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인들의 고질적 결핍 하나는 ‘거대담론 기피’다. 그게 한국만의 현상이라고 할 순 없지만 한국 지식인들의 경우 그 정도가 유별난 편이다. 물론 정치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책 변화와 개선에 집중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태도의 근저에 거대담론 혐오가 깔릴 때 문제가 생긴다. 사회란 단지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들의 집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들의 변화와 개선을 해나가면 결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거라는 생각은 매우 합리적으로 느껴지지만, 그르다. 사회는 그 기본 성격을 결정하는 거대 구조가 있고 그 안에 수많은 작고 구체적인 것들이 자리한다. 작고 구체적인 것에만 성실하게 집중하는 건, 의미있게 변화하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거대 구조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 기여한다.(90년대 이후 참여연대 등 새로운 시민운동은 거대담론을 벗어나 이른바 시민 일상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을 표방했고 시민 사회에서도 그 의미와 성과에 큰 호응을 보였지만, 바로 그 기간에 오늘 ‘헬조선’이라 불리는 새로운 거대 구조가 만들어졌음을 생각해보라.) 거대담론 기피는 또한 사회 문제에 대해 기능주의적 접근에 매몰됨으로써 ‘가치’의 문제, 사회 문제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사유를 소거하는 경향을 만든다. 그것은 제도나 정책의 개선에 그 목적인 인간이 뒤로 밀려나고 제도나 정책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을 뜻한다.(근래 최저임금 인상 문제에 대해 꽤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이, 해당하는 실제 인간들의 삶부터 말하기보다는, 매우 예사롭게 ‘전체 경제에서 부정적 효과’만 말하는 모습을 보라.)
한국 지식인들의 거대담론 기피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30여년 전 몇해 동안 급격하게 사회구성체와 혁명론 등 거대담론에 빠져들었다 한순간에 허물어진 86의 자기 혐오다. 자생적이라기보다는 극우 독재의 폭압 덕에 폭발적으로 발전한 그들의 급진성은 민주화로 한풀 꺾였고, 이어진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는 그 사회에 대한 낭만적 이해에 머물던 그들을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게 했다. 자괴감을 성찰적 토론과 논쟁으로, 혹은 그들이 그토록 애정하던 ‘변증법적으로’ 넘어서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 90년대 들어 그들 대부분은 자유주의적 소시민으로 체제에 편입된다. 민중운동의 간판을 시민운동으로 바꾸거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에서 포스트모던 수입상으로 발빠르게 변신하기도 한다. 행로는 다양해도 자괴감은 다르지 않았다. 자괴감은 자기혐오로, 거대담론에 대한 병적 기피로 전이했고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와 지적 담론에 지속적 영향을 끼쳐왔다. ‘촛불 혁명’이 혁명이 되지 못하는 이유, 촛불 이후의 과제가 자유주의 정권에 무력하게 내맡겨지는 모습도 결국 거대담론 기피, 거대담론 부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시 거대 담론에만 집중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옛 페이비언들의 말마따나 ‘혁명적 언어 뒤에 숨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꼴을 자초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어떤 것인가. 답은 간명하다. 거대 구조와, 작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동시에 고민하고 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한 사람의 글이나 이야기에 두가지 면이 언제나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거대담론에 어떤 사람은 작고 구체적인 것에 집중하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효율적일 것이다. 다만 전체를 조망하며 상대의 역할을 존중하는, ‘역할 분담’의 태도를 잃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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