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논평
-극우세력의 붕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극우 비판으로 기생하는 유사 자유주의 세력 역시 기반을 잃게 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상성 진전으로 좌파도 남 핑계대기 어렵게 되었다.
-고래 보는 아이들의 병역 문제에 변화가 생길 것같다.
'2018/04'에 해당되는 글 11건
2018/04/28 08:55
어릴 적 어른들은 ‘그림 좋다’라는 말을 즐겨 쓰곤 했다. 눈앞의 현실을 그림으로 비유하는, 비현실적일 만큼 보기 좋은 상황을 두고 하는 감탄의 말이었다. 감탄이 클수록 ‘좋’이 길어졌다. 살면서 어제처럼 그 말에 부합하는 장면도 드물었던 것 같다. 상황 자체도 강렬했지만 모든 시각적인 부분들이 매우 치밀했다. 그저께 저녁 세미나를 마칠 즈음 웃으며 ‘내일은 사상 초유의 정치극장이 열리는군요’ 했는데, 나 역시 여러 번 뭉클했다. 물론 극장에 가려진 여러 기만적 현실들이 있고, 마치 봉건 왕끼리 만남 같은 연출도 거슬릴 만했다. 그러나 ‘좋은 그림’을 한껏 즐기는 것 또한 우리의 권리다. 우리가 단지 정치극장의 관객이 아니라 정치의 주인이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약간의 논평 -극우세력의 붕괴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극우 비판으로 기생하는 유사 자유주의 세력 역시 기반을 잃게 되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상성 진전으로 좌파도 남 핑계대기 어렵게 되었다. -고래 보는 아이들의 병역 문제에 변화가 생길 것같다. 2018/04/26 09:05
내가 도쿄라는 도시에 매혹되는 이유는 일본에 있는 유럽 도시이기 때문이다. 타이페이가 마음에 드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중국에 있는 일본 도시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일본 도시 중국에 있는 중국 도시도 충분히 아름답거나 근사할 수 있지만 나를 유혹하진 못한다. 사연이(혹은 역사가) 제 껍질을 뚫고 올라오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그렇다. 여자다운 여자 남자다운 남자 아이다운 아이 노인다운 노인 목사다운 목사 중같은 중 화가같은 화가 시인같은 시인 학자같은 학자 정치인같은 정치인 혁명가 같은 혁명가 성자같은 성자..
2018/04/25 15:59
내일 <혁명노트> 세미나 세번째 시간. 주제는 ‘반공’이다. 반공주의의 뼈대는 형식이 아니라 효과에 있다. 여하한 형식으로든 자본주의에 대한 의구심, 반자본주의/사회주의적 경향을 차단하고 무력화하면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공주의, 폭력과 고문과 살해와 체포와 감금의 반공주의는 사회 성원의 의식이 전근대적 상태에 머물 때 나타나는 반공주의의 한 형식이다. 그런 반공주의가 더는 통하지 않게 된 사회에서 반공주의는 짐짓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반공주의’가 된다. 반세기 전 서북청년단은 오늘 극우 단체의 패악질이 아니라 리버럴 정치극장의 관객들로 재현된다. ‘위험한’ 생각은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좀더 쉽게 소거된다. 급진적 이론, 사회적 예술 등은 금지와 탄압이 아니라 각종 기금과 지원체계를 통한 시스템 내의 생태계로 흡수된다. 우리는 과연 그런 허위와 기만에 속고 있는 걸까? 물신숭배로 구축된 새로운 세계를 이성과 합리성을 작동하며 살고 있는 걸까?
2018/04/25 12:27
김어준을 비판하는 진중권 인터뷰가 많이 읽히는 걸 보니 김어준의 음모론에 대한 거부감이 꽤 확산된 모양이다. 그의 단순한 사회 인식과 망상적 상상력이 유효한 지점도 있지만, 수구세력에 대한 거부감과 결합하면서 지나치게 미화/과포장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음모론과 함께 여론 지형을 망가트린 건 이른바 댓글 문화다. 기원은 2천년초, 인간의 소통 예의가 인터넷 세계에서 전면 재구성되는 희한한 상황이고 진중권은 그와 깊은 관련이 있다. 댓글문화의 원조가 음모론의 원조를 비판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든 일의 책임을 묻긴 어렵다. 그들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물질세계에서 생존’을 추구해왔을 뿐이다. 사람들이 좋아라 하고 제 명성과 수입도 오르고 그 대상이 나쁜놈 추한놈이 맞는데, 사회에 미치는 장기적 해악을 고려하여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걸 비판할 만큼 지적이거나 성찰적인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근본적인 책임은 자칭 진보시민들에게 있다. 그들은 지난 20여년 동안 사회 비판을 사회에 대한 냉정하고 깊은 사유로 진전시키길 회피하고, 카타르시스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김어준과 진중권의 나쁜놈 추한놈 까기에 대한 카타르시스든, 지금 김어준을 까는 진중권에 대한 카타르시스든 그들은 늘 정치의 주인이 아니라 정치극장의 관객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가 그리 우스운가, 정말 김어준 진중권이 하듯 눈앞에 보이는 나쁜놈 추한놈만 욕하고 솎아내면 해결되는 단순한 시스템이라 믿는가, 질문한다면 그들 중 단 한사람도 그렇다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다. 완전한 자멸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면 정치극장을 빠져나갈 때도 되었다. 20년이다. 2018/04/18 18:06
내일은 <혁명노트, 메타노이아> 세미나 두번째 시간이다. '자본주의교의 3위 일체'라는 제목으로, 자본주의 물신숭배에 대해 논의한다. 계급 사회는 저마다 시스템에 순종을 위한 절대 의식을 구비한다. 물신숭배는 스스로 인간임을 부인하는 노예의 의식, 모든 게 신의 뜻이라는 농노의 의식의 자유 시민 버전이다. 발터 벤야민의 '종교로서 자본주의' 노트를 텍스트로 상품 소비 사회의 종교성과 우리 삶 속 사례들을 훑어본 다음, 맑스의 논의를 살펴볼 계획이다. 물신숭배는 단지 허위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구조와 한몸이며 중력의 법칙처럼 작동한다. 맑스의 물신숭배론은 그놈의 '경제 결정론' 오해와 함께 오랫동안 그 중요성이 무시되어 왔다. 초기와 후기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는 견해도 있다. 논쟁과 토론은 계속되어야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그의 물신숭배론에 어느 때보다 부합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의: gallery.loop.seoul@gmail.com 2018/04/18 15:34
김기식의 사퇴로 금융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논평들이 있다.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은 이번 사태의 책임은 시민이 아니라 청와대에, 특히 최소한의 판단력을 상실한 민정수석 조국에게 있다. 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차라리 좀더 교활하기라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김기식이니 조국이니 운동권 출신 386의 정치 놀음이 아니라 금융개혁 자체일 것이다. 김기식은 장하성 김상조와 함께 참여연대의 경제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기대는 3인 조합의 ‘제도화’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빠져 있다. 그들이 벌여온 경제민주화 운동의 실제 성과에 대한 평가, 그리고 그에 앞서 경제민주화가 무엇인가라는 사회적 토론이다. 알다시피 그들의 경제 민주화론은 ‘재벌개혁’으로 대변되며, 해결책은 이른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의 작동이다. 주식 시장이 국적 없는 투기 시장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실에서 황당한 견해이긴 하지만, 경제민주화론의 이론과 노선에서 가장 우파 버전이라고는 할 수 있다. 재벌 등 주요한 생산수단의 사회화, 노동자 공동 결정 등을 뼈대로 하는 경제민주화론의 좌파 버전까지 가지 않더라도 경제민주화론이라기보다는 ‘경제 자유화론(혹은 시장화론)’이라는 이름이 좀더 어울린다. 여하튼 그 모든 평가와 토론은 감쪽같이 생략되어 있다. 김기식의 사퇴를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과 소동은 바로 그 평가와 토론을 은폐하는 ‘정치 극장’이다. 극장에 중요한 게 관객의 영화에 대한 호오가 아니라 흥행이듯, 이번 정치극장에서 중요한 것도 사퇴 찬성(은 물론 당연하나)인가 반대인가가 아니라 사퇴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논란과 소동 자체다. 한국 정치는 갈수록 정치 극장화하고 있다. 2018/04/16 14:57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은 단지 추억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부러 차갑게 식힌 분노, 뜨거움을 내 이성과 사유에 새긴 차가운 분노만이 독하게 지속된다. 세월호 침몰, 보름 후에 썼던 글. 2018/04/15 19:47
김기식의 말도 안 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을 반개혁 기득권세력의 의도에 봉사하는 거라 단정하고 개탄하는 글이 타임라인에 눈에 띈다. 전체 공개로만 글을 쓰고 있어서 음모론이나 기계적 진영 논리에 매몰된 경우는 페친을 해지하는 편인데도 그런 글이 종종 보이는 걸 보면 상황이 가볍지 않다. 음모론이나 기계적 진영 논리는 결코 비합리적 사고에 기인하는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니다. 그걸 통해 제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을 축적하는, 정치 브로커들의 계획적이고 치밀한 비지니스 모델이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 주권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정치 브로커의 고객 노릇을 할 이유가 있는가.
2018/04/10 08:47
몇해 전 친구가 생협에 노조도 없고 비정규 노동이 만연한 걸 알고는 놀라서 모 생협 경영진에게 물었더니 ‘생협은 특정 개인에게 사유화되어 있지 않으니 일반 기업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하더란다. 우리가 종종 하는 오해는 기업의 형태나 소유 방식이 기업의 정체성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업이 이윤 혹은 성장을 목표로 하는 한, 협동조합이든 사회적 기업이든 자본가가 한명이든 천명이든 근본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자본가는 ‘인격화한 자본’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인격이 자본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자본의 고유한 운동방식이 자본가의 인격을 지배한다. 그런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존엄한 인간이 아닌 ‘인격화한 노동 시간’일 뿐이다. 구례자연드림파크 노조 탄압 사태는 아이쿱이 성장 위주 경영을 선도하면서 한살림을 추월하고 ‘경쟁 상대는 이마트’라 공언할 때 이미 예견된 일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대개의 조합원들이 침묵한다는 건 그들이 협동조합 조합원이 아니라 회원제 소비자일 뿐임을 드러낸다. 물론 이건 아이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본주의적 기업을 넘어선 기업을 표방한 생협은 자본주의적 기업의 괴상한 형태로 귀결하고 있다.
2018/04/07 18:37
세습 문제나 각종 비리로 점철된 타락한 교회 비판에 몰두하다보면, 그렇지 않은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로 여겨지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교회 문제의 본질은 오히려 그 정상성에 있다. 예수가 전한 하느님나라 운동의 치명적 적은 이미 상식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떠난 교회들이 아니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호감을 유지하며 성실하게 자본주의(마몬주의) 이념을 설파하는 정상적 교회들이다. 재벌 문제도 마찬가지다. 재벌의 편법과 불법에 대한 비판은 많은 경우 편법과 불법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곤 한다. 재벌 문제의 본질은 대다수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국민 경제가 극소수의 사적 이윤 추구에 동원되는 합법적 독점 구조 자체다. 그마저도 모자라서 편법 불법까지 자행하는 행태에 분노하는 건 당연하지만, 분노가 본질을 덮는 건 결국 그 구조를 돕는 일이 된다.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재벌 비판이 대부분 특정 개인의 윤리적 사안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 있다. 목사나 재벌 총수의 인격과 윤리가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윤리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2018/04/06 22:41
12일부터 '혁명노트, 메타노이아' 세미나를 진행한다. 내가 강연하는 방식임에도 강연회가 아니라 세미나라 이름 붙인 건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모두에게 사유의 계기가 되는 시간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유란 낭만적 이상주의나 지적 힙스터의 희소 취향과는 거리가 먼, 내 삶의 실체에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행동의 의미다. 4회에 걸쳐 노예, 물신, 반공, 이행을 키워드로 진행하며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내용으로 한다. - 자유로운 시민이자 민주주의의 주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왜 제 삶에 대한 회의와 우울은 떨쳐내기 어려운가? - 지식인과 예술가의 비판 정신과 독립성이 파시즘적 금지나 탄압 상황에서보다 상당 수준의 표현의 자유와 각종 학술적/예술적 지원 제도 속에서 더 위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나쁜 정치/좋은 정치를 말하는 걸로는 부족한가? - 자본주의가 자유와 평등의 외피를 쓴 현대적 노예제라는 견해가 사실이라면, 왜 그런 체제가 사회 성원의 동의와 지속력을 갖는가? - 현실 사회주의의 패망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라는 이상은 관념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게 증명된 게 아닌가? - 개인을 삭제한 집단으로서 유토피아가 아닌, 개인성의 추구가 공동체의 미덕이 되는 사회는 가능한가? 참여 신청: gallery.loop.seoul@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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