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일 내용 추가: 괜한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습니다. 오프에서 보는 사람들까지 다 한마디씩 하는군요.(“목발은 어디 둔 거야?” 같은 농담을 포함하여) 사진을 올린 건 그 흉측함을 함께 보며 액땜하자는 의미였는데 충격만 배가한 것 같습니다. 사고 다음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고 알아채는 사람도 없었을 만큼(두어 주 눈에 안 띄게 절긴 했지만 ㅎ) 정말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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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1 23:40
실은 두달 전 사고가 있었습니다. 라이딩 중에 커브길에서 택배 트럭이 빠른 속도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정면 충돌했지요. 트럭 기사와 목격자는 ‘사망 내지 중상’(근대풍 표현 ㅎ)이라 확신했답니다. 결론적으로 이곳저곳 타박상 외엔 심각한 부상은 없었습니다. 강건한 신체가 유일한 재산이긴 하지만 인체가 트럭과 상대할 순 없겠지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싸인이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경고의 싸인이자 아직 할일이 있다는 인증의 싸인. 해를 넘기며 전자는 정리하고 후자는 정성을 더하려 합니다. 한해 동안 귀한 교감 고맙습니다. 몸도 마음도 평안한 새해 맞으시길 빕니다.
2017/12/29 09:35
‘상위 계층-극우-조중동’ 이라는 도식으로는 현실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도식은 이미 깨졌고 더 깨지고 있다. 리버럴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즐겨 묘사되듯) 단지 정권만 잡은 게 아니라, 시대의 대세다. 중앙일보와 JTBC의 이념적 균열은 그 한 상징적 사례다. 홍석현과 홍정도가 다르듯, 상위 계층의 장년 세대는 여전히 조선일보를 신봉하지만 자식들은 스레드밀을 타며 손석희뉴스를 본다. 리버럴은 대세다. 리버럴이 대세라는 건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상식과 합리성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의미, 그리고 사람을 잡아먹는 한국식 자본주의가 상식과 합리성으로 포장된다는 의미.
2017/12/28 19:14
귀가 예민해서 음악을 들을 때 음질을 중요시하는 편이다. 그러나 오디오 기기로 음질을 추구하는 건 돈도 돈이려니와, 설사 돈이 충분히 있다 해도 그런 추구가 내포하는 인간적 불행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주 상태가 아니어도 일정한 음질을 확보하는 것 또한 나에겐 중요하다. 그런 조건들을 무난하게 해결하는 건 역시 랩탑을 이용한 시스템이다. 내 경우는 맥북프로에 플레이어로 오디르바나와 무손실 파일이 든 외장하드 두 개, 출력은 작업실에선 아담의 소형 모니터 스피커를 사용하고 밖에선 젠하이저와 웨스턴랩스의 인이어 이어폰(헤드폰은 갑갑해서 사용할 수 없다)을 사용한다. 출력기의 조건은 소스를 되도록 착색 없이, 현악기와 교향곡을 제대로 울리면서 하드록 역시 이상하지 않게 울려주기, 정도인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맥북과 출력기를 연결하는 DAC는 오디오퀘스트의 드래곤플라이다. 작고 간편하면서도 성능이 뻬어나서 5년 넘게 사용해왔다. 최신 모델은 더 고음질 파일을 커버하지만 요즘은 외장하드 챙기는 것도 귀찮아져 애플뮤직 스트리밍을 주로 이용하는 터라 굳이 바꿀 이유는 없다. 원래 검은색 고무 코팅 같은 게 되어 있는데 조금씩 벗겨져서 영 흉해졌다. 칠을 다시 할까 하다가 며칠 전 갑작스러운 장난기에 기대어 주방용 철수세미로 싹 벗겨버렸다. 그런데 새 것일 때보다 오히려 더 근사해졌다. 머리통 속 낡은 관념이나 관습화한 의식을 벗겨내는 철수세미가 있다면 좋겠구나, 문득 생각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꼭 이런 생각을 이어붙이는 모종의 강박 또한.
2017/12/28 16:02
한국 경제에서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절대적이며 재벌 개혁 없이는 한국경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요는 그 개혁이라는 것이 뭐냐, 다. ‘재벌 개혁론자’라 알려진 장하성이나 김상조 같은 이들은 제대로 경쟁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라고 한다. 국가를 쥐고 흔드는 재벌의 독점성을 시장주의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말은 조금만 생각해도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다. 총수 하나를 잠시 법정에 세운다거나 총수 일가의 윤리 문제를 논하는 것, 불법/탈법 비판 등도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데 좀더 기여한다. 재벌 개혁은 소유 구조와 경영 방식에까지 들어갈 때 비로소 시작된다. 원론적으로 기업의 사회화/국유화는 구좌파의 교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재벌은 일반적 의미에서 기업이 아니다.
첫째, 한국 재벌은 그 형성과 성장 과정으로 볼 때 총수 가족의 사유물이 아니라 다수 국민이 일군 기업을 총수 일가가 탈취하여 사유화한 것이라 봐야 한다. 총수(1세)라는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국부를 늘리기 위한 수출 위주 대기업 정책에서 일종의 실무 관리자 노릇을 한 사람들이다. 대기업의 실 내용을 채운 건 물론 총수가 아니라 그런 경제 정책이 모두를 잘 살게 할 거라는 선전 아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내한 국민이다. 그런데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민주화와 신자유주의가 열리면서 재벌은 총수 일가의 사유물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 모든 논의는 재벌이 총수 일가의 사유물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에 대고 왜 편법 상속을 하는가 왜 불법/탈법을 일삼는가 따지는 건 삼성이나 현대가 총수 일가의 것임을 전제한다. 먼저 삼성이나 현대가 왜 너희의 것이냐 따져 묻는 게 맞다.
둘째, 현재 재벌은 물론 30대 기업의 최대 주주는 국민연금이다. 말하자면 재벌은 이미 실제적으로 국유화 상태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재벌이 총수 일가의 사유물일 수 있는 이유는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재벌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 노릇을 하면 재벌은 국민의 것이 된다. 재벌의 막대한 이윤과 자산은 바로 그 재벌을 몸으로 일군 국민의 것이다. 한국 재벌의 ‘사회화’는 좌파의 교의와 무관하게, 합리적 사고와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2017/12/26 17:49
점집과 역술원이 성업 중이라 한다. 왜 안그렇겠는가. 불안하고 앞이 안보이고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시절일수록 그런 데 의지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왜 동반 현상이라 할 사이비 종교는 뜸할까. 기성 종교 때문이다. 기성 종교(물론 특히 보수 개신교)가 사이비 종교의 역할을 이미 하고 있으니 정작 사이비 종교가 발붙일 구석이 없다. 한국 보수 개신교는 사이비의 사이비인 셈이다.
2017/12/25 10:50
극한 지역에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기에 볼까 말까 앞머리를 살피는데 이런 대사가 나온다. ‘고립감과 고요함을 좋아합니다.’ 히야, 신음처럼 감탄사를 내뱉으며 빠져든다. 고립은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다. 인간은 철저히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발적 고립의 순간에 비로소 자신과, 제 안에 숨겨진 신적 측면과 대화한다. 연대와 숭고가 시작된다. 예수는 내내 보여주었다.
2017/12/24 09:46
활동가에게 ‘화를 내면 교감하기 어렵다’ ‘폭력은 거부감을 준다’ 같은 충고를 하는 ‘의식있는’ 인사들을 보면 딱하다. 활동가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화내지 않으면 안되는, 점잖고 온화한 얼굴로만은 어려운 범주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인사들은 자신이 점잖고 온화한 얼굴로 말해도 세상이 귀를 기울이는 범주의 이야기만, 즉 체제가 그어준 안전선 안에서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리버럴 중산층과 미디어의 각광이 안전선을 넘은 자들에 대한 혐오 확산으로 받은 체제의 보상이라는 사실 역시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닥친 위협에 점잖고 온화한 태도만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선을 넘어선 상황을 염두에 둔다. 사회운동도 마찬가지다. 선 안에 머무는 사람이 선을 넘어 어렵게 싸우는 사람에게 나처럼 하라 충고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다.
2017/12/23 09:27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는 강용주에게 실형을 구형한 검찰이 아니라, 이런 상황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하고많은 민주 시민들이 아닐까. 그들은 강용주에게 무관심한 게 아니다. 그들은 강용주를 짐짓 두려워한다. 강용주는 ‘간첩’이기 때문이다. 만일 강용주가 ‘민주화운동가’(체제의 정상화를 위해 헌신한)였다면 이미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다. 오래전 강용주는 극우 파쇼체제에 의해 묶였었다. 이제 그는 이 고매한 민주 체제와 민주 시민의 침묵에 의해 묶여 있다.
2017/12/22 14:46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연예인이 상식적인 말 한 마디를 하면 몇날 며칠을 환호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상식을 우리 삶에 구현해내느라 싸워왔고 다시 상식 이상의 것을(미래의 상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에겐 놀랄 만큼 무관심하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정신적 경박함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다.
2017/12/22 14:01
현자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게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단지 심리적 전향이 아니라 삶의 전향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이다. 인간의 가치가 교환가치로 일원화하고, 내 욕망이 아닌 것을 욕망하게 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이 진정한 행복을 찾는 일과 혁명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다. 메타노이아(삶의 근본적 전향, 한국어 성서에 ‘회개’라 번역되어 있는)가 곧 혁명이다.
2017/12/20 10:46
주로 노빠를 대상으로 쓴 글이지만 오늘 문빠는 훨씬 더 심각해 보인다. 노빠가 피해자 정서를 보였다면 문빠는 완장을 찬 토벌대다. 이 글에서 ‘생계형 범죄’라는 말을 한 사람이 바로 조기숙이다. 김어준은 조기숙의 마초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더 교활한 방식으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러트려온 건(빠의 양산에 기여해온 건) 유시민이다. 점잖고 지각있어 보이는 사람들 중엔 문빠를 혐오하면서 유시민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다. 시스템에 놀아나지 않는 교양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다.
2017/12/13 10:55
‘귀순 北병사, 초코파이 평생 무료’라는 제목의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렸다. 그만들 해도 좋지 않을까. 한 인간의 기생충이 끓는 내장을 다함께 공유하고도 여전히 부족한가. 동물을 진열장에 넣고 구경거리로 삼는 것도 비판받는 세상이다. 한국은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조금 더 품위있게 행동할 책무를 부정하기로 합의한 사회라도 되는가.
2017/12/03 11:44
필립 글래스 자서전이 나오자 바로 사지 않은 건 일 때문에 읽어야 할 책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 법이고 결국 읽고 있다. 우리가 듣는 음악의 대부분은 사라진다. 그래서 ‘진행 중인 클래식’과 관련한 이야기와 진술은 흥미롭고 종종 교훈적이기까지 하다. 책에 등장하는 음악가들의 음악을 새삼스럽게 틀어보며 읽는 것도 재미다. 딱 한 사람은 예외다. 스티브 라이히. 실은 책을 열어 가장 먼저 한 일이 (점잖지 못하게도) 맨 뒤 인명색인에 그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예상대로 없었고 ‘하여튼 영감들 참’ 하며 웃었고 어떤 균형을 위해 그의 음악을 추가했다.
2017/12/02 10:00
근래 시민들이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보이는 모습은 대체로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을 찾아다니며 집단 이루기’ 혹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고 적대하기’인 듯하다. 토론이나 배움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만 가능하다. 나와 같은 의견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다. 외롭고 고단한 세상이고 누구나 위로는 필요하다. 그러나 수백수천만의 성인이 위로만 받으려는, 종일 틈만 나면 징징거리며 몰려다니는 풍경은 우습고 기괴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바치는 시간의 일부를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외로움을 이기는 궁극적인 방법은 위로가 아니라 고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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