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에 해당되는 글 8건
2018/02/26 09:44
어제야 본 ‘공동정범’은 매우 지적인 영화였다. 근래 한국에서 사회적 사건을 다룬 영화가 대중적 호응을 얻는 상투적 공식들을 대부분 거스른다. 생각을 단순하게 만들거나 손쉽게 정의감을 얻거나 선악의 이분법 뒤로 숨어 감상에 젖는 걸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가 담은 사건과 사람들을 소비하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2018/02/25 08:57
이윤택이 연희단을 ‘개인주의를 극복한 공동체’를 지향하며 운영해온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촛불 관련한 인터뷰에서도 그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선진국에선 공동체라는 광장이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연극 백석우화 관련한 인터뷰에선 ‘백석은 공동체적 삶을 거부하다 북한에서 배제당한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공동체라는 말을 때론 공동체의 의미로 때론 집단의 의미로 쓴다. 이윤택이 공동체와 집단을 구분할 줄 모른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공동체와 집단은 어떻게 다른가? 공동체는 개인이 살아있지만 집단은 개인이 말살된다. 개인주의의 적은 집단이지 공동체는 아니다.(이런 혼선이 일어나는 주요한 원인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주의를 대변하기 때문인데, 따로 이야기하기로) 공동체는 민주적이지만, 집단은 필연적으로 전제적이며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단체든 조직이든 국가든, 심지어 가족이든 인간의 사회는 다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제적 지도자가 성원들을 억압한다는 건 뒤집힌 시각이다. 민주적 견제 능력이 없는 성원들이 공동체를 집단으로 만들고 지도자라는 괴물을 떠받든다. 민주적 견제능력, 내가 살아갈 세상은 내가 만들어간다는 의지가 관건이다.
2018/02/19 21:53
촛불은 거대한 저항운동이었지만 혁명은 아니었다. 시민혁명이라고도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정상화했다. 촛불은 헌법재판소에서 매듭지어졌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혁명이 맞는 것 같다. 좌우상하를 관통해온 거대한 체제 하나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 헌법을 갈아치우고 있다.
2018/02/19 14:16
실망했다는 건 그의 실체와 그에 대한 나의 허상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사회 문화적 경제적 필요, 그리고 내적 불안과 두려움의 회피를 위해 그에 대한 허상을 만든다. 허상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실망’한다. 화를 내고 억울해하며 상처받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실망은 실은 성립하지 않는다. 실망은 그에 대한 게 아니라 나에 대한 것이다. 실망하지 않는 방법은 허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내 이성을 게으르고 비겁한 상태로 두지 않는 것이다.
2018/02/18 14:30
우리는 물신주의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물신주의에 사로잡힌 사람’, ‘물신 숭배에 빠진 사회’ 같은 말들이다. 그런데 그런 말들은 물신주의의 의미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죽는 날까지 돈을 쓸 줄은 모르고 쌓아놓기만 하는 수전노, 소비 욕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청년, 대통령 직을 사기 행각에 이용한 이명박 같은, 어지간한 사람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들은 자본주의 물신주의의 본령이 아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이며, 노동의 가치와 임금의 차이 즉 잉여가치가 바로 이윤임을 밝혀낸다. 이자와 지대는 자본가가 그 이윤을 화폐자본과 토지자본과 나눈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임금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이며, 이윤과 이자는 자본에서 나오고, 지대는 토지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맑스는 그것을 ‘물신주의 3위일체론’이라 부른다. 물신주의는 계급이나 교양 여부를 불문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갖는 신실한 미신이다. 미신은 자본주의 사회가 자랑하는 상식과 합리성, 공정과 정의는 물론 이런저런 호감 넘치는 대안 사회 아이디어에까지 속속들이 스며든다. 물신주의의 사악함은 물신주의의 범람을 개탄해마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있다.
2018/02/12 10:44
민주주의는 인민이 주인인 사회다. 충분히 경험했듯 민주주의 절차가 자동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진 않는다. 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인민이 주인 노릇을 할 만한 상태일 것, 인민의 다수가 현재 사회의 본질을 파악하고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견해를 가질 것. 민주주의는 그런 상태에 도달한 인민이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2018/02/06 09:29
맑스는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런저런 사무를 관장하는 위원회’라고 했다. 맑스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누리는, 정치의 주권자임을 자부하는 우리에게 맑스의 말은 거부감을 준다. 그러나 국가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몇개의 거대 독점 자본이 시장을 지배하며 자신들의 계획경제를 실행하는 상태에서 국가의 중립성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맑스의 시대처럼 무시로 제 본질을 드러내진 않는다. 결정적 순간에 분명히, 드러낸다. 진심으로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실체와 한계를 고민해야 한다. ‘재벌 공화국!’ ‘유전무죄!’ 개탄은 대개 그 고민을 회피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2018/02/01 19:00
현실 사회주의 몰락 후 좌파의 가장 큰 숙제는 스탈린주의 극복이 되었다. PD든 NL이든 스탈린주의 혹은 그 변종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연루된 문제의 극복은 당연히 성찰로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좌파는 거의 없었다. 부정하거나(자유주의로 전향) 회피했을 뿐(스탈린을 레닌이나 트로츠키와 구분하며 모든 책임을 전가하거나, 포스트모던으로 분칠하는) 이다. 그럼에도 좌파가 스탈린주의의 폐해를 전면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스탈린만큼 권력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바연대 집행부에서 일어난 일은 그 모든 것을 비추어 보여주는 작은 사례다. 나를 포함해 말하자면, 대부분의 좌파가 자유주의로 전향한 현실에서 좌파적 신념을 지속하는 윤리적 우위가 숙제까지 대신 해주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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