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에 해당되는 글 12건
- 2017/07/24 성인
- 2017/07/23 개인, 사회, 사회주의
- 2017/07/19 관점
- 2017/07/16 미래 단상
- 2017/07/15 기지촌 지식인의 군락지
- 2017/07/13 가르침
- 2017/07/12 소극
- 2017/07/10 전체
- 2017/07/05 최저임금의 윤리학
- 2017/07/02 80 노인의 좌우분별
- 2017/07/02 옥자
- 2017/07/01 사회적 기업
2017/07/24 23:08
성인이란 혼자일 수 있는 사람이다. 여행이든 공연이든 산책이든 식사든, 함께 할 사람이 있든 없든, 혼자도 할 수 있고 그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성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이상하게 보지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은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2017/07/23 12:34
옛 농촌의 마을 공동체 같은 자연 공동체에 환상을 가진 사람을 간혹 본다. 삭막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오늘과 달리 가족같은 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상이 위험한 퇴행인 건 자연 공동체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공동체에서 '가족 같은 정'이란 개인성을 말살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연 공동체를 벗어나 자율적 개인으로 거듭남으로써 근대라는 세계를 만든다. 그리고 자연 공동체 대신 '사회'를 만든다. 자연 공동체는 운명적이고 고정된 것이지만, 사회는 자율적 개인들이 얼마든 고치고 바꿔나갈 수 있다. 오늘 세상이 삭막함과 이기심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자연 공동체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회가 없기(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왜 사회주의가 되었을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태도와 전망인데 왜 하필 '사회주의'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근대는 자본주의의 뼈대 위에 자유, 평등, 우애(연대)를 이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장 자유와 사적 소유로 자유를 축소하며, 평등과 연대를 파괴하는 속성을 가졌음이 밝혀진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일'이 '사회를 만드는 일'이 된 것이다. 사회주의가 근대의 이상을 부정한다는 생각은 오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덕에 위기에 처한 근대의 이상을 되살리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철폐'라는 한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한 오해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모든 노력은 사회주의적인 것이다.
2017/07/19 17:05
사람은 어떤 관점을 갖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된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의 관점과 주인의 관점이 있다. 예컨대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 한다느니 밥하는 아줌마가 어쩌니 따위 망언을 일삼는 이언주를 보자. 많은 사람들은 ‘배운 사랍답지 않음’이라는 측면에서 그에게 분노한다. 그런 분노엔 배움에 대한 체제의 관점(체제가 심어준 관점)이 들어 있다. 배움의 가치를 제도 학력이나 학벌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배우는가. 좀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학력이나 학벌은 과연 배움과 인과관계가 있는가. 노년 세대만 해도 ‘배운 사람은 달라’식의 말을 사용하거나 들은 기억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학력이나 학벌이 배움과 얼마간 인과관계가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떤가. 학력이나 학벌은 좀더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제 교환가치를 늘리기 위해, 나아가 다수의 잉여노동을 가로채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쓰인다. 오늘 학력이나 학벌은 배움과 무관하다. 그렇게 볼 때 이언주는 ‘배운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배워먹지 못한’ 사람이다. 두 관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이언주를 '나쁜 상전'으로 보고 후자는 '나쁜 인간'으로 본다. 전자는 '착한 상전'을 기대하는 태도로 이어지며 제아무리 분노하고 사회 정의를 외친다 해도 피지배 상태에 머물게 된다. 후자는 사회의 주인으로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태도로 이어진다.
2017/07/16 13:43
“모든 사람이 원하는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이른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이다.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고 사회가 최선의 형태로 조직되면 인간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에겐 공상적인, 아니 오늘 현실을 생각한다면 쓸모없는 망상에 불과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케인즈는 어떤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인간의 지옥으로 보고 그 붕괴를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지만 케인즈는 자본주의를 최선의 체제라 본 사람이다. 다만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보이지 않는 손’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적절한 수정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봤다. 알다시피 케인즈의 생각은 20세기의 절반 이상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틀이었다.
케인즈는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혁신으로 다음 세기 초쯤(지금이다) 되면 주 15시간 노동을 하며 살게 될 거라고 낙관했다. 주 15시간이면 주 4일 노동으로 해도 하루 4시간이 채 못 된다. 이 정도면 앞의 마르크스의 망상과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여하튼 최근 무성한 4차 산업이니 AI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 설레발이나 저의와 무관하게 생산력 혁신에 관한 케인즈의 예측이 실현되었거나 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케인즈가 말한 주 15시간 노동은 어디로 갔는가. 노동 시간은 줄지 않고 일자리만 줄고 있다. 일자리가 갈수록 더 빠르게 줄 거라는 게 모두의 걱정이다.
케인즈의 낙관은 왜 빗나갔을까. 사회가 잘못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발전과 생산력 혁신이 다수의 삶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자본의 이윤 추구에만 이용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과 관리가 사라지는 변화와 관련이 있는 건 물론이다. 다수는 그런 사회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즉 일자리 없는 미래를 정당한 상황으로 보면서 근심한다. 암담하고 무력하다. 건물주의 자식이 아님을 한탄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딱히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생산력은 케인즈의 말마따나 주 15시간 노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생산력 혁신이 자본의 이윤 추구에만 이용되는 사회를 방치하는가 다수의 삶에 기여하는 사회로 바꾸어내는가다. 그 변화에 모두의 미래가 달려있다. 변화가 쉽고 평화롭기만 할 수 있다면 누군들 변화에 참여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본 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적어도 상식적이고 선량한 정치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아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2017/07/15 14:07
아래 '소극'이라는 글에서 '기지촌 지식인의 군락지 서울'이라 표현했는데, 의미를 묻는 이들이 있어 간략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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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회가 인민에게 이전 사회보다 좋은 삶을 제공할 수 있었다면 그 현실적 틀은 민주화와 산업화였다. 인민은 민주화를 통해 왕이나 신의 복속물에서 자유롭고 소유권을 가진 개인이 되었으며, 산업화를 통해 혁신된 생산력 덕에 동물적 생존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은 그걸 가장 먼저 수행했고 대체로 지구에서 가장 낫게 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한국은 늦게나마 산업화와 민주화를 수행했는데 왜 '지옥'을 맞았을까? 한국의 근대화엔 뭐가 빠진 걸까?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숙제는 바로 그 질문을 사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유럽의 인문학이 파시즘과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련식 사회주의가 보인 공통 분모를 분석하여 근대(계몽) 자체에 지옥의 씨앗이 들어있음을 발견한 건 70여년 전이다. 그들의 근대화가 지옥을 회피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사유가 계속 진전하면서 그들의 근대를, 민주화와 산업화를 견제해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인문학은 어땠는가. 극우독재가 물러갔을 때 산업화는 되었으니 민주화만 되면 된다는 소박한 생각을 한 건, 그때까지의 피로와 성취감을 고려할 때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만개하고 민주 세력이 집권할 때조차 지옥화가 줄기차게 진행되었다면 인문학은 그 사태에 정면으로 질문했어야 한다. 그러나 인문학이 한 건 생뚱맞게도 미국발 '프랑스 이론'(포스트모더니즘) 바람에 온통 빠져드는 것이었다.
여전히 한국 인문학의 주요한 임무는 신상 유럽 인문학을 발빠르게 수입하거나, 어쭙잖게 흉내내며 거들먹거리거나, 심지어 유럽 인문학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사회에 인민의 잉여노동에 기생하는 것이다. 옛 송탄이나 의정부 미군 기지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바로 그 풍경이다. 한국(서울)은 기지촌 지식인의 '세계적' 군락지다.
2017/07/13 08:04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에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며 고민하는 친구에게, 뭔가 일어났다는 뜻일 거라고 만일 모든 학생이 다 좋다고 했다면 강의는 끔찍하게도 아무 것도 일으키지 못한 걸 거라고 말했다. 친구가 절반쯤 수긍한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가르친다는 게 뭐라 생각하나. 내가 대답했다. 기능적인 부분은 가르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기능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이전되는 게 아닐까. 지적인 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갈수록 든다. 가르칠 수 없고 단지 충돌할 수 있다. 배움은 불편과 반감을 수반한다.
2017/07/12 17:42
2017/07/10 08:04
체제는 문제를 지움으로써 유지되며, 그 관습적 방법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계급 갈등을 지우기 위해 국익을 말하고 노동 착취를 지우기 위해 전체 경제를 말하고 성폭력 사건을 지우기 위해 조직 보위를 말하고 개인의 억압을 지우기 위해 가정의 평화를 말한다.
2017/07/05 21:05
정리해고와 명퇴 등으로 고용 안정성이 극도로 나쁜 탓에 영세 자영업자가 넘쳐나는 한국에서 최저임금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활발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토론에 앞서 함께 기억할 게 있다. ‘최저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는 실재하는 존재다. 대개 최저 임금을 빠른 시간 내에 1만원으로 인상하는 주제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경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물론 각자 상당한 근거와 논리가 있지만 양쪽 모두 ‘최저 임금을 받는 사람’은 배제되거나 대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최저임금제는 본디 시장 원리가 아니라 시장 원리가 만들어낸 비인간적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생겨난 제도다. 최저임금은 경제적 차원의 문제이기 전에 윤리적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최저임금엔 그 사회의 인간 존엄에 대한 이해와 철학이 반영된다. 시간당 임금이 1만원의 몇곱절은 넘는 사람들이 최저임금 1만원의 경제 효과를 논박하는 일은 적어도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최저임금을 토론할 때 '최저 임금을 받는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들에게 얼마를 주는 게 최선인가’가 아니라 ‘나라면 최소 얼마를 받아야 살 수 있는가’부터 토론해야 한다. 그게 1만원이라면 1만원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에 최저임금 보조를 요구하는 것을 비롯하여)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을 조정하고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2017/07/02 22:28
낮에 어머니와 둘이 밥을 먹다가 Y권사(가장 가까운 친구분) 안부를 물었다.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많이 나아졌어. 그런데 좌파가 정권을 잡아서 큰 일이라고 자꾸 해.” “그래요.” “김대중이도 좌파고 노무현도 좌판데 이제 문재인이가 북한에 다 퍼주고 나라 망할 거라고.” “뭐라고 하셨어요.” “좌파가 뭔지도 모르고 평생 그랬는데 말하면 뭐해. 못 바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지.” “어머니 생각엔 뭔데요.” “좌파가 뭐야 사회주의지, 우리 아들 같은 사람." "대통령은요." "우파지. 문재인 대통령이 좌파면 우리나라가 절반이 사회주의게.” “새누리나 자유한국당이나 그쪽은 자기들이 우파라잖아요.” “그건 다 도둑들이고.”
80대 노인의 깔끔한 좌우분별 ㅎ
2017/07/02 19:33
예술에서 창작 여건은 창작과 정비례하지 않는다. 물론 지나치게 열악한 창작 여건은 예술가와 창작을 억압하며 그 점이 많이 강조되곤 하지만, 훌륭한 창작 여건 역시 예술가를 억압할 수 있다. 풍찬노숙하던 소설가가 인정받아 꿈꾸던 집필실을 갖는 시점과 작품이 졸렬해지는 시점이 일치하는 건 우연만은 아니다. 국지적 창작 여건에서 작업하던 감독이 인정받아 글로벌한 여건에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평범해지는 것 역시 우연만은 아니다. '옥자'에 기대가 컸는데 매우 실망했다. 특히 의아할 만큼 상투적인 사회적 식견, 도무지 깊이를 발견할 수 없는 연기 연출은 봉준호를 특별한 감독 중 하나로 봐야 할 이유를 재고하게 했다.
추신. 영화평론가들이 옥자에 준 별점과, 말도 안 되는 별점을 합리화하느라 애쓰는 단평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미의식이 없다면 자의식이라도 가져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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