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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2 비록 우리 삶이 코미디라 할지라도
- 2015/12/20 야비한 사람들
- 2015/12/17 괴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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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0 혁신은 누가 해야 할 일인가
2015/12/29 23:23
2015/12/25 11:40
너무 많은 공장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맥주 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그러나 너무나 부족한 공간 너무나 부족한 나무 / 너무 많은 경찰 너무 많은 컴퓨터 너무 많은 가전제품 너무 많은 돼지고기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연기 너무 많은 종교 너무 많은 욕심 너무 많은 양복 너무 많은 서류 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 속 너무 많은 피곤한 얼굴들 그러나 너무나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나 부족한 잣나무 / 너무 많은 살인 너무 많은 학교 폭력 너무 많은 돈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금속물질 너무 많은 비만 너무 많은 헛소리 그러나 너무나 부족한 침묵 (알렌 긴즈버그)
2015/12/24 13:14
예수를 신으로 신앙하는가 인간으로서 존경하는가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기쁨과 의미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예수는 복음(福音,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 예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선택은 예수를 돈벌이 도구로 삼는 것이다. 예수는 복음이 아니라 업종(業種)에 가깝다. 한국에서 예수를 신앙하거나 존경하려면 예수를 질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2015/12/22 20:25
지난 9월 시립미술관 남서울관에서 ‘공허한 제국’이라는 이름의 아트페어 전시가 열렸다. 개관 며칠 후 홍성담 작가의 작품 ‘김기종의 칼질’이 주최 측에 의해 철거되었다. 전시 총감독 홍경한씨는 “참여작가들과 작품들을 문제화되고 있는 작품 한 점으로부터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철거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해당 작품이 전시에 참여한 정황으로 볼 때 설명은 석연치 않았다. 홍성담 작가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세월오월호’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고 해서 애초 참여 요청을 고사했지만 홍경한씨의 설득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광주비엔날레 때는 작품의 참여 여부를 놓고 말썽이 난 데 반해 이번엔 기획자가 작품을 확인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런데 논란의 기미가 보이자마자 주최 측에서 작품을 자진 철거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홍경한씨는 한동안 ‘잠적’했다. 전시 작가와 작품을 지키는 것은 전시 기획자의 기본 윤리라는 점에서 황당한 상황이었다.
전시에 함께 참여한 작가들은 침묵했다. 동료 작가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호오가 어떻든 작가로서 모욕감과 분노를 느꼈을 법도 한데 말이다. 미술계 안에서 이렇다 할 토론이나 논쟁도 없었다. 일련의 침묵을 보며 나는 몇 달 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열린 지드래곤 전시 때의 침묵을 떠올렸다. 당시 그 희한한 침묵에 의아해하던 나에게 미술계 사정에 밝은 친구가 말했다. “작가는 서울시립에서 전시해야 하니 말 못하고, 평론가나 기획자는 관장과의 안면 때문에 못하고, 결국 말할 사람이 없지.” 그런 건가 하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았던 건 그런 해설이 평소 미술계가 보이는 언어나 담론에 비해 어이없을 만치 싱거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술계는 다른 어떤 예술계와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사회 혹은 자본주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언어와 담론이 많은 곳이다. 이를테면 홍경한씨는 ‘공허한 제국’ 전시 소개 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전시의 내용은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테제로, 우리 역사와 정치, 사회에 있어 반드시 기억되고 환류되어야 할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중략) 작가 홍성담은 핵으로 만든 ‘공허한 밥’을 절대 마다하지 않는 현실을 빗댄 ‘핵-거룩한 식사’와 ‘공허한 칼질’로 표현된 김기종의 칼질을 통해 ‘천근처럼 무거운 역사 아래 분노와 항의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중략) 이번 전시는 훼손되어선 안될 ‘표현의 자유’ 속에서 일궈진 모든 예술이 우리 사회에 보편적 가치로 수용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기 위한 첫 시도임과 동시에….”
미술계의 그런 말과 행동의 괴리가 좀 더 중첩된 차원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로부터 두어 달 후 알 수 있었다. 11월 미술인 500여명은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MACBA) 관장 재직 시 검열 의혹으로 논란을 빚은 바르토메우 마리가 유력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후보로 떠오르자 “예술의 자율성을 확고히 지켜야 할 미술관장직으로 검열 논란의 와중에 있는 인물을 왜 선임하려 하는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마리가 결국 관장에 취임하게 되자 미술가들은 그에게 “일체의 권력으로부터의 검열과 통제에 반대한다”는 공개적인 윤리선언을 요구했다.
마리의 검열 사건은 사실 애매한 부분이 있다. 현존하는 입헌군주국가들은 공공 미술관에서 왕을 소재로 한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왕을 소재로 창작할 수 없다는 말인가’라는 질문과는 무관한 불문율에 가까운 관행이다. “큐레이터들이 나를 속였다”는 마리의 주장도 결국 그런 맥락에 있다. 또 하나의 이슈인 큐레이터 해고 건도 그가 물러난 후 일이라 그에게 책임을 따지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입길에 오른 사람이 나라를 대표하는 미술관 관장으로 부임하는 일에 대해 미술인들이 공개적으로 의구심을 표시하고 윤리선언을 요구하는 건 분명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로선 미술인들의 그런 의미 있는 행동이 코미디로 보일지도 모른다. 동료 작가의 작품들이 검열되고 표현의 자유가 탄압될 때 침묵해온 그들이 정색을 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모습이 말이다.
물론 이건 미술계만의 풍경이 아니다. 헬조선이 괜히 헬조선인가. 오늘 한국이라는 곳에서 살면서 제 삶의 일부도 코미디로 내어주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만연한 ‘기득권과 저항적 태도의 병존’이라는 삶의 코미디는 이미 20대의 보수화 현상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우리 삶이 코미디라 할지라도 그 사실에 무감각해지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자의식을 유지하며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의미 있게 꿈틀거릴 수 있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12/20 22:33
아까 경향신문 기자가 전화로 박유하 사태 관련한 공개토론 제의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물었다. 박 선생이나 1차 성명자 192명을 대변하는 게 아님을 전제로 말했다. “2013년 8월 책이 나오고 저자가 원했던 게 바로 비판과 토론이었다. 그런데 내내 직간접적 비난과 대중 선동으로 일관해온 사람들이, 일본에서 유력한 지식인들이 성명을 내고 한국에서 192명이 성명을 내자, 갑자기 공개토론을 하자고 한다. 그들은 법정에 맡겨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이라고 말한다. 그게 진심이라면 법정에 맡겨지지 않고 공적 토론장으로 올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는 게 아닌가. 토론하자고 할 땐 박유하가 일본우익의 앞잡이인양 대중을 선동하던 사람들이 박유하가 민사에 형사까지 치르는 상태에서 토론을 제의하고는 토론을 피한다고 또 대중을 선동한다. 박유하를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를 떠나서 사람이 그리 야비해서야 되겠는가.”
2015/12/17 21:59
2015/12/10 10:53
막힌 길이면 포기 않고 뚫어야 한다. 그러나 길이 아니면 다른 길로 가야 한다. 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길로 가는 게 두려워 내내 길을 뚫는 시늉만 하는 건 다 죽는 길이다.
2015/12/10 10:52
새민련이 야당 구실을 못하는 이유는, 달리 말해 새민련이 새누리의 독주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재인이 어떻고 안철수가 어떻고 당내 혁신이 어떻고 따위가 아니라, 새누리와 이념과 정책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새민련의 든든한 생명줄이 바로 지금 새민련을 욕하며 혁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새누리의 독주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새민련 생명줄 노릇을 이제라도(이미 충분히 늦었지만) 집어치우고 새누리와 이념 정책이 다른 정당 즉, 적어도 정의당, 혹은 녹색당이나 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권 교체도 의미가 생기고 정권 교체를 못하더라도 새누리의 독주를 견제하는 정치 구도를 만들 수 있다. 현재 새누리 지지자들이 갑자기 왼쪽으로 올리 만무하고, 정치는 한통속이라는 반감에 젖은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정당을 지지할 특별한 동인도 없는 상태에서 변수는 그들뿐이다. 혁신은 새민련이 아니라 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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