관심이 없다. 일자리는 줄여도 노동 시간은 줄이려 들지 않는다. 케인스는 순진했던 셈이다. 반공주의자인 그는 ‘유효 수요’는 생각했지만 맑스의 성과로 여겨지는 ‘가치론’에 대해선 무지했다.
18세기 개량된 증기 기관으로 산업혁명이 본격화할 때도 사람들은 같은 착각을 했다. 인간 신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생산력을 가진 기계가 인간의 노고를 덜게 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더 길고 가혹한 강요받았다.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면 시간은 3시간, 평균 수명은 30세였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기계나 기술 발전이 아니라 기계와 기술 발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다.
"기계 그 자체는 노동시간을 단측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시간을 연장시키며,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강도롤 높이며,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에로 만들며,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자본론 1권)
20세기 중반 미래 사회를 그린 만화들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인간은 편안하게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을 그리곤 했다.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는 미래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남는 시간’일 거라 단언했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거짓말 중 하나는 과학 기술 발전이 ‘인간의 더 편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 기술 발전은 과학자나 기술자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의 이윤 추구를 위해 이루어진다.
오늘 인공 지능이나 로봇 같은 기술 혁신은 ‘4차산업혁명’ 따위 수사와 함께 ‘보편적 문명 변화’로만 여겨진다. 인공 지능이나 로봇이 노동 시간을 줄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만 줄게 하고 불안정한 삶을 강요하는, 앞뒤 안 맞는 상황에 대한 질문은 찾아볼 수 없다. ‘인공 지능 시대의 인간’ ‘인공 지능 시대의 노동’ 식의 논의가 있을 뿐, ‘인공 지능 시대’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자본의 논리와 긴장을 이루어야 할 인문학이 ‘CEO의 기술’ 노릇을 하는 마당이니 오히려 당연한 일일까.
그런 지적 파탄의 상황에서 그 상황과 온전히 마주서는 예술적 시도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권병준 개인전 <클럽 골든 플라워>은 진지한 예술가의 직관이 세계를 둘러싼 기만과 허위의 체제와 지적 게으름을 한순간에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두운 전시장은 인간의 여러 행위를 모방하는 12개의 로봇으로 채워져 있다. 로봇들은 제 빛으로 서로를 비춰가며 온종일 각자의 행위를 수행한다. 어느 순간 음악이 시작되고 로봇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군무를 시작할 무렵, 당신은 삶에 예술이 개입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19/01/03 17:20
신년 티브이 토론에서 유시민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가 많기에 조금 훑어봤다. 토론은 오늘 한국 사회가 갇힌 프레임의 전형을 보여준다. 얼마 전 적었듯, 한국 사회는 보수/진보 기득권 연합(10%)과 다수 인민(90%)으로 나뉘어 있다. 전통적으로 기득권은 보수 엘리트(극우 독재 계열)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진보 엘리트(민주화 운동 계열)가 주류 사회에 진출하면서 기득권을 분점 하기 시작했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는 보수 엘리트와 대등한 수준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관료들 평균 재산은 동일하다.) 한국 사회가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의미 있는 사회 비판과 사회 변화의 에너지가 보수 엘리트와 진보 엘리트의 기득권 싸움에 소모되기 때문이다. 진보 엘리트가 갖는 결정적 약점이 있다. 기득권 연합의 일원이면서 다수 인민을 대변하는 것처럼 구는 기만적 상태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인민의 상당수가 그에 항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근래 그럴 만한 상황들이 끊임없이 펼쳐졌음에도 기만적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해왔다. 그에 가장 기여한 게 ‘미디어 전략’이다. 나꼼수를 필두로 한 정치 팟캐스트, 오연호 등의 프레임 짜기(진보 집권 플랜), 그리고 손석희와 유시민으로 대변되는 티브이 토론 쇼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의 목적은 하나다.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있다는 프레임을 공고히 하며, 진보 엘리트의 승리가 다수 인민의 삶에 기여한다는 관념을 주입하는 것이다. 이번 토론에서 유시민은 초입부터 현재의 경제 위기론이 ‘보수 기득권 세력의 이권 동맹’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목적에 신속히 접근한다. 토론이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출연한 양 패널이 한 편이 되고 다수 인민을 대변하는 패널이 다른 한편이 되어서, 유시민에게 '보수 기득권이 아니라, 보수/진보 기득권 연합이다' 공격하는 장면을. 물론 현재의 프레임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며, 그거야말로 ‘신뢰받는 언론인’ 손석희의 진정한 소임이다.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 한 현실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손석희나 김어준이나 유시민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건 별 소용없는 일이다. 아무렴 그들이 ‘우리는 기득권 연합의 유지를 목표로 합니다!’라고 말하겠는가. 그들은 알면서 기만하고 있다기보다는, 제 ‘단순하고 소박한’ 세계관에 진심으로 빠져 있다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처지의 인민이 먼저 프레임을 빠져나가긴 어렵다. 그나마 책이라도 읽고 토론도 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이 되는 인텔리들이 ‘기여’ 해야 한다. 보수 정권 10여 년 동안 그들은 이명박 박근혜 욕만 하면 충분했고, 그 덕에 지적으로 현격히 퇴행했고 한없이 나태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이 악랄한 프레임을 직시하거나 비판하긴커녕 ‘역시 유시민!’ 따위 즉자적 감탄사나 늘어놓는다. 고작 그런 소리나 하려고 그리 많이 배웠고, 여전히 책을 읽고 인문학적 사유를 말하는가. 그들이 스스로에게 절망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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