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에 해당되는 글 19건

  1. 2018/03/31 보편적 인간해방
  2. 2018/03/31 노동가치론
  3. 2018/03/29 존경의 방식
  4. 2018/03/28 혁명 세미나
  5. 2018/03/25 윤리
  6. 2018/03/24 사적 소유, 개인적 소유
  7. 2018/03/23 우리 안의 이명박
  8. 2018/03/22 물정
  9. 2018/03/21 이상한 인간
  10. 2018/03/21 소복이스럽다
  11. 2018/03/21 무지
  12. 2018/03/20 그들도 우리처럼
  13. 2018/03/19 단세포 동물
  14. 2018/03/16 해방
  15. 2018/03/11 행사
  16. 2018/03/10 혁명과 연대
  17. 2018/03/10 평화
  18. 2018/03/08 노예
  19. 2018/03/05 성인의 요건
2018/03/31 11:52
보편적 인간해방으로서 혁명, 이라고 할 때 ‘보편적 인간해방’은 무엇인가? 피억압자의 해방이 피억압자가 억압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피억압자 자신은 물론 억압자까지 해방시키는 일이 된다는 의미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에서 인간은 억압받는 쪽이든 억압하는 쪽이든 억압 상태에 있다.
2018/03/31 11:52 2018/03/31 11:52
2018/03/31 08:09
이 막되어먹은 인간들이야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테지만, 이야기 중에서 노동가치론이 맑스가 만든 이론이라는 오해는 꽤 일반적인 편이다. 심지어 그렇게 적은 자본론 해설서도 있다. 노동가치론은 맑스가 극복 대상으로 삼은 부르주아 경제학, 즉 아담 스미스에서 출발한 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이다. 당시 자본주의가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상태라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만든다는 노동가치론은 누가 봐도 선뜻 수긍할 만했다. 사상적 원조는 존 로크다. 로크는 자연은 누구의 재산도 아니지만 인간의 노동을 결합할 때 그의 재산이 된다는 논리로 사유재산권을 설파한다. 로크의 주장은 아메리카 약탈에서 ‘자연에 노동을 결합해서 교환가치를 만들어낼 때’로 변형된다. 원주민도 자연에 노동을 결합하니. 맑스는 노동가치론을 파고들어 노동이 이윤의 원천이라는 잉여가치론을 정립함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외관을 한 자본주의가 실은 계급 체제임을 밝혀낸다. 맑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은 노동가치론을 버리고 한계효용 이론을 취한다. 노동가치론이 맑스의 이론이라는 오해는 이른바 신고전파와 함께 생겨난 셈이다. 생각이란 늘 그렇게 얼키고설키며, 또 나아간다.

2018/03/31 08:09 2018/03/31 08:09
2018/03/29 12:36
4.3 전시의 연계 행사로 ‘혁명 세미나’ 를 하는 걸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나 역시 처음 제안받았을 때 그랬다. 양지윤 디렉터에게서 "4·3 참여자들을 단순히 순진한 양민으로만 보는 건 의도와 무관하게 그들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듣고 이내 수긍했다. 4·3을 섣불리 혁명이라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늘 현실에서 보편적 인간해방으로서 혁명을 말하는 일은 4·3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한 방식일 수 있다고 믿는다.

2018/03/29 12:36 2018/03/29 12:36
2018/03/28 02:58
4월 12일부터 대안공간 루프에서 ‘혁명 노트, 메타노이아’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합니다. 4회에 걸쳐 진행되며 우선 주최측의 안내문을 붙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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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노트, 메타노이아’ 세미나 안내

강연자: 김규항
장소: 대안공간 루프
시간: 19:00 - 21:00
참가비: 무료
참여신청: gallery.loop.seoul@gmail.com

우리는 실은 혁명적 변화가 아니면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혁명은 가능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끝없는 우울은 그런 모순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혁명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총체적 면모를 경제적 차원으로 우겨넣는 경박한 유토피아주의, 급진적 사상과 이론들을 만들어지는 족족 말과 글의 감옥에 가두는 지적 힙스터 놀이는 혁명과 무관하다. 혁명은 무엇보다 삶의 비참과 대면하는 일이다. 로봇이 인간 노동을 대신하는 생산력 수준에서도 노예적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비참은 물론, 제 지성과 신념을 알량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대체하는 비참, 제 욕망을 체제의 메뉴대로 조정한 대가로 안락을 누리는 비참... 비참은 어디에서 기인하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해방적 전환은 가능한가?

4월 12일 자유로운 노예들
4월 19일 자본주의교의 삼위일체
4월 26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반공주의
5월 3일 메타노이아, 삶의 지속

2018/03/28 02:58 2018/03/28 02:58
2018/03/25 14:10
블랙리스트 1호라는 이윤택부터 베니스영화제에서 수상 후 ‘문재인의 국민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긴 김기덕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 진영의 인사들이 줄줄이 성폭력 가해자로 밝혀지다보니 ‘보수나 진보나 똑같은 놈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똑같다는 내용은 아마도 윤리일 것이다. 그런데 윤리는 무엇일까? 한 인간의 윤리는 대체로 두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그의 고유한 윤리의식이다. 누가 보든말든 뭐라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가 가지고 지키려는 의식이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윤리에서 생각보다 아주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잘 알듯이, 충분히 더러운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윤리의 더 크고 지배적인 부분은 사회적 관계다. 다른 사람의 이목과 평판, 인정 욕구와 배제의 두려움 따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의 윤리는 최종적으로 조정되고 지속된다. 바로 그 윤리의 지배적 부분을 약화시키는 치명적 요인이 있다. 권력이다. 정치나 경제 같은 전통적인 권력만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권력, 상징 권력은 전통적 권력과 경쟁하며 서로 가치를 교환한다. 권력과 윤리적 여백은 비례한다. 자유주의 인사들에게 만연한 성폭력 행각은 민주화 이후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보여준다. 결국 ‘보수나 진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했을 때 그 내용의 실체는 ‘권력’인 것이다. 우리는 독재와 민주, 보수와 진보(극우와 자유주의), 불의와 정의 따위 나꼼수식/유시민식 사회 구분들이 우리 실제 삶과 관련한 의미보다는 지배 계급 내에서 저희들끼리 분파 싸움의 의미가 결정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미투운동을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18/03/25 14:10 2018/03/25 14:10
2018/03/24 12:33
서양 중세에 이르기까지 사적 소유 개념은 없었다. 토지는 신의 것, 즉 어떤 인간의 것도 아니었다. 왕과 귀족은 영토가 있었지만 소유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농노는 안식일을 뺀 6일 가운데 절반은 영주의 땅에서 절반은 제 땅에서 노동했다. 영주의 땅, 제 땅은 실제 경계선이 아니라 비율로서만 존재했다. 사적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소유였다는 말이다. 어림잡아 전체 토지의 3분의 1 가량은 공유지로 존재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짐승을 방목하고 퇴비도 만들었다.

15세기 들어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목장을 만드는 지주가 출현한다. 토마스 모어가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한 인클로저 운동이다. 살 길을 잃은 사람들은 유랑민이 되고 16~18세기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절대왕정의 폭력적 정책에 따라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해간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적 소유 개념은 자본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약탈과 폭력, 착취와 함께 창조된 것이다. 사적 소유 개념은 로크 등에 의해 자유주의 이념과 쌍을 이루며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다.

생시몽 오언 푸리에 같은 이상주의적 맥락이든 맑스의 과학적 맥락이든 사회주의 운동이 사적 소유의 철폐를 핵심 내용으로 한 건 당연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시작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맑스의 견해를 따라’ 사적 소유를 철폐하고 모든 걸 국유화한다. 그러나 맑스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맑스가 생각한 사회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함께 ‘사적 소유’(약탈과 착취에 기반한)는 없애되, 각자의 노동과 노력에 따른 ‘개인적 소유’는 인정하는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결국 전제적 지배계급의 사적 소유 체제로 귀결하고 당연히 인민에 의해 붕괴된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역설적이게도 소유에 관한 자본주의적 관점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게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현정부의 토지 공개념 운운은 좋은 이야기지만 예의 입에 발린 말(그들은 미국 리버럴의 ‘정치적 올바름’을 답습하고 있고, 성공적인 여론을 얻고 있으며 그에 고무되어 있다)에 그칠 운명을 갖는다. 단지 그들 자신이 지대소득자들이라거나 위선자들이라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자유주의와 사적 소유, 특히 토지의 사적 소유는 애초부터 한몸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토지만 사적 소유의 틀예서 예외로 두는 일 같은 건 가능하지 않다.

새로운 사회의 구상은 소유의 자유주의적 관점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즉 토지를 비롯하여 어떤 인간도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분명히 하고, 사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를 구분하고 교정해가는 혁명적 전환이다.
2018/03/24 12:33 2018/03/24 12:33
2018/03/23 11:43
이명박 구속을 기념하며,
오랜 만에 꺼내 읽어본다.




2018/03/23 11:43 2018/03/23 11:43
2018/03/22 14:58
한국엔 여전히 이런 무식하고 촌스러운 부자가 인생에 대해 떠벌인다. 이 사람의 말마따나 살인적 경쟁이 판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절실함 없이 성공할 순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이란 반드시 다수의 실패를 필요로 전제로 한다는 것, 많은 성공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21세기의 부자들은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경제적 성공에 두는 걸 자랑하지 않는다. 현재 인류의 생산력은 주 20시간 미만 노동으로도 모두 여유롭게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다. 문명화한 인간은 그 사실로부터 사고를 하고 사회가 어떻게 새로 디자인되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근래 세계적인 부자들은 그 정도는 알고 있고 부의 증식을 지속하면서도 무식하고 촌스러운 부자로 보이진 않게 하기 위해 온갖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를 구사한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않다느니, 우리 같은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느니, 기후 문제에 연대해야 한다느니 등등 말이다. 누군가 이 사람에게 그런 물정이라도 알려주길.
2018/03/22 14:58 2018/03/22 14:58
2018/03/21 23:35
이상한 인간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영역과 많은 영역이 있을 순 있지만 결국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이상한 인간은 반드시 있다. 물론 페미니스트 중에도 이상한 인간은 있고 노동운동가 중에도 이상한 인간이 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참으로 재수 없게도 그런 인간(들)을 만나거나 심지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런 상황에 직접 맞닥드리면 충격과 회의에 빠지고 개인적 경험과 그 운동 전체를 분리시키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국 잘 분리시켜 여전히 그 운동 전체와 대의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분리시키지 못하고 그 운동 전체와 대의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 내내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그가 할 일은 복수가 아니라 어렵더라도 성인이 되는 것이다.
2018/03/21 23:35 2018/03/21 23:35
2018/03/21 12:54
시안 내보고 협의하고 하는 과정 없이 그냥 알아서 해달라 맡기는 작가들이 있다.(그렇게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와 함께 그렇게 하는 게 낫다는 의미다.) 그 중 한 사람인 소복이 작가의 새 연재 ‘엄마 말고, 이모가 해주는 이야기’ 첫 화가 나왔다. 소복이스럽다. 요즘 부모들은 옛 부모들처럼 아이에게 특정 직업을 권위주의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재능의 발견, 주체의 자기계발이라는 방식으로 압박한다. 요컨대 오늘 한국 부모들은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사회 변화의 정직한 담지자다. 소복이는 특유의 둥글고 무심한 캐릭터들에 그 예민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2018/03/21 12:54 2018/03/21 12:54
2018/03/21 08:19
나쁜 일들은 대개 무지에 기인하거나 관련이 있다. 무지의 사전적 의미는 '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이다. 그러나 근대적 교육이 일반화한 지 오래인 사회에서 그런 식의 무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무지의 현재적 의미는 '잘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무지로 넘쳐난다. 이전과 양상이 다른 건 배운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더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2018/03/21 08:19 2018/03/21 08:19
2018/03/20 11:17
친구가 <그들도 우리처럼>(1990) 이야기를 했다. 그 영화의 한 장면은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싸해진다. 밤 해변에 선 심혜진은 문성근에게 말한다. ‘내가 보이나요?’ 그 대사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많은 상처, 많은 슬픔, 많은 존중, 많은 배려, 많아서 적어져버린 희망... 아마도 당분간 그런 장면과 대사는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마음에 많은 것들을 담을 줄 모르게 된 지 꽤 오래이므로.
2018/03/20 11:17 2018/03/20 11:17
2018/03/19 15:34
‘친일독재 세력 척결’ 앞에선 어떤 사회 문제나 모순도 후순위라는 확신에 가득 찬 한국형 리버럴들(진보라 불리는)이 개인숭배, 집단주의, 언론 탄압 등 이른바 전체주의적 사회주의가 보여준 악덕들을 빠짐없이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깨달음을 준다. 정의를 독점하고 개인주의의 미덕을 팽개친 인간은 좌우와 상관없이 끔찍한 단세포 동물이 된다.
2018/03/19 15:34 2018/03/19 15:34
2018/03/16 08:58
굳이 혁명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혹은 우리가) 노예 상태에 있고,
노예에게 필요한 건 좋은 주인이 아니라 해방이기 때문이다.
2018/03/16 08:58 2018/03/16 08:58
2018/03/11 13:05
출판기념회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얼굴이라도 비쳐야 할 행사가 지나치게 많다는 건,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진작부터 인생이 겉돌고 있음을 의미한다.
2018/03/11 13:05 2018/03/11 13:05
2018/03/10 09:44
촛불은 거대한 저항운동이었고 일부 급진적인 스펙트럼도 존재했지만, 체제의 최고 법기구인 헌법재판소에서 결론지어졌고 ‘기업의 영업 활동 방해’를 주요한 내용으로 했다. 그리고 기존 정치 체제 안에서 정권 교체로 마무리되었다. 반면에 미투 운동은 기존의 보수/진보, 불의/정의, 독재/민주 등의 구도로 이루어진 체제 자체를 무너트리고 변화시키고 있다. 미투운동은 혁명이다. 그런데 혁명은 기존의 법질서 체계 내에서만 진행되는 게 아닌지라 일정하게 무리한 상황이나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다. 그에 대해 우려하거나 고민하는 이들이 있고, 그 자체론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혁명적 상황에서 최선의 사유와 판단은 평상시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실의 텍스트는 물론 컨텍스트, 현실의 맥락과 배경을 더 애써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본의와 달리 혁명을 훼방하게 된다. 관련하여 우리는’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참고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독재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느낌과 함께 매우 왜곡되어 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산당 엘리트의 전제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본디 의미는 혁명적 상황에서 당연히 나타나는 기존 지배 기득권 세력의 저항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내전 속에서, 혁명의 본디 의미와 목적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가는 잠정적 민주주의 체제다. 그 주체는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던 프롤레타리아다. 미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여성들이다. 미투운동은 전국적인 평의회나 의결 기구 같은 걸 공식적으로 만들진 않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내용을 상당 부분 실제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혁명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연대해야 마땅하다. 일정하게 수반하는 무리한 상황이나 부작용에 눈감지 않는 일 역시 지지와 연대의 일환이다. 다만 그 선후를 구분하고 주요한 것과 그에 수반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즉 무리한 상황이나 부작용에 눈감지 않는 일 역시 혁명의 주체들의 몫이 되도록 연대해야 한다.
2018/03/10 09:44 2018/03/10 09:44
2018/03/10 08:05
작년 4월 북한과 미국이 일촉즉발의 태도로 으르렁댈 무렵 바젤에 사는 후배가 물었다. ‘미국인 친구들이 한국에서 곧 전쟁 난다고 부모님을 스위스로 모시라는데 정말 전쟁 날 것 같은가?’ 나는 ‘단정할 순 없지만 너무 걱정 안해도 될 거’라고 했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 대기업들이 지분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 상태이니 한국 내에서 전쟁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거였다. 후배는 수긍한 듯했다. 어느 시대나 대체로 그렇지만 특히 이윤이 절대 가치인, ‘인격화한 자본’이 다스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제 분쟁의 원인은 하나다.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지배계급은 그에 따라 분쟁도 하고 전쟁도 하며 또 분쟁과 전쟁을 멈추기도 한다. 그들의 선택은 ‘자유 수호’ ‘악의 축 제거’ ‘성전’ ‘국익’ ’평화 추구’ 따위로 동원 대상인 인민의 기호에 맞추어 포장된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극적으로 태도를 바꾼 건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신념이나 의식이 바뀌어서라기보다 피차 전쟁은 실익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핵심은 평화가 소수 지배계급의 이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현실 자체다. 북한이든 남한이든 미국이든 인민이 더 주인인 사회라면 애초부터 평화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 지배계급의 이해에 따라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전쟁에 희생되는 상황도 부당하지만 그들의 이해에 따라 우리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감동하는 것 역시 온당친 않다. 오히려 ‘이것들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구나’ 부아가 치밀 일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건 그런 현실이 우리의 동의에 의해 작동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의가 지속되는 한 평화는 영원히 보장되지 않는다.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의 허울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다.
2018/03/10 08:05 2018/03/10 08:05
2018/03/08 14:38
그런 인간인 줄 몰랐다고 욕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인간에게 열광한 제 경솔한 안목과 얕은 식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척 기이하다. 열광과 실망을 마치면 다음 열광으로 이행하는 무한 반복은 민주주의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태도다.
2018/03/08 14:38 2018/03/08 14:38
2018/03/05 08:30
성폭력 가해자의 어쭙잖은 사과문에 ‘믿는다’ ‘힘내라’ 댓글을 달거나,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요지의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2차 가해 이전에 성인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성인은 마음에 품을 말과 입 밖으로 꺼낼 말, 사적으로 할 말과 공중 앞에서 할 말을 구분할 줄 안다. 성인은 인간이란 생존을 해결하는 방법에 따라, 그에 수반하는 사회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인격은 물론 본성마저 조정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 즉 성인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 앞에 ‘적어도 나에겐’을 붙일 줄 안다.
2018/03/05 08:30 2018/03/05 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