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2'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6/02/29 다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 2016/02/09 내 생각
  3. 2016/02/09 새해 소망
  4. 2016/02/05 운동의 덕목
  5. 2016/02/04 반론
  6. 2016/02/04 386의 입
  7. 2016/02/02 더러운 여자는 없다
2016/02/29 20:49
흔히 미국은 좌파가 없는 사회, 대표적인 보수 양당제 사회라 불린다. 그러나 미국도 한때는 노동운동을 비롯, 좌파 세력이 꽤 활발했다. 유럽 같은 사민주의 사회로 진전할 여지가 있었던 셈이다. 미국 좌파는 선거에서 ‘현실적 선택’을 거듭하면서 민주당에 흡수되고 괴멸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미국, 극우적 보수와 리버럴이 바통 터치하듯 정권을 주고받으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다수의 삶에선 어느 정권이든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는 사회가 되었다. 버니 샌더스의 선전은 그 공고한 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다.

샌더스 선전은 단지 민주당 내의 이변이 아니라 보수 양당체제의 이변이다. 민주당 경선에 나섰지만, 샌더스는 이념과 정책 면에서 민주당을 뛰어넘는 좌파 정당 후보와 다름없다. 미국 보수 양당체제를 실제적으로 수호하는 건, 공화당이 아니라 좌파 정치를 흡수하는 역할을 맡은 민주당이다. 민주당 엘리트는 그 대가로 공화당 엘리트와 함께 미국 사회의 상층 계급을 형성한다.

뉴욕타임스를 애독하고 폴 크루그먼의 ‘인간적 경제학’을 신뢰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건 좀 더 상식적인 사회, 즉 그들의 집권이지 결코 계급적 변화는 아니다. 그들은 연일 샌더스의 정책들이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실은 샌더스가 가져올 수 있는 현실의 변화를 두려워한다.

700여명의 ‘슈퍼 대의원’ 대다수가 힐러리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힐러리를 압도하지 않는 한 샌더스가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데, 만일 샌더스가 지면 모든 것은 바람처럼 사라질까? 미국 민주당은 당내 정치 분파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1988년 민주당 예비 경선에서 파란을 일으킨 제시 잭슨 목사도 패배 후엔 바람처럼 사라진 사례가 있다. 그러나 샌더스 현상은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사회에 남아 리버럴을 견제하고 체제를 위협하며 다음 희망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샌더스 현상은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일련의 큰 흐름을 타고 있다. 시작은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다. 자본주의 비판이 쏟아져 나오자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고들 했다가 별 소득 없이 사그라들자 ‘미국이 그렇지 뭐’했던 점령 시위의 에너지는, 사그라든 게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숨을 고르다 대선을 통해 다시 분출되고 있다.

미국 대선의 예비 경선제는 대중의 참여도 높고 매우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대기업과 주류 미디어가 후보를 낙점하고 지배하는 구조다. 양당 모두 그렇다. 오바마는 그 구조에 영리하게 적응하며 승리했다. 그러나 샌더스는 대중의 모금과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젊은 세대의 활동으로 그걸 넘어서고 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거대하고 강력한 힘은 잠시 잠잠해질 순 있겠지만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은 작다.

또 하나는 샌더스 현상이 오바마 정권의 성공과 상호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두 번 집권하는 중간에 월가 점령 시위를 겪었으며, 그로부터 재선에 도움을 받기도 한 오바마 정권은 최선의 리버럴 정권이 갖는 미덕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샌더스 현상의 중요한 기반을 만들었다. 좀 더 상식적인 사회를 구현해 보임으로써 시민들에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에너지를 심어주었고, 역시 미국식 자본주의의 골간은 건드리지 못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만들어냈다.

샌더스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버니 샌더스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샌더스는 질문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극소수가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다수의 사회 성원들이 열심히 일해도 살기 어렵고 불안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정치를 바꿔야 한다. 기존 정치체제 안에서 상대적으로 선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체제 자체를 넘어서는 정치여야 한다.

한국의 진보 경향 시민들은 그와 반대다. 그런 변화는 당장은 불가능하니 정권교체에 집중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중은 지금 미국인들처럼 성공적 리버럴 정권을 경험한 게 아니라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남긴 상처와 거대한 반동에 젖어 있다. 청년들은 보수 엘리트 못지않은 기득권을 구가하면서도 박근혜 욕만 일삼으며 여전히 저항 세력의 표정을 짓는 진보 엘리트들에게 호감을 갖지 못한다.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끊어버리거나 보수화하는 대중이 늘어난다. 결국 정권교체에 집중할수록 정권교체가 요원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이 수렁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를 보며 민주주의를 연호하는 사람들이, 무덤덤한 대중을 계몽의 표적으로 삼는 게 아니라, 왜 내가 열광하는 민주주의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지, 그들의 삶에 다가가는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희망이 싹튼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버니 샌더스라는 인물의 영웅적 투쟁기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것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을 바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행동이며, 샌더스는 그 반영 혹은 매개일 뿐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2016/02/29 20:49 2016/02/29 20:49
2016/02/09 23:39
내 생각을 말할 때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내 생각은 실은 내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수많은 체험과 충격과 학습과 주입 따위들이 내 신체를 거쳐 흐르다 남긴 자국 혹은 상처들이다.
2016/02/09 23:39 2016/02/09 23:39
2016/02/09 23:38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2016/02/09 23:38 2016/02/09 23:38
2016/02/05 18:47
사회운동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덕목이 있다. 하나는 제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다른 하나는 제 운동이 전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다. 자부 없는 운동은 비루하고 겸손 없는 운동은 빗나간다.
2016/02/05 18:47 2016/02/05 18:47
2016/02/04 14:20
'더러운 여자는 없다'에 대한 이나영 씨의 반론을 읽었으나 재반론할 내용은 없어보인다. 사실 내 글은 '문제의 다양한 면모들을 두루 살펴야만 제대로 싸울 수 있다' '우리의 분노가 혹시 당사자를 대상화하여 우리 자신을 위로하려는 건 아닌지 함께 성찰해보자' 등 지당한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지당한 이야기가 특별한 흥분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토론이 굴절되어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2016/02/04 14:20 2016/02/04 14:20
2016/02/04 14:19
근래 청년들이 386에 갖는 반감이 386이 청년 시절 ‘입만 벌리면 옛 무용담을 늘어놓는’ 우익 아저씨에게 느끼던 반감과 전적으로 같다는 걸 아는 386은 많지 않은 듯하다. 이념과 사상을 잃은 걸 넘어 자의식마저 잃었기 때문인데. 여하튼 386은 청년들 앞에서 옛날에 현장 투신한 이야기, 빵에 갔던 이야기 따위는 아예 안 하는 게 좋다. 그런 이야기 듣는 청년은 속으로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시기에?' 한다. 가장 좋은 건 되도록 입 닥치고 청년들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2016/02/04 14:19 2016/02/04 14:19
2016/02/02 00:40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1914~1991) 할머니다. 배 할머니는 김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전쟁터에서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 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다없는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런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한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경향신문)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parkyuha.org/)
2016/02/02 00:40 2016/02/02 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