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거지게, 혹은 조용히 반동적 역할을 수행하는 엘리트 관료 중엔 소문난 수재 출신이 많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머리는 좋은데 왜 저러고 살까' 개탄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에서 이른바 수재 여부를 판정하는 근거는 매우 협소한 일부(지능, 성적 등으로 표현되는 생물학적인 부분)일 뿐이다. 인간의 머리가 그런 부분에 그친다면 인간이 여느 동물과 구분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인간 머리의 좀더 본격적인 부분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어떤 세계를 원하는가 등으로 표현되는 지성적 부분이다. 그러니 머리는 좋은데 왜 저러고 살까, 라는 말은 거꾸로 된 것이다. 머리가 나쁘니까 그러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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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7 17:24
2016/04/27 13:15
직접 확인하지 않은 루머를 근거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전파하는 사람을 보면 경박함에 실망하게 된다. 그런데 심지어 자신이 루머의 피해자인 적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을 루머로 판단하거나, 루머의 피해자가 되고도 다른 사람을 루머로 판단했던 일을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경박함이란.
2016/04/26 13:17
‘빌어먹을, 또.’ 옥시(옥시레킷벤키저)가 사람이 죽어나간 게 자사의 가습기 소독제 때문이 아니라 봄철 황사 때문이라는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했다는 기사를 읽다가 훅 한숨이 나왔다. “김앤장의 자문을 받아”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몇해 전 일이 떠올랐다. 낯모르는 고등학교 후배 몇이 불쑥 찾아왔다. 유유상종이라, 차례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다들 주류 사회에서 행세하는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친구가 죄라도 지은 듯, 명함을 건네며 유난히 겸연쩍어했다. 김앤장 변호사였다. 어디서고 대접받는 게 습관이 되었을 텐데, 다른 생각 하는 선배 앞이라고 그러는 게 밉지 않아서 “밥벌이가 거기서 거기지 뭘 그래” 하고 말았다. 오버였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 밥벌이, 끔찍한 밥벌이가 있다.
세상이 어떤가를 아는 가장 정확한 방법 중 하나는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이 어떤 밥벌이에 몰리는가를 보는 것이다. 1980년대는 그런 청년들이 변혁운동에 투신했다. 변혁운동은 밥벌이가 아니다. 그러나 밥벌이를 작파하고 다른 가치에 투신하는 게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청년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기분이 켕기긴 하지만, 어쨌거나 80년대는 변혁의 세상이었다는 뜻이다. 근래 머리 좋은 청년들은 어떤 밥벌이에 몰리는가.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은 이미 충분히 양극화한 세상에서 1%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1%의 악행을 덮는 이런저런 밥벌이를 선호한다. 김앤장 같은 대형로펌을 비롯, 유수의 투자(투기), 유수의 금융, 유수의 컨설팅 따위 이름이 붙은 밥벌이들이다. 근래 세상은 변혁이 불가능한 세상, 1%가 완전히 틀어쥔 세상이라는 뜻이다.
2016/04/24 12:07
끔찍한 밥벌이
또 김앤장. 몇해 전 불쑥 찾아온 고등학교 후배 몇 중 하나가 명함을 주며 죄라도 지은 듯 겸연쩍어 했다. 김앤장 변호사였다. 대접받는 게 습관이 되었을 텐데, 다른 생각하는 선배 앞이라고 그러는게 밉지 않아서 '밥벌이가 거기서 거기지 뭘 그래' 하고 말았다. 오버였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 밥벌이가 있다. 가장 끔찍한 경우는 좋은 머리를 1%의 악행을 덮는 데, 이미 충분히 양극화한 세상에서 1%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데 쓰는 밥벌이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끔찍한 건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이 그런 밥벌이를 선택하고, 그런 밥벌이가 진심으로 자랑이 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6/04/20 13:45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확 변했다 역시 투표가 총보다 낫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달라진 건 없다 도처의 장기투쟁 공간들을 보라' 말한다. 뭐가 사실인가. 둘 다 사실이다. 다만 서 있는 자리가 다를 뿐이다. 서 있는 자리가 반드시 사는 자리는 아니다. 다른 사람이 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비참에서 눈을 뗄 수 없다면, 그 자리를 세계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내가 서 있는 자리다. 사는 자리와 서 있는 자리의 분리 능력은 인간이 지성적 동물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다. 사는 자리와 서 있는 자리를 스스로 되새겨보는 능력 역시.
2016/04/14 18:23
군중의 예측 못한 거대한 움직임이 있을 때, 인텔리들은 제 지적 무기력과 쓸모없는 수다스러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 움직임에 대한 강박적 논평을 늘어놓곤 한다.
2016/04/10 07:32
문재인에 대한 반복된 실망과 감동의 이유는 똑같이 '좋은 사람'이다. 정치를 하기엔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실망하고 정치는 역시 좋은 사람이 하는 거라며 감동한다. 정치인과 개인적으로 사귀려는 게 아니라면, 이념과 정책부터 살펴보는 게 상식적 태도다. 그가 어떤 사람들의 혹은 어떤 계급의 삶을 대변하는가, 그가 지향하는 사회는 무엇이며 구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 능력이 있는가 등등. 그런 면에서 문재인은 여느 민주당 정치인과 별다를 게 없는 보수 정치인의 면모를 일관되게 보여왔다. 새누리와 야합하는 이런저런 반동적 정책들에 특별히 반대하거나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 적도 없다. 실망하기엔 지나치게 평범하고 감동하기엔 근거가 부족한 정치인인 것이다. 다들 나쁜 놈들에 질릴 만큼 질렸다는 건 잘 알지만, 정치인에 대한 평가에서 정치를 빼는 감상적 태도는 한국 정치의 큰 장벽 중 하나다. 일찍이 부모 여의고 불쌍하다며 박근혜를 지지하는 노인들만 비웃을 일이 아니다.
2016/04/09 21:28
민주당(더민주) 지지자는 새누리당 지지자가 거짓말에 속아넘어갔거나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재미있는 건 새누리당 지지자도 민주당 지지자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회적 견해를 존중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이라지만, 두 당의 이념과 정책 차이가 크지 않다는 걸 고려한다면 그런 과장된 적대감은 분리지배 체제의 공고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녹색당과 노동당 지지자가 이념과 정책에서 차이에 비해 서로 상당한 존중을 보인다는 사실 또한 그걸 방증한다.
2016/04/04 22:02
신입생 정원을 못 채우는 대안학교가 꽤 늘고 있다고 한다. 고생 고생해서 대학을 나와 봐야 살기 막막한 현실이니 지금이야말로 제도학교보다 대안학교가 더 빛을 볼 때지 싶기도 한데 왜일까. 이유는 간명하다. 대안학교에 대안이 없다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안학교는 제도 학교가 제대로 된 교육을 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대안학교는 새로운 교육을, 대안적 삶의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진 못했다. 거기에 경쟁 교육 현실로 인한 부모의 불안감이 운영을 압박하면서 대안학교의 정체성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대안학교가 다 같진 않지만, 대안학교를 선택 가능한 교육상품의 하나로 보는 시류 속에서 부모들의 호감이 전보다 덜한 건 도리 없는 일인 듯하다.
대안은 언제나 기존 체제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부정은 대안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부정적 태도로만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부정적 태도를 부정이라 착각한다. 부정적 태도는 부정의 축소판이 아니라 부정의 시늉으로 기존 체제에 기생하는 것이다. 대안에 관한 또 하나의 착각은, 대안이란 밝고 진취적인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대안의 싹을 자르기 위해 유포된 오랜 편견이다. 대안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경험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마냥 밝고 진취적일 수 있겠는가. 대안 앞에서 우리는 오히려 두렵고 불안하다. 그러나 더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기에, 그 극단적 비현실성 너머로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대안과 관련한 착각과 편견들은 오늘 대안과 진보를 말하는 세력에게 만연하다. 이를테면 이 순간 거리에 나붙은 선거 플래카드를 보자. 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것들은 그 당이 이념도 정체성도 없이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부정적 태도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반면에 녹색당과 노동당, 정의당의 것을 보면 기존 체제의 부정과 나름의 대안이 보인다. 그럼에도 진보 성향 시민의 대안은 민주당이다. 승산이 있으면 승산이 있다는 이유로, 승산이 없으면 승산이 없다는 이유로 민주당이다. 민주당이 의석이 부족해서 새누리당을 견제하지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과 박근혜 정권에 부정적 태도로 기생한다는 사실은 슬그머니 감춰진다. 저희끼리 탈당과 분당, 합당 논의, 공천 갈등을 벌이는 것 빼곤 아무런 정책 이슈가 없어도 여전히 절대적 대안이다. 이쯤 되면 정치가 아니라 종교적 신앙의 단계다.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당연히 늘어만 간다. 진보 성향 시민 가운데는 야권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려워진 게 무작정 새누리를 찍는 사람들 때문에, 낮아진 민도 때문에 생긴 일인 양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은 반대로 민도가 높아져서, 민주당의 기만성을 꿰어보는 눈 밝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생긴 필연적 상황이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패악질을 말하면 그들은 ‘너희도 나을 건 없지 않은가’ 코웃음이 돌아온다. 현실 문제에선 딱히 들고나올 게 없어 늘 대신 들고나오는 옛 민주화운동 타령도 ‘고생한 거 이상으로 해먹고 있지 않은가’ 받아쳐진다. 초유의 민주주의 향연으로 극찬된 필리버스터는 ‘10개월 동안 반 협조 상태에 있다가 통과가 기정사실이 되자 벌인 싱거운 쇼’로 치부된다. 민주당이 대안이라는 건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라는 것이다.
현실과 여론의 향방은 이런데 여전히 선거를 ‘새누리: 민주당 중심의 야권’ 대결로만 보는 건 바람직한가. 새누리와 새누리에 기생하는 민주당을 하나로 묶어, ‘새누리와 민주당: 대안정치 세력’ 대결로 보는 시각도 필요하지 않을까.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 철저히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볼모가 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은 없다. 의회 정치가 짜고 치는 고스톱판을 벗어날 가능성은 대안정치 세력의 성장에 달려 있다. 설사 야권이 이기더라도 대안정치 세력이 현재 상태에 머문다면, 그게 바로 패배고 절망이다.
이번 선거에서 대안정치 세력이 새누리나 민주당에 견줄 의석을 가질 가능성은 물론 없다. 그러나 단 몇 석이 판의 균열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의석 부족이 아니라 대안 부족이다.
30여년 이어온 민주당 대안론의 숨은 목적은 진보정치 소멸이었다. 목적은 상당 수준 달성되었고 진보정치는 지리멸렬한 처지에 있다. 정의당은 진보정치 독자성보다는 민주당 중심 야권 연대 속에서 정치적 생존에 집중해야 한다. 당원이 대거 정의당으로 빠져나간 노동당은 자신을 사수하는 숙제가 엄중하다.
그런 와중에 녹색당의 행보는 이채롭다. 녹색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기본소득’이라는 정치와 경제의 두 정책 틀을 분명히 하며 대안정당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다. 청년의 관심도 높고, 평당원으로부터 올라오는 활력도 돋보인다. 지지 여부를 떠나, 녹색당은 근래 정치적 대안의 지평에서 제 걸음을 걷는 거의 유일한 정당이다.
몇해 전만 해도 ‘개량한복 입은 옛 운동권 아저씨 동아리’쯤으로나 여겨지던 녹색당이 그리 일신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그들은 기존 진보정치 세력이 엄혹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 부정적 태도에 빠져들어 갈 때, 거꾸로 부정의 첫 질문을 부여잡았던 게 아닐까.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대안과 진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품어야 할, 그러나 다들 언젠가부터 잊어버린 질문 말이다. 야권 패색이 짙은 선거를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당신이 기억할 질문이기도 하다.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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