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결정적 오해는 사회주의가 ‘경제적 교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반공주의적 관점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도 널리 공유되어 온 오해다. 오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극적이고 애석한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 이걸 아예 부인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그 속성을 상당 부분 수정 보완할 수 있는 면모도 가진다. 경제적 평등이 목적이라면 굳이 사회주의를 생각하지 갖지 않고도 모색할 여지들이 있다. 경제적 평등이 목적이면서 그런 모색을 개량주의라 폄하할 필요도 없다.
물론 경제적 평등은 사회주의의 필수적 요소이며, 그걸 이루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오히려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는 데 있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 현상은 인간의 삶을 경제적 차원에 결박함으로써, 인간 영혼을 갉아낸다. 사랑, 존경, 교육, 철학, 예술, 종교 등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하는 모든 것들이 껍질로 남는다. 자본주의 하에서 인간은 그로 인한 필연적 허무와 우울을 덮기 위해, 경쟁에 몰두하거나(우파적 노력) 나보다 더 껍질만 남은 인간을 찾아낸다(좌파적 노력).
문제는 물신숭배 현상이 단지 지배계급이 심어준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이거나 상부구조 고유의 심리적 윤리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신숭배는 상품에 ‘달라붙어’ 나오며, 모든 게 상품의 형태로 교환되는 사회 구조에선 누구도 회피할 수 없다.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물론, 노동자라고 해서 본원적 면역력(루카치가 말한 ‘노동자 계급의 귀속 의식’ 같은)을 갖지 않는다. 굳이 사회주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교의가 아니라 ‘영적 회복’에 관한 일이다. 사회주의의 목적은 경제적 차원에 결박된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걸맞은 위엄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에 대한 가장 첫번째 질문은 ‘사회주의는 가능한가?’가 아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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