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6/10/31 매트릭스
  2. 2016/10/23 블랙리스트
  3. 2016/10/22 정의
  4. 2016/10/22 사과
  5. 2016/10/22 폭로
  6. 2016/10/21 분노와 변화
  7. 2016/10/16 SG
  8. 2016/10/14 다를 바 없다
  9. 2016/10/14 시인
  10. 2016/10/12 휘파람
  11. 2016/10/12 범주
  12. 2016/10/06 악귀들
  13. 2016/10/04 목숨
  14. 2016/10/02 진지한 단식
  15. 2016/10/02 괴물
2016/10/31 21:11
역사든 현실이든 음모론이나 궁중비화식 서술은 해악이 있다. 극소수 엘리트 영역을 위주로,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인 심리와 윤리 차원으로 상황을 단순화함으로써 대다수 인민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의 총체성을 소거하기 때문이다. 최순실 사태는 음모론과 궁중비화식 서술에 대한 그런 일반적 판단을 무색하게 한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악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이 사태는 박근혜나 최순실 따위 지극히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행태가 될수록 안전하다. 이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이 입에 올리는 ‘국정농단’이라는 말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국정을 농단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하여 그 결과가 정반대의 가치로, 친노동자·서민적 정책으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정체가 드러난 최순실은 ‘의적’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국정 운영의 합리성보다 중요한 건 사회에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어떤 계급의 이해에 기여하는가다.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지배계급은 온 나라가 한목소리로 ‘국정농단’을 외치도록 함으로써, 자신들도 똑같은 피해자가 되어 상황을 빠져나간다.

분노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고, 퇴진 여부와 관련 없이 박근혜가 기존의 권력을 회복하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에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박근혜의 무력화는 지배계급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지배계급이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변혁적 사회 변화는 사회적 분노가 다른 세상의 전망과 결합할 때 만들어진다. 분노는 내 밖의 것들에 대한 반응이지만, 전망은 내 안에서 진행하는 엄격한 지적 활동이다. 분노와 전망의 결합이야말로 공화국 시민의 요건이자 표징이다.

이번 사태로 분노는 혁명 전야 수준까지 올랐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쇠락을 비롯해 이미 미약해질 대로 미약해진 다른 세상의 전망이 그에 걸맞게 저절로 생겨난 건 아니다. 전망이 ‘박근혜 없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배계급은 이 소란 속에서도 ‘선수 교체’만으로 모든 걸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지배계급의 2중대인 민주당도 당장은 욕을 먹고 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정권 교체’의 깃발 아래 다들 돌아올 거라 확신한다.

다른 세상의 전망에는 여러 차원과 갈래가 있다. 학자나 이론가의 역할도 있고 활동가의 실천도 있다. 그걸 기반으로 인민의 보편적 사회의식과 식견이 형성되고, 도달 가능한 사회의 수준과 상이 도출된다.그러나 그 모든 것의 전제는 지금 현실의 구조와 본질을 정확하게 보는 일이다. 그게 없다면 전망이나 대안은 초점을 잃고 해소되거나 기존 체제의 존속에 봉사하게 된다. 분노의 양은 부차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손석희 뉴스를 어떻게 보는가’는 의미 있는 질문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지배계급의 핵심 중 하나인 홍석현 그룹은 왜 사실 왜곡과 극우적 선전 선동이라는 기존 우파 언론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자그마치 한국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뉴스’를 만들었는가. 여기에 대해선 좀 더 자세하고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흔히 ‘수구 꼴통’이라 통칭되는 지배계급이 그 내부로부터 매우 빠르게 혁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혁신 그룹은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기존의 방식이 인민의 진전된 시민의식과 이념 성향으로 볼 때 한계에 봉착했음을 간파하고, 영리하게도 손석희라는 신망 높은 중도 우파 언론인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런 선택이 종편 사업의 사업적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일뿐더러, 지배계급의 습속에 어색할 뿐 지배계급의 이해를 거스르진 않는다는 걸 안다. 손석희씨 또한 독립적 권한을 가지고 소신대로 뉴스를 만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공공적 성격을 가진 방송과 상업주의적 목적의 방송(종편)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언론운동의 틀은 박살이 났다. 그리고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손석희 뉴스의 중도 우파적 양식과 매력이 보다 급진적 관점의 존재 의미를 잊게 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세련되고 교양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요컨대 손석희 뉴스의 애정어린 시청자들은 이건희 성매매 사건을 다루는 손석희에 거듭 신뢰를 보내면서, 이재용의 등기이사 선임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은 손석희를 관용하는 것이다.

손석희 뉴스는 오늘 자본의 권능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홍석현 그룹은 최선의 상업주의적인 뉴스를 기획했던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뉴스’다. 지상파 뉴스가 심각하게 반동화한 상태에서 손석희 뉴스의 미덕과 유익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전면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관점과 통찰을 잃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의 분노에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배계급은 이제 맞춤식으로, 한편으로 극우적 선동으로 한편으로 정의와 공정성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지도하며 다음 세상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매트릭스의 어디쯤에 있으며,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까.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6/10/31 21:11 2016/10/31 21:11
2016/10/23 18:11
연이은 문화예술계 성폭력 폭로의 공통점은 폭로자가 그 분야에서 갓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가 공공연한 그러나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현실을 바꾸고 있다. 우려스러운 건, 그들이 오히려 제 분야에서 암묵적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은 다들 격정적이지만 열기가 식고 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선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적어도 침묵으로 방조해선 안된다.
2016/10/23 18:11 2016/10/23 18:11
2016/10/22 19:03
나는 궁금하다. 사회가 도무지 정의로워질 기미가 안 보이는 까닭은 정의를 밥 말아먹은 인간들이 많기 때문일까, 쉽게 정의로워지려는 인간들이 많기 때문일까.
2016/10/22 19:03 2016/10/22 19:03
2016/10/22 19:02
전에 한 인터뷰에서 체벌을 사랑의 매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기에 "사랑하면 때리지 말아야죠."라고 답한 기억이 난다. 요즘엔 이 말이 하고 싶다. '미안하면 사과해야지.' 이놈의 사회엔 흔쾌히 정당하게 사과부터 할 줄 아는 인간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사적인 차원이든 공적인 차원이든.
2016/10/22 19:02 2016/10/22 19:02
2016/10/22 18:08
폭로는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다.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일부 사실일 수도 있다. 폭로는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사실일 가능성을 알려준다.
2016/10/22 18:08 2016/10/22 18:08
2016/10/21 16:34
"돈도 실력이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말은 사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이른바 ‘수저론’과 내용이 다르지 않다. 수저론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 말에 분노하는 이유는 뭘까. 같은 말도 누가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만일 다른 게 그것뿐이라면, 분노는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말의 태도가 아니라 말의 내용 자체가 달라야 한다. 현실을 기쁘게 수용하는가, 불편하게 수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수용하는가, 거부하는가(현실을 변화시킬 의지가 있는가)의 문제여야 한다.
2016/10/21 16:34 2016/10/21 16:34
2016/10/16 14:24
아들이 제 선생님이 쓰던 깁슨 SG를 인수했다. 악기를 바꾸면 아무래도 적응 기간이 필요한 법인데 오래 쓰던 것처럼 잘 맞는단다. 소리도 매우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흐뭇해서 SG를 쓰는 기타리스트들을 유튜브에서 찾아본다. 블랙 사바스의 토니 아이오미, AC/DC의 앵거스 영, 블루스의 젊은 대가 데렉 트럭스 등. 그러나 역시 SG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앵거스 영 아닐까. 그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어릴 적부터 SG를 좋아한 이유가 '악마(의 뿔)처럼 생겨서'라고 말했다. 아들, 악마와의 만남을 축하한다.ㅎ
2016/10/16 14:24 2016/10/16 14:24
2016/10/14 09:51
문학과 대중음악? 그런 구분은 '업자들'에게나 줘버리길. 좋은 문학과 좋은 대중음악은 아무 다를 바 없고, 쓰레기 문학과 쓰레기 대중음악 역시 아무 다를 바 없다.
2016/10/14 09:51 2016/10/14 09:51
2016/10/14 09:31
밥 딜런은 훌륭한 시인 맞는데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왜 이상한 일일까? 그가 제 시에 음악을 붙였기 때문에? 더욱 상찬되어야 할 일이지 빌미 삼아 깎아내릴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 유구한 역사로 보더라도 시는 본디 단지 읽는 게 아니라 노래하는 것이다.
2016/10/14 09:31 2016/10/14 09:31
2016/10/12 10:56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1976)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어느 날 이탈리아 농촌 마을에서 각각 소작농과 지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올모(제라르 드파르디외)와 알베르토(로버트 드 니로)의 우정과 일생을 그린 영화다. 5시간이 넘는 영화지만 장면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두 배우가 출연했다는 건 기억했지만 그마저도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저렇게 생겼었구나’ 싶었다. 덕분에 마치 처음 본 영화처럼 영화 속 현실을 오늘 현실에 비추어가며 볼 순 있었다.

영화의 끝 무렵, 1945년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에게서 해방되고 지주 알베르토는 소작농들에게 체포되어 둘러싸인다. 올모는 말한다. “우리가 너를 비난하고 과거가 너를 비난하고 있어. 이제 지주는 없어. 지주는 죽은 자야.” 무력한 얼굴로 “난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 읊조리는 알베르토에게 소작농들이 다가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라면 난 죽은 사람을 보는 거네.” “이 친구 살아 있어, 몸이 뜨거워. 시체는 차가워지는 법인데.”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에겐 그가 죽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소작농들은 마치 노래하듯 목숨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알베르토를 굳이 죽이지 않음으로써 실은 이미 죽은 사람임을 내내 진열하기로 한다.

우연치곤 묘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던 것이다. “목숨이란 무엇인가?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었지만 목숨은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몸은 죽은 지 수백수천 년이지만 여전히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며 행동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농민 백남기는 살았고 의사 백선하는 죽었다. 백선하는 실은 자신의 사망 진단을 했다.”

신약성서 복음서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목숨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복음(하느님나라 운동)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목숨이 있음을 말한다. 예수는 육체의 목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정성으로 대하며 치유하곤 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육체의 목숨과 그에 관련한 삶의 가치들이 전부인 양 집착할 때 사람은 진정한 목숨을 잃는다. 예수의 부활 사건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예수의 부활이 단지 예수의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사건이라면, 뿔뿔이 도망쳐 예수와 관계마저 부인하던 제자들이 갑자기 돌아서서 죽음을 두려워 않고 에수의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죽은 육체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건, 단지 육체가 사흘 동안 노화를 멈추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가 말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는 사건이었다.

<1900년>에서 소작농들은 제 노동으로 평생 지주만 배 불리는 일이 하늘이 정한 운명이 아님을 깨닫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불의한 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일이 아니다. 목숨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물론 그들은 충분히 단련된 투사나 지사가 아니기에 늘 용감하기만 할 순 없다. 파시스트 패거리가 그들 중 한 사람을 보란 듯 린치할 때 그들은 두려움에 움츠러든다. 보다 못한 그들 중 하나가 피해자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가다 총에 맞고 쓰러진다. 한 여성이 제 가슴을 풀어헤치며 항의하다 역시 쓰러진다. “총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친 사람이 쓰러지고, 누군가가 그들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한다. 차례로 총을 맞고 쓰러지지만 휘파람은 멈추지 않는다.

목숨을 그렇게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제 신념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정연한 성명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고작 휘파람을 불다 죽어가는 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휘파람은 ‘나는 살아 있다’는 확인이자 ‘너희는 이미 죽었다’는 선언이다. 그들은 그렇게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목숨을 얻는다.

2016년 한국의 백남기도 그렇다.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이름을 전에 들어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담긴 저작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결코 유명 인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단지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로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존경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

목숨의 의미를 잊지 않는다고 해서 다 성인(聖人)이 되는 건 아니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되거나 당장 육체의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사람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존경과 추모의 대상으로 삼아 내 삶으로부터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내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이 ‘세상이 다 그러 거지’ ‘현실이 어쩔 수 없지’ 할 때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세상을 바꿔내야지’ 마음먹는 것이다. 수많은 살아 있는 시체들 속에서, 내가 정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2016/10/12 10:56 2016/10/12 10:56
2016/10/12 10:51
삼성을 다니는 일이 제 철학이나 세계관과 맞지 않아 괴롭다,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말은 늘 같았다. '그만 두면 되지.' 대화는 대부분 그걸로 충분하다. 그는 실은 이런 말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을 다님으로써 얻는 이런저런 유익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삼성에 최소한의 비판 의식도 없는 여느 삼성 직원과는 다른 사람이다.' 이른바 시스템에 대한 우리의 불만, 비판, 심지어 저항의 상당 부분은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2016/10/12 10:51 2016/10/12 10:51
2016/10/06 09:33
의견이나 이념이 달라도 존중해야 한다. 격렬히 비판하거나 심지어 적대해도 최소한의 인간적 존중심은 잃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우리는 같은 인간이며 우리 중에 누구도 언제나 옳거나 완벽하진 않다. 그러나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인간, 김진태나 윤서인 같은 놈들을 존중할 이유는 없다. 그들을 짐승에 빗대 말하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다. 짐승은 인간의 도리는 몰라도 자연의 도리는 안다. 그들은 인간도 짐승도 아니다. 악귀, 그저 퇴치되어야 할 악귀다.
2016/10/06 09:33 2016/10/06 09:33
2016/10/04 10:35
목숨이란 무엇인가?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었지만 목숨은 생생히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몸은 죽은 지 수백 수천년이지만 여전히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며 행동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농민 백남기는 살았고 의사 백선하는 죽었다. 백선하는 실은 자신의 사망 진단을 했다.
2016/10/04 10:35 2016/10/04 10:35
2016/10/02 11:16
평소 한국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친구가 이정현 단식이야기를 꺼낸다. 정치적 단식은 권력에 저항하는 약자의 권리인데, 이정현은 권력의 핵심이니 이런 황당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이어 말하길 그냥 계속 하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맞다. 이정현이 제 단식의 진지함을 인정받을 유일한 방법이다.
2016/10/02 11:16 2016/10/02 11:16
2016/10/02 09:11
고인의 삶을 가급적 느리고 정중하게 되새기는 일. 피아도 이해관계도 좌우 상하도 함께 정지하는 장엄의 시간. 추모를 훼방하는 것보다 더 악랄한 인간에 대한 모독은 없다. 그러나 모독에 항의하는 사람을 더욱 번민하게 하는 건 모독에 동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사실이다. 모독은 실은 그들 덕에 지속된다. 이 사회에 왜 갈수록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까? 그들은 스스로 이성을 거두어들이고 괴물이 되었는가? 아니라면, 그들을 그 지경으로 몰아간 구조는 무엇인가? 모독에 항의하는 사람들은 그 구조에 연루된 바 없는가?
2016/10/02 09:11 2016/10/02 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