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에 해당되는 글 7건
- 2018/01/30 개탄
- 2018/01/24 책
- 2018/01/19 개인, 노예, 반공, 이행
- 2018/01/16 남성 서사를 넘어선 혁명
- 2018/01/08 필터
- 2018/01/03 혁명, 3가지 질문
- 2018/01/03 다행이다
2018/01/30 09:27
여검사가 저 정도라면 여느 여성은 대체 어떻다는 말인가, 라는 개탄엔 묘한 구석이 있다. 정말 몰랐다는 걸까. 한국은 성폭력이 차고 넘치는 사회다. 어느 수준으로든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여성이나 목격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우리는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2018/01/24 09:55
그 무렵, 출판되는 거의 모든 인문 사회과학 도서를 읽고 리뷰까지 쓰지만 현실에 대한 견해는 ‘이명박 나쁜 놈’을 넘지 않던 친구와 술을 먹다 문득 물었다. ‘이명박을 욕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책이 필요해?’
2018/01/19 09:29
양효실은 남성 서사로서 혁명을 여성주의 작가 유켈레스와 상탈 애커만의 작업을 재료로 풀어주었다. 장석준은 혁명과 개혁의 의미를 시민교양강좌의 방식으로 쉽고 포괄적으로 내놓았다. 오늘 나는 혁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대략 네 개의 화두 - 개인, 노예, 반공, 이행 - 로 꺼내보려 한다. 개인주의는 혁명의 장애물인가, 맑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반공주의, 혁명의 시간과 지속, 따위 이야기가 될 듯하다.
2018/01/16 15:20
‘혁명, 3가지 질문’ 세미나가 내일부터 3일간 열린다. 내일 발제는 미학자이자 비평가 양효실 선생의 ’남성 서사를 넘어선 혁명’.
발제자에게 맡긴 질문:
혁명의 역사는 온통 남성 서사로 채워져있다. 그것은 단지 혁명에서 여성의 미미한 지분을 뜻하는 걸 넘어, 혁명의 모든 것(혁명 이론, 철학, 운동, 정치와 일상에 이르기까지)이 남성의 관점과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뜻한다. 그 사실은 또한 스탈린주의 문제를 비롯 혁명이 실패로 귀결한 이유와, 혁명을 꿈꿀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낸 원인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발제자 소개:
미학자이자 비평가. 여성, 청년, 동성애자 등을 재현하는 미적인 혹은 윤리적인 방법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전달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다. 삶을 그 자체로 선명하게 감각하며 이를 글로 드러내기 위해 분투한다.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를 썼고 주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 『윤리적 폭력 비판』, 『주디스 버틀러,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을 옮겼다.
2018/01/08 08:59
‘혁명’이라는 말은 즉각적으로 우리 의식의 검열 필터를 작동시킨다. 혹시 ‘그 혁명’이 아닌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혁명은 두말할 것 없이 러시아 혁명을 필두로 한 현실 사회주의 혁명이다. 우리는 그런 혁명은 이미 불가능한 세상일뿐더러, 설사 가능하다 해도 ‘해선 안 될’ 혁명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 혁명은 물론 그 혁명을 계승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경청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생각은 상당한 근거가 있으며 분별 있는 태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이 거기게 멈춘다면 우리는 또 다른 수렁에 빠질 수 있다. 그 혁명에 대한 분별이 혁명에 대한 분별없는 혐오로 바뀐다면 말이다.
질문해보자.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과연 혁명적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가? 즉 문제가 있긴 하지만 체제 내의 개선이나 정권 혹은 지배 엘리트의 선의에 기대해도 충분한 수준인가? 그렇다고 믿는다면 혁명 따위는 깔끔하게 잊고 살아가면 된다. 아니라면, 내키지 않는 마음을 잡아끌어서라도 혁명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세미나는 바로 그것에 관한 시도다. 누구도 ‘이것이 혁명이다’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혁명은 무엇인가’ 함께 질문한다.
2018/01/03 15:43
아르코미술관에서 사운드 아트 전시 <혁명은 TV에 방송되지 않는다>가 열리고 있다. 2007년 바루흐 고틀립 (베를린)과 양지윤 (서울)에 의해 시작된 ‘사운드 이펙트 서울’의 10주년 전시다. 국내외 13팀이 참여했는데 대체로 작품 수준이 높고, 설치나 공간 구성에서도 고유한 성취를 보인다. 사운드 아트는 현대미술 장르 중에서도 최근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소리로 하는’ 예술이라, 누구든 제 나름의 감상과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관람을 권한다.
부속 행사로 세미나가 열린다. 주제는 역시 ‘혁명’이며 내가 기획과 진행을 맡았다. 근래 혁명을 말하는 일은 좌파 활동가에게서조차 자취를 감춘 채 지적 힙스터들의 희소 취향에나 봉사하는 듯하다. 현실은 혁명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수많은 지표와 근거들로 포위되어 있고, 그것은 다시 지적 무력감과 병적 자기 위안의 수단으로 악순환한다. 그러나 혁명이 가능한가 보다 더 중요한 건 혁명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일이 아닐까? 혁명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했지만, 우리는 질문을 잊은 지 오래다. 혁명은 무엇인가?
2월 17~19일 저녁 7시
아르코미술관 1전시실
1.17 양효실 <남성서사를 넘어선 혁명>
1.18 장석준 <혁명의 흔적과 씨앗들>
1.19 김규항 <혁명노트 - 메타노이아>
2018/01/03 10:36
한국의 기존 보수가 리버럴을 좌파라 말하는 건 생존에 관한 문제다. 그래야만 저희가 극우가 아니라 정상적 우파/보수가 되기 때문이다. 리버럴을 우파/보수라 인정하는 일은 그들이 극우임을 인정하는 일과 같다. 그 이야기는 그들의 태도가 진심은 아닐 수도 있다는,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념의 역학 관계와 생존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실제 현실에서 그런 보수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리버럴을 진심으로 좌파라 믿는다. 꽤 합리적인 보수 행세를 하는 사람조차 대부분 현 정권을 진심으로 좌파(혹은 종북좌파)라 믿는다. 바로 그것, 무지 이전의 야만의 정신 수준이야말로 한국 보수의 특별한 추악함이다. 그들이 박근혜를 촉매로 돌이키기 어려운 타격을 받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들보다 훨씬 잘 포장된 보수의 전면적 지배가 만들어내는 현실적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순 없지만, 그 자체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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