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에 해당되는 글 31건

  1. 2016/11/30 대권?
  2. 2016/11/29 흔들림 없이
  3. 2016/11/29 홍석현 대통령?
  4. 2016/11/28 언론인가 브로커인가
  5. 2016/11/28 엽서
  6. 2016/11/27 PC
  7. 2016/11/27 현장
  8. 2016/11/23 SF 동호회
  9. 2016/11/22 시위
  10. 2016/11/22 혁명학교
  11. 2016/11/17 사이비 정치공학 2
  12. 2016/11/17 놀이터의 비극
  13. 2016/11/16 국정 혼란?
  14. 2016/11/16 사이비 정치공학
  15. 2016/11/15 민주당은 잘못이 없다
  16. 2016/11/14 자가 집행
  17. 2016/11/14 폭력 강박
  18. 2016/11/13 전제
  19. 2016/11/13 비폭력
  20. 2016/11/13 백만명의 위협
2016/11/30 11:26
대권(大權)이라는 말 자체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대권 후보가 누구고 어떻고 하는 식의 '아재식 정치 평론'엔 아무 관심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사회 구조에 관심이 있을 뿐이며, 그 구조 속에서 인물 간의 차이는 실제론 크지 않다고 본다. 뒤집어 말하면, 인물 간의 차이가 실제보다 훨씬 커 보이는 것이야말로 현대 대중정치를 지탱하는 중요한 현혹이라 생각한다. 그 최근 대표적 사례는 역시 오바마다.

(여하튼 그렇다보니, 홍석현이 대통령하려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고도 영 찜찜하다. 말미에 '현실의 큰 얼개를 보려고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라고 적었음을 기억해주시길.)
2016/11/30 11:26 2016/11/30 11:26
2016/11/29 16:06
정상 범주 언저리의 인간이 저런 소릴 했다면 다들 뒷목 잡고 쓰러져야겠지만, 박근혜 아닌가. 박근혜가 어떤 인간인가. 그 입에서 '임기 단축'이라는 표현이 나왔다는 건 거의 다 왔다는,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넘어간다는 뜻이다. 박근혜와 여야 정치권이 뒷구멍으로 야합하지 못하도록, 언론과 전문가를 가장한 정치브로커들이 잔꾀 부리지 못하도록, 검찰이 행여 딴짓 못하도록, 흔들림 없이 밀어붙여야 한다.
2016/11/29 16:06 2016/11/29 16:06
2016/11/29 01:27
얼마 전 칼럼 <매트릭스>에서 적었듯, 손석희 뉴스는 지배계급 내 혁신그룹을 대변하는 홍석현이 최선의 상품이자 헤게모니 전략으로 만든 것이었고, 최순실 사태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권석천의 보도국장 임명은 그 흐름을 잇는 자연스러운 조처이며, 그것은 또한 김진 같은 꼴극우는 제거된다는 이야기다. 방금 김진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정도 매끄러운 진행이라면, 홍석현은 방가네로부터 밤의 대통령 자리를 넘겨받는 걸 넘어 아예 대통령을 해보려는 중이라 할 수 있다. 알다시피 그는 반기문에 앞서 유엔 사무총장을 해보려 애썼던 사람이다. 현실의 큰 얼개를 보려고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2016/11/29 01:27 2016/11/29 01:27
2016/11/28 23:21
이런 식이라면 노동 현장에 위장 취업하거나 투옥된 이력이 없는 경우를 찾기 어려운 386 정치인과 자유주의 세력은 모두 존경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한때 인권/노동 변호사였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이 비판받는 건 바로 그런 이력 때문에 특별한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람들을 철저히 배신했기 때문이었다. 반노동적 정책으로 일관했고 특히 비정규직 본격화로 오늘 헬조선의 문을 열어젖힌 게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인민들이 오죽 질렸으면 이명박 같은 사기꾼이 5백만 표차로 당선되었겠는가. 박근혜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에 젖은 사람들 앞에서 진보 정론지를 자처하는 신문이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 현실에 이르게 된 원인과 과정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건가, 사실을 왜곡하고 감상에 젖게 하여 또 다른 퇴행을 만들어내는 건가. 한겨레는 언론인가 정치브로커 조직인가.

2016/11/28 23:21 2016/11/28 23:21
2016/11/28 19:17
인권 의식은 언제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 과정을 통해 나아지죠. 경로는 매우 다양합니다. 토론, 광장, 사건, 체험 등등. 고래 독자들이 보낸 이 날카롭고 사랑스러운 엽서들도 그 중 하나일 겁니다.

2016/11/28 19:17 2016/11/28 19:17
2016/11/27 14:50
DJ DOC 일을 보며 적어 본다. 성, 연령, 인종/지역, 민족 등과 관련한 차별과 혐오가 여전히 만연한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 즉 언어와 표현에서 그런 차별과 혐오를 없애려 노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면한 사회적 투쟁의 전열을 확대하고 조직을 보위하는 등을 빌미로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회피하거나 은폐하는 태도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그런 근시안적  태도가 결국 그 대의를 무너트리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은 사회 문화적 기회와 혜택으로 대중보다 앞선 상태에 있는 인텔리들이 제 문화적 취향이나 특성을 '선병질적'적으로 드러내거나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며, 기득권을 형성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중과 교감하고 함께 노력하며 언어와 표현뿐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대중과 사이에 문화적 장벽을 치고 검문 검색을 벌이는 형국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미국 대선에서 막말 선수 트럼프의 승리는 상당 부분 미국 리버럴이 만들어온 정치적 올바름의 장벽에 대한 누적된 반발심에 기인하기도 했다.
2016/11/27 14:50 2016/11/27 14:50
2016/11/27 13:19
로버트 카파는 '사진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 인생이란 현장을 온전히 감각하는 일은 오로지 현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거듭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위나 집회, 이런저런 투쟁 같은 사회적 현장에서부터 지인의 고통이나 불행, 스포츠 경기나 심지어 한가로운 관광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적어도 사회적 현장이라면, 현장을 감각하는 일보다 중요한 건 현장을 사유하는 일이다. 사회적 현장 역시, 현장을 감각하는 일은 현장을 사유하는 일에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치명적 장애가 되기도 한다. 감각과 사유엔 온도 차이가 존재하며 사회적 현장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종종 나도 모르게 '사유를 녹여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리고 사회에 현장은 굳이 왜 필요한가. 현장에서 뜨거웠을수록 현장에 대해 차갑게 사유해야 한다.
2016/11/27 13:19 2016/11/27 13:19
2016/11/23 10:28
"비아그라는 자본주의와 문명의 미래를 탐구하기 위해 청와대 직원들이 매년 인도 라다크 여행을 다녀오면서 고산증을 극복하기 위해 복용한 것입니다."

급기야 웃음마저 선사하는 청와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우습지만, 설사 사실이어도 우습긴 매한가지다. 21세기에 조선 궁중비사를 구현해낸 박근혜와 그 시종들이 '자본주의와 문명의 미래를 탐구'했다니. SF 동호회인가. ㅎㅎ
2016/11/23 10:28 2016/11/23 10:28
2016/11/22 14:30
모든 시위가 아이와 함께 촛불 행진을 하고 문화제를 여는 것으로 충분히 사회와 소통하고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시위의 방식이나 형식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게 아니다. 시위의 목적과 의제, 대중의 호응과 참여도, 체제와 공권력의 대응 수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규정되고 만들어진다. '폭력적이지 않기 어려운' 시위도 있는 것이다.

*

시위의 방식이나 형식과 관련한 다양한 견해와 토론, 논란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풍경이다. 어수선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없다. 다만 함께 기억할 것은 시위는 단지 인원의 결집이 아니라 인격의 결집이라는 것. 시위엔 분노와 희열뿐 아니라 자의식과 고뇌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



2016/11/22 14:30 2016/11/22 14:30
2016/11/22 14:27
오늘 시위가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장면들의 한 주인공은 10대들이다. 그들은 이번 시위에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하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급진적인 성인들도 꺼렸을 단어를 그들은 거리낌없이 내걸었고, 이 싸움이 박근혜 퇴진을 넘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임을 환기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감동할 것 하나를 빠트린 듯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걸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가 가르친 건 이 고약한 자본 체제에서 나만 살아남는 법이었고, 그들의 미래를 위한 최선이라 믿었다. 그런데 혁명이라니, 세상에. 나는 잠시 어쭙잖은 감회에 젖는다.

15년 전 어느 날, 불현듯 나는 한국의 아이들이 전에 없던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했다. 동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사라졌다는 것과 함께 늘 이어오던 중요한 가르침이 일제히 중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만 공부만 잘한다고 훌륭한 사람 되는 건 아니다.’ ‘돈 많이 벌면 좋지. 하지만 사람이 돈만 알면 죄 받는 법이란다.’ 상하좌우를 막론하고 제정신을 가진 어른이라면 으레 아이에게 거듭하던 가르침이었다. 한국 교육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에 관한 일이 되면서 가르침은 사라졌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물리치기 어려웠고, 어린이 책 출판과는 전혀 무관하던 나는 ‘고래가그랬어’를 만들게 되었다.

2014년 ‘고그’(아이들은 ‘고래가그랬어’를 이렇게 부른다)의 지면 개편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고그는 ‘어린이 교양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아이들에게 직접 강의하는 방식의 콘텐츠는 지양해왔다. 학과 공부에 짓눌린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공부거리를 만들어줄 게 아니라, 함께 놀며 느끼는 동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이 원칙을 재고하게 했다. 동료들과 나는 ‘그들은 왜 가만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즈음 방한한 놀이터 연구가 귄터 벨치히는 우리에게 ‘독일 학생들이라면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고, 대부분 생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의 실종이 아이들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긴급한 현실에서 고그의 원칙은 지나치게 낭만적이었다. 아이들에게 조기 교육을 해야 할 건 영어도 수학도 아닌 민주주의였다. 사회, 경제, 역사, 과학, 생태 등 전문가들의 흔쾌한 참여로 ‘아삭아삭 민주주의 학교’라는 이름의 지면 강의 섹션이 생겨났다.

옛 혁명가들이 파업을 ‘노동자의 정치학교’라 일컬었듯, 시위는 ‘시민의 민주주의 학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순간 전국 도처의 공간에서 각양각색의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자치적 민주주의 학교를 목격한다. 이번 시위는 고질적인 진영 논리를 넘어서 합리적 성향의 보수 시민들까지 참여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 시민들의 일반적 의식 수준과는 워낙 동떨어진 1970년대의 망령이 부활한 사건이다 보니 생긴 역설적 현상이다. 덕분에 시위는 왕의 목을 잘라본 경험이 없고, 스스로 공화정을 만들지 못한 탓에 살아남아 내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근대적 병증들을 치유하는 학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 시위가 갖는 또 하나 각별한 의미는 ‘아이들이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태어나 거의 처음으로 무기력한 각자도생의 태도를 벗어난 어른들을, 나와 내 새끼를 넘어 ‘사회’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며 함께 싸우는 어른들을 보고 있다. 시민의 민주주의 학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민주주의 학교가 되고 있다. 이 귀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좀 더 긴장하고 좀 더 성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전향적 태도 변화를, 교육을 아이가 ‘얼마짜리가 되는가’에 관한 일에서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 관한 일로 바로잡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이 시위에서 갖는 자부와 희열만큼이나, 이 시위가 배제한 시위와 배제된 사람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주요한 노동 의제를 가진 시위에 우리는 얼마나 연대하고 참여했던가. 우리는 단지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은 게 아니라, 대다수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싸움을 외면해왔다. 우리는 시위의 방식을 누구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가장 간절하게 평화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은 까마득한 고공이나 길바닥에서 몇달 몇년을 먹고 자며 싸워야만 하는 사람들과, ‘폭력적’이라 손가락질받으면서도 공권력과 격렬히 충돌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왔다. 10대들은 이미 ‘비폭력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시위는 시민의 민주주의 학교이자 아이들의 민주주의 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학교는 시위의 시간을 넘어 지속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학교는 상당 기간 사회와 사회 성원의 가장 중요한 일이자 사명이어야 한다. 민주주의 학교는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아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힘과 지혜를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민주주의 학교는 가급적 평화로워야 한다. 그러나 평화의 진열이 민주주의 학교의 목적은 아니다. 민주주의 학교의 목적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 혁명이어야 한다. (혁명은 안단테로)
2016/11/22 14:27 2016/11/22 14:27
2016/11/17 18:53
퇴진을 위한 구체적 방법은 물론 다양할 수 있고 토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방법이 상황을 결정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의 분노와 참여 수준이 상황을 일차 결정하며, 방법은 그에 따라 규정되거나 견인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광장에 나온 사람이 백만이 아니라 아주 적었다면 방법이고 뭐고 이야기나 되었을까. 사이비 정치공학은 그 사실을 속인다. 방법이 상황을 결정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여 분노와 참여의 에너지를 빼낸다. 격동의 시기란 평소 전문가로 행세하던 정치 브로커들의 정체가 폭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2016/11/17 18:53 2016/11/17 18:53
2016/11/17 13:50
어린이 관련한 사업은 여느 사업에 비해 뭔가 맑고 아름다운 구석이 있을 거라 여겨지고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오히려 더 교활한 자본의 책략과 공세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놀이터 비평가 편해문이 이 문제에 깊이 고민하기 시작한 건 꽤 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글을 공개적인 지면에 쓰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가 속한 업계의 일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혹은 제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이 없는 정치/사회 문제만 열심히 말하는 것)은 이른바 한국 진보 남성들의 고유한 특징이자 묵계다. 그래서 더 귀한 글.




2016/11/17 13:50 2016/11/17 13:50
2016/11/16 16:11
'대통령이 물러나면 국정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소리를 협박이랍시고 하다니. 이런 어이없는 놈들이 있나. 우리가 원하는 게 바로 혼란이야. 안정은 너희가 원하는 거고.
2016/11/16 16:11 2016/11/16 16:11
2016/11/16 15:11
사퇴(하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느니 탄핵은 임기를 다 채운다느니 결국 거부된다느니 따위 이유를 들며 결국 정치권(양당 체제) 안에서 타협이 최선책이라는 이야기가 유포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법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듯하지만, 실은 오늘과 같은 격동의 상황에선 어김없이 나오는 전형적인 사이비 정치공학이다. 그런 이야기의 목적은 오로지, 대중의 분노와 체제에 대한 근본적 질문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순치시키는 데 있다. 박근혜 퇴진은 하나가 아니다. 박근혜로 상징되는 기존 체제의 전면적 개혁일 수도 있고, 박근혜만 빠진 기존 체제의 온존일 수도 있다. 사이비 정치공학은 바로 후자에 봉사한다.
2016/11/16 15:11 2016/11/16 15:11
2016/11/15 09:40
민주당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들에게 그들이 할 수 없는 걸 기대하고 실망하길 무한반복하는 사람들이 잘못일 뿐. 민주당은 기회주의적 정당이 아니다. 민주당은 단 한번도 흐트러짐 없이 보수 정당이자 지배체제의 한 분파로서 정체성과 행보를 보여왔다. 그들에게 진보 정치를 기대하고 인민의 편에 설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기회주의적일 뿐.
2016/11/15 09:40 2016/11/15 09:40
2016/11/14 17:29
본디 '과격/폭력 시위'라는 말은 지배체제가 저항 세력과 대중을 갈라놓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 선전 선동술 중 하나다. 저항 세력 내에선 '상황에 부적절한 시위 전술'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과격/폭력 시위'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는다.(말이 되는가?) 과거에 이 선전 선동술은 전적으로 지배체제의 기구들(경찰, 언론 등)을 통해 집행되고 잘 먹혔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민의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좀더 교활한 방식이 필요하다. '내면화' 작업이 진행된다. 어느덧 '과격/폭력 시위'라는 선전선동술은 '시민의 교양'이나 '정치적 올바름'의 이름으로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스스로에 의해 '자가 집행'된다. 광장에서 무시로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이라면 그게 정말 내 말인지 되새겨보길 권한다. 박근혜는 단순할지 몰라도 지배체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보다 수가 높으니 우리가 이꼴로 사는 것 아닌가.
2016/11/14 17:29 2016/11/14 17:29
2016/11/14 16:15
대체 누가 폭력시위를 주장하는가? 현재 비폭력시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있어도 폭력시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가령 아이들까지 함께 한 광화문 광장에서 돌과 쇠파이프를 들고 싸우자는 또라이가 단 한명이라도 있던가? 비폭력시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일각에서 나타난 '폭력에 대한 강박적 태도'와 '자기 검열' 현상을 비판하거나, 그 현상의 원인을 '체제 이데올로기의 내면화' 맥락에서 살펴보려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두고 생뚱맞게도 '폭력 시위를 주장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폭력에 대한 강박적 태도'가 꽤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2016/11/14 16:15 2016/11/14 16:15
2016/11/13 21:45
내 의견과 다르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만났을 때, 그에 대한 기분을 표현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해야 한다. 내 의견에 오류나 결핍이 있다는 전제는, 의견을 내는 행위에 수반되는 매너가 아니라 의견을 내는 행위의 일부다.
2016/11/13 21:45 2016/11/13 21:45
2016/11/13 14:18
'예수나 간디, 킹 같은 비폭력주의자들은 왜 모두 폭력에 희생되었을까. 폭력의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비폭력주의는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제 세끼가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 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폭력의 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이 점잖은 얼굴로 '저항으로서 폭력도 폭력이다'라고 뇌까리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며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폭력보다 더 끔찍한 폭력이 된다. 비폭력주의의 목표는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전)
2016/11/13 14:18 2016/11/13 14:18
2016/11/13 10:06
백만명이 시위를 했는데 거의 완벽한 비폭력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지만, 백만명이 모종의 강력한 자기억압 상태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물론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면서 일어날 무질서와 혼돈에 대한 보수적 두려움과 관련이 있고, 이번 시위의 성격과 정체성에 대해선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든간에 시위는 시위여야 한다. 시위는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위협'이다. 그런데 박근혜 퇴진 시위에 참여한 백만명 중 청와대를 향하다 경찰과 대치한 건 0.5퍼센트이고, 경찰 차벽에 오른 사람에게 '내려와!'를 연호하며, 경찰이 권고하는 시위 태도를 벗어나면 '프락치'라는 비난이 오가는 순치된 시위는 과연 '백만명의 위협'을 만들어냈을까. 오히려 '백만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위협'을 구현해낸 게 아닐까.
2016/11/13 10:06 2016/11/13 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