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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09:56
지지자와 빠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지지자는 제 행동이 지지 대상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고 고려하지만 빠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지 대상에게 비판 받을 일이 생겼을 때 지지자는 그 비판의 정당한 부분을 일단 인정한다. 지지 대상의 합리적 환경을 드러내보임으로써 지지 대상의 합리성을 환기하고 악화된 여론의 회복에 기여하는 것이다. 빠는 비판의 정당성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무작정 그 대상을 옹호함으로써 악화된 여론을 더욱 악화시킨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가족 비리 문제로 여론이 최악의 상태일 때 자신의 홈페이지에 '고맙지만 여러분이 너무 그러면 내 입장이 좀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빠의 행태에 별다른 변화는 없었고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지지자와 빠의 행태가 그렇게 다른 이유는 지지자는 지지 대상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지만, 빠는 자기애를 대상에 투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빠가 그 대상에 대한 비판에 합리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도 대상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모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빠는 내면적 결핍(주로 낮은 자존감)을 사회적 명성을 가진 대상을 통해 채우려는 병증이다. 노빠/문빠와 박빠는 철천지 원수처럼 보이지만, 같은 병을 앓는 환우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조처는 전문가의 치료다.
2017/04/24 19:28
부끄러운 짓을 해놓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을 개탄하며 부끄러워할 것을 촉구하는 건 사실 소용없는 일이다. 부끄러움도 공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공부함으로서 비로소 짐승과 구별되지만 모든 인간이 그런 건 아니다.
2017/04/20 20:49
민주화 이후 운동 이력 팔아 정치인도 되고 운동 추억 팔아 작가도 되고 노선을 바꾸어 교수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안면몰수하고 강남 학원 원장도 되어 극우 기득권 세력과 정권을 놓고 경쟁하는 리버럴 기득권 세력이 된 386.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사회 문화 전분야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을 법제화하고 삼성공화국을 만들어 헬조선을 기초함으로써 인민의 신망을 잃고 정권을 넘겨준 그들은 요행히도 최순실과 박근혜의 패악질 덕에 제 세상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눈이 돌아갈 수밖에. 어젯밤 그들의 발광이 또 한번 시작된 모양이다. 오래 전 그들의 친구였던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부끄럽다.
2017/04/20 15:10
몇십일 기간을 정해놓고 새벽에 일어나 8시간씩 연습하는 연주자 이야기를 듣다가 며칠 전 우연히 본 영상에서 공병호의 말 '열심히 노력해서 더 많은 성취를 만들어내는 삶이 왜 자기착취인가?'가 떠올랐다. 수행정진과 자기계발의 차이를 생각했다. 나를 덮은 온갖 더께를 걷어내고 진짜 나를 찾는 일과 나를 더 바람직한 다른 나로 교체하는 일. 후기 자본주의가 부여하는 고통이란 결국 삶의 결이 어떤 수준에서든 수행정진 지향에서 자기계발 지향으로 바뀌어버린 데 기인하는지도.
2017/04/19 18:46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한 존중을 토대로 한다. 선거에서 어떤 후보를 지지하든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혹은 혐오해 마지않는 후보를 비난할 순 있다. 그러나 그런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비난은 내 입 안에 머물러야 한다.
2017/04/18 14:47
현재의 정치 체제가 현재의 사회 성원의 의식 수준이나 이념 범주를 담기엔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건 대체로 동의하는 사실이다. 60년 이상 정상 우파 행세하던 극우 정치의 괴멸은 변화의 조짐이지만 좌파 정치가 기이하리만치 휑하니 비어 있는 상황은 여전하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선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다음 선거는, 그리고 그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부모들과 교육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서유럽, 특히 북유럽 교육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 말한다. '나도 그런 나라 살면 당연히 그렇게 하죠. 하지만 여긴 한국이니까 어쩔 수 없죠.' 맞는 말이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 은 언제나 맞다. 다만 그 말엔 두가지가 빠져 있다. 그 나라들은 원래부터 그랬는가? 주어진 현실은 앞으로도 어쩔 수 없는 건가?
그 나라들도 지금 한국 못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다. 내 아이만 챙기려는 태도도 만연했다. 그러나 모든 아이의 현실을 바꾸어야 내 아이의 현실도 바뀐다고 생각한 부모들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엔 매우 소수였지만 그들이 씨앗이 되어 서서히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고 교육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다음 부모들은 더 수월했고 변화는 가속도가 붙었다. 이제 그들의 교육 현실은 그들에겐 그저 주어진 현실일 뿐이다. 사회 변화는 늘 그렇게 일어난다. 주어진 현실에 머물지 않기로 한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 변화의 주역이다. 그들이 없다면 명민하고 헌신적인 활동가도 무력하다.
지나치게 협소한 정치 체제에서 일단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 이성적 태도의 범주에 석한다. 그러나 그 협소함에 굳이 자신을 꿰어맞추어서 스스로 협소해질 이유는 없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길 소망하는 사람이 고작 문재인/안철수 패거리(지지자 아닌, 제 후보 당락에 인생이 달라지는 이해 당사자들)의 이전투구에 휩쓸리거나, 이른바 사표론에 휘둘리는 건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 아닐까.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일과, 주어진 현실이 바뀌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은 언제나 함께여야 한다.
2017/04/17 14:23
언제부턴가 교감능력이 가장 중요한 인간적, 사회적 덕목으로 부각되고 관련한 말들도 넘쳐난다. 꽤 많은 사람에게 세계는 마치 교감능력이 있는 선인과 교감능력이 없는 악인의 대결장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물론 인간은 교감능력 없이 살 수 없다. 교감능력은 인간과 인간의 정서적 차원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정한 대면과 실천적 연대를 만들어낸다. 교감능력은 변혁의 동인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에게 교감능력처럼 상투화하기 쉬운 것도 없다. 교감능력은 종종 입에 발린 말, 좋은 사람 행세, 감상적 태도 등으로 대체되며 변혁의 '선한' 방어막으로 돌변한다.
2017/04/16 11:17
예수의 부활이 단지 육체의 부활이라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인류 최고의 마술사일 뿐이다. 우리는 마술사에 감탄하지만 존경하거나 신앙하진 않는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질 것을 요청하면서, 즉 수난과 육체적 죽음까지 불사할 것을 요청하면서, 동시에 온세상을 얻어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예수는 진정한 목숨이란 무엇인가 질문한다. 예수의 질문은 사회가 요구하는 자아상으로 내 자아를 교체하여 살아가고, 그 성공적 교체를 인생의 성공이라 여기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유의미하다. 부활절이 그 질문을 묵상하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날이면 좋을 것이다. '나는 정말 살아 있는가?'
2017/04/13 09:00
“잘될 거라는 막연한 낙관도, 그깟 취직 좀 늦어지면 어떠냐는 무책임한 위로도, 왜 이 정도 스펙밖에 갖지 못했냐는 흔한 질타도 하지 않았다. 준비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술을 사주었다.”
아무래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 문학성 논란이 있던데 이 소설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용한 구절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주인공에게 당시 남자친구가 하는 행동을 묘사한 것이다. ’어려움을 겪는 가까운 사람에게 해야 할 행동’을 잘 정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첫 문장에 열거된 세가지 행동(막연한 낙관, 무책임한 위로, 흔한 질타)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미화되거나 권장되는 이상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2017/04/12 13:15
오랫동안 한국 극우는 생사람 잡을 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곤 했는데, 이제 리버럴이 '적폐'라는 딱지를 예사롭게 붙이는 걸 본다. 극우가 지지하는 후보는 결국 극우 후보라는 논리도 그렇다. 옛 극우가 북한이 민주화운동 지지하니 민주화운동은 북한앞잡이라 하던 것과 뭐가 다른가. 말그대로 싸우면서 닮은 건가. 한국 정치의 가장 큰 적폐가 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극우와 리버럴이 멀쩡한 우파와 좌파 행세로 공생하며 다수 인민의 삶을 아작내온 것보다 더 심각한 적폐가 있는가. 적폐를 청산하자면야 새누리뿐 아니라 민주도 함께 청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문재인이 되든 안철수가 되든 크게 다를 거라 확신할 근거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누가 되든 상당히 나쁜 정치가 펼쳐질 거라는 것이다. 그러니 현시점에서 할 일은 그 정치꾼들의 이전투구에 더는 동원되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단단한 견제력을 키울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주권자의 책무다.
2017/04/10 09:14
박근혜가 구속된 날 친구가 '문재인이 사면하는 시나리오로 가는군' 하기에 '안철수가 사면하게 될지도' 라고 대꾸했다. 다 떠나서 문재인과 그 지지자들 하는 걸 보면 그리 되기 십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빨리 달라진 상황에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역시 한심하기만 하다. 현재 상황에 대한 냉정하고 성찰적인 분석은 없고 오로지 남의 탓에 음모론이다. 이를테면 그쪽에선 비교적 멀쩡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황교익 같은 이조차 그렇다. 전적으로 언론의 작품이고 심지어 한겨레가 안철수 편이라니. 리버럴 신문 한겨레에 매우 비판적인 내가 들어도 황당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대중이 아무런 자기 판단 능력 없다는 폭언이다. 실제로 황 씨는 '국민 수준'이라는 언사까지 사용하는데, 촛불을 든 국민과 대선에 임하는 국민은 다른 국민인가. 사람이란 어려울 때 바닥이 드러나는 법이긴 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가 여론에 도움이 될지 부정적일지 계산조차 못한다는 것은 깊은 실망을 준다. 최악의 선거운동은 지지자들끼리 카타르시스를 선거운동이라 믿는 것이다. 선거운동은 아직 지지자를 정하지 않은 사람, 심지어 다른 후보 지지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2017/04/08 09:45
뇌과학자들은 인간 두뇌의 최고 단계를 자기객관화 능력이라고 하던데, 깊이 동감한다. 성인이 된다는 건 결국 자기 객관화 능력을 키우는 일이고, 자기객관화 능력이 높을수록 성숙한 인간이다. 사회는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어지간히 자기객관화를 할줄 아는 인간들에 의해 유지되거나 개선되어간다. 아예 자기객관화가 안되는 인간은 그 자체로 흉기가 된다. 어제 말한 우병우를 비롯하여 김우중, 전두환, 김기춘 등 근래 쏟아져 나오는 '역사의 피해자들'은 그 쉬운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정치와 경제를 주무르는 아저씨들에게만 해당하진 않는다. 제 욕망과 성취감, 혹은 재미와 호기심을 쫓느라 누군가의 삶을 갉아먹는 인간은 도처에 있다. 사실 대개의 우리는 조금씩은 그렇다.
2017/04/07 17:35
우병우 같은 사람을 보며 최고로 좋은 머리를 갖고 저런 짓을 하는가 개탄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머리란 고작 그런 건가. 인간의 머리가 여느 동물과 다르게 취급되는 이유는 단지 기능적으로 나아서인가. 사유하고 성찰하기 때문이다. 우병우 같은 사람이 한 짓을 보면, 그러고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걸 보면 오히려 최고로 나쁜 머리가 아닌가.
2017/04/05 12:06
홍준표의 언행을 두고 인격 운운하는 건 영 적절치 않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인격의 범주'라는 게 있는 것 아닌가. 그 자의 언행은 그걸 넘어선 지 오래다. 홍준표는 나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전문가의 치료가 시급한 환자일 뿐이다.
2017/04/04 16:35
(이른바 정권교체, 즉 자유주의 세력의 재집권이 확실시된다는 시점에서 적어본다.)
근래 민주주의는 대략 두가지 차원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전자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민주화' 문제고, 후자는 ‘자본주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87년을 기점으로 전자가 진전되어 왔지만 97년을 기점으로 후자의 문제가 오히려 악화되어 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자살하는 한국인들이 '못살겠는' 이유로 꼽는 문제들은 대개 후자와 관련되어 있다. 빈부격차, 부의 세습과 신분사회화(갑질), 비정규 불안정 노동, 청년 실업, 경쟁교육, 물신주의 등등. 그에 반해 한국의 진보 시민들이 가장 긴급하고 진지하게 분노하고 행동하는 사회 문제들은 대개 전자에 집중된다.
이 희한한 상황이 오늘 한국 사회가 옴짝달싹 못하는(외신에서 '한국사회는 몇백만명이 광장에 모이는데 왜 달라지지 않을까' 질문하는) 주요한 이유다. 물론 이런 상황은 인민들이 후자의 문제를 덮고 전자의 문제에 집중하면 할수록 제 기득권과 헤게모니가 강화하는 자유주의 세력의 작품이다. 그런데 과연 진보적 시민들은 자유주의 세력의 음모에 속아 넘어간 건가? 지난 20여년 동안 나를 포함한 좌파들은 그런 전제의 논의를 이어왔다. 이른바 '가짜 진보' 논의들이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다면 사실관계를 다시 봐야 한다는 뜻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진보시민들은 속아넘어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속아주고 있거나 속을 필요를 갖는다. 스스로 속아주는 건 현실과 대면을 피해야하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을 넘어 연대하며 사회의 전망을 고민하고 변혁해나가는 게 도무지 두렵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줄창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에만 열정을 다한다. 설사 사회경제적 주제에 관심을 갖더라도 자본주의 자체나 계급문제는 마치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 도려낸다. 속아줄 필요가 있다는 건 진보시민들이 중간계급으로서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보수적 경향이 이미 속성화되었기 때문이다.(오늘 사회를 1:99가 아니라 1:9:90으로 봐야 하는 건 그래서다.)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한국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에의 열정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은폐하고 퇴행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알려준다. 진보시민들의 기만성과 보수성이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실제적인 수구 에너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진보시민의 전부인 양 주장하는 건 과하다. 사회는 일면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미덕과 기여 또한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러나 그걸 빌미로 더 이상 덮고넘어가선 안된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전망을 말하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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