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에 해당되는 글 15건

  1. 2015/10/31 풍경과 면역력
  2. 2015/10/30 프레임
  3. 2015/10/28 우리 시대의 죄인들
  4. 2015/10/27 공동의 적
  5. 2015/10/26 지성의 척도
  6. 2015/10/23 차가운 교감
  7. 2015/10/19 생각의 문
  8. 2015/10/19 운동
  9. 2015/10/17 고그
  10. 2015/10/16 풀빵
  11. 2015/10/14 고래 이사
  12. 2015/10/13 던적스러움의 수렁
  13. 2015/10/12
  14. 2015/10/10 흥미롭다
  15. 2015/10/02 대한민국 따위
2015/10/31 11:16
1997년 구제금융 사태를 빌미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밀려들어오면서 한국 교육은 뿌리부터 바뀌게 된다.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을 바꾼 건 그런 변화의 표징일 것이다. 교육부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경제적) 자원’을 담당하는 국가의 부서가 된 것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가장 쉽고 간명하게 표현하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관한 일’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교육을 ‘아이가 얼마짜리가 될 것인가에 관한 일’로 바꾸어놓았다. 골목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밤늦도록 학원을 돌고 시들고 부모들은 아이에게 인간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가르치길 두려워하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자유로운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경쟁의 조건까지 같진 않기에 갈수록 부자의 아이들이 승리를 거두는 경향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로부터 18년. 한국은 1%의 88억 세대 청년을 위해 90%의 청년들이 88만원 세대로 살아가야 하는 사회다. 계급 상승의 기회이던 교육은 계급 온존을 넘어 신분제 사회의 기반이 되고 있다. 청년들은 제 나라를 스스럼없이 ‘지옥’(헬조선)이라 부른다. 좌도 우도 감히 그 말을 부인하지 못한다.

교과들은 아이들의 가격표 매기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그 교과를 공부하는 이유나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가격표를 매기기 위한 수단도 아닌 예체능 교과는 존재 가치가 의심된다. 부모들에게 미술 시간은 안그래도 부족한 공부 시간을 좀먹는 시간일 뿐이다.  미술 시간은 중학교에선 대폭 줄고 고등학교에선 아예 선택 과목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첩되어 있다. 미술 시간을 종전 수준으로 회복하고 필수 과목으로 되돌려놓는 일도 어려운 일이지만, 이 지경이 되기 이전의 미술 교육이 온전했던 것 또한 아니다.

미술 교육에서 ‘미술'은 일본이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일 때 ‘파인 아트’(Fine Arts)를 번역해 만든 말이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기술’ 정도의 뜻인데 오늘날 미술관과는 지나치게 동떨어지고 협소한 것이다. 미술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목표로 하지도 않거니와, 종래의 미술 범주를 넘어 온갖 형태와 방식의 시각 예술작업들을 포괄한지 오래다.

미술이라는 말은 이제 상당수의 사람들에겐 '시각예술'을 대신하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겐 여전히 기존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이중적 상태가 만들어내는 혼란은 미술교육에 치명적이다. 미술교육이 현대미술 혹은 동시대 미술의 조류를 실시간으로 따라야 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미술교육이 현재 실재하는 의미있는 미술 작업들에 대해 '저런 것도 미술인가?'라는 관점과 태도를 가르친다면 미술 교육을 할 이유가 사라진다. 명칭도 정체성도 '시각예술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미술 교육이 ‘실기’에 편중된 건 미술 교육이 '기술’이라는 기존의 미술관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미술 시간에 초등학생들은 크레파스로 중고생들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그런 편중된 교육의 반복이 아이들로 하여금 미술에 대한 편중된 이해을 만들어내는 것도 사실이다. 대개의 아이들은 미술 작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 즉 관객이 된다. 미술 교육은 그 사실에 조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미술 교육은 실기가 아니라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안목과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고등학교 정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근사한 풍경인가. 미술교육만 제대로 한다면 결코 몽상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의 본디 힘이 ‘쓸모’가 아니라 ‘쓸모와의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내 ‘경제적 쓸모’를 질문하게 함으로써 끊임없는 불안감에 젖게 하고 결국 내 삶을 모조리 앗아가버리는 몹쓸 세상을 살아낼 아이들이, 미술 전시와 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안목과 능력을 갖는다는 건 ‘삶의 면역력’을 갖는 일이기도 하다.(월간미술)
2015/10/31 11:16 2015/10/31 11:16
2015/10/30 11:15
'야당이 역사 국정 교과서라는 이념 공세 프레임에 말려들어 민생 문제를 제쳐두고 있다'는 분석은 그럴듯하지만 틀렸다. 야당은 프레임에 말려든 게 아니라 오히려 프레임을 필요로 한다. 야당은 이미 그들 스스로 지겹도록 증명해왔지만, 노동 악법 등 현재 주요한 민생 문제 전반에서 여당과 근본적 차이가 없다. 야당이 야당답지 못하다는 비판은 그래서 하나마나 한 것이다. 야당이 그나마 야당처럼 보일 수 있는 기회는 딱 두가지인데, 모두 여당으로부터 제공받는 프레임이다.  하나는 '과거 역사에 관련한 일'(민주화운동 세력과 독재세력이라는 분명한 차이에 근거한), 또 하나는 '대통령의 또라이짓'이다. 이명박은 주로 후자를 성실하게 제공했고, 박근혜는 전자를 존재 자체부터 하는 짓까지 종합선물세트로 제공한다. 야당은 여당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넘어 절대적 기생관계로 가고 있다. 결국 프레임에 말려든 건 야당이 아니라 그런 야당에 또 한번 호응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국정화 역사교과서를 반대하되 그럼 프레임엔 놀아나지 않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2015/10/30 11:15 2015/10/30 11:15
2015/10/28 09:42
예수가 '가난하고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 편이었다는 말에서 죄인이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을 비롯하여 율법을 제대로 지키다간 꼼짝없이 굶어죽기 십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죄인일 수밖에 없었고, 율법을 다 지키고도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인이라 여겨졌다. 예수는 그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후기 자본주의 세상의 율법은 무엇인가. '경쟁력’이다. 경쟁력  없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다. 그들은 예수 당시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으로 경멸받으며 사회적으로 배제된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뜻을 오늘에 되새기면,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은 경쟁력 없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죄인들이 인간으로서 위엄을 회복한 세상이라 할 수 있다.
2015/10/28 09:42 2015/10/28 09:42
2015/10/27 10:43
민족의식은 분명 근대 사회의 산물이지만 유대인들 경우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제 신화에 근거한 선민의식으로 뭉쳐있었다. 로마제국도 유대 통치에 골이 아팠던 게 이 보잘것 없는 인간들이 제국의 위세에 기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열등한 이방인'이라 얕보는 황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해방이란 전적으로 민족적인 것, 이방인의 지배를 물리치고 신정 정치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든, 칼을 품고다니며 테러를 하든, 체제 안에서 개혁운동을 하든 방법과 노선을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오로지 한 사람 예수만 다른 관점을 보였다. 그는 그런 식의 해방에 매우 냉소적이었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예수의 관심은 유대 민족 전체가 아니라 가난하고 죄인 취급받는 사람들에 있었고 그가 설파한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들이 인간적 위엄을 회복한 세상이었다.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자가 이방인인가 동족인가는 예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는 로마제국과 이런저런 독립운동 세력에게 공동의 적이 되었다. 예수의 관점과 숙명적 고독은 오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2015/10/27 10:43 2015/10/27 10:43
2015/10/26 10:41
큐레이터 양지윤의 소개로 그의 절친인 큐레이터 아나 니키토빅과 저녁 식사와 술을 했다. 다양한 주제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는 아나는 세르비아 출신으로 티토 말기에 태어나 십대일 때 유고 내전을 겪었다. 성장 과정에서 그런 사회적 격변들이 의식의 어떤 굴절을 만들어내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자유의 지향과 자본주의적 자유를, 사회주의 지향과 현실 사회주의를 묻기도 전에 구분해가며 말하는 그가 참 '어른스러워' 보였다. 대화 말미에 내가 말했다.

"과거의 현실이나 다른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 현실을 제대로 보는 건 매우 어렵다. 그게 지성의 척도라 생각한다."

아나는 깊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지만, 나는 한편으로 적이 씁쓸했다. 근래 한국은 과거의 현실이나 다른 사회의 현실조차 제대로 보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2015/10/26 10:41 2015/10/26 10:41
2015/10/23 09:06
신자유주의 체제가 사람들을 모래알처럼 흐트리는 방법 하나는 고통에 대한 교감능력을 퇴화시키는 것이다. 안그래도 사람들은 경제적 불안감에 각자도생의 길에 몰두하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교감할 기회를 포기하는 경향을 보인다. 체제는 미디어를 통해 끔찍한 고통의 현장에 대한 시각적 체험을 반복하게 함으로서 실재하는 고통을 단지 이미지 차원으로 휘발시키거나, 내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보다 덜 끔찍해보이는 고통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간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런 흐름을 거스르는 것, 고통에 대한 교감능력을 지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더이상 따뜻한 감성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연민이나 측은지심만으로 식별하고 조응하기엔 지나치게 독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교감능력을 지켜내는 데는 오히려 차가운 사유, 지성의 힘이 필수적이다. 독한 세상엔 좀더 독해질 필요가 있다.
2015/10/23 09:06 2015/10/23 09:06
2015/10/19 17:10
제 생각조차 억압하고 통제하는 사람들이 어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까.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면 생각의 문부터 열어라.
2015/10/19 17:10 2015/10/19 17:10
2015/10/19 16:16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면서도 그에 수반하는 문제와 이면들을 질문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은 국정교과서 반대 운동의 전선을 교란하는 걸까. 사실 이 질문은 국정교과서 반대 운동뿐 아니라 모든 사회 운동에서 반복되는 해묵은 질문이다. 운동이란 이미 그 운동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동의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는 집단적 카타르시스가 이니다. 운동이란 그 운동에 아직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세를 늘임으로서 세상을 바꿔나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대열에 서서 일사불란하게만 움직인다면 이미 죽은 운동이다. 운동에 수반하는 문제와 이면들을 질문하고 토론하는 일은 전선을 명료하게 만들고 운동의 생명력을 만들어낸다.
2015/10/19 16:16 2015/10/19 16:16
2015/10/17 09:54
고래가그랬어를 실제로 보지 않은 이들 중에 내 이미지 때문에 아이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센 잡지가 아닐까 걱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이미지가 과장된 것도 사실이지만 '좌익 어린이잡지'는 내가 생각하는 어린이 교양지의 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이 교양지는 아이가 자신을 둘러싼 현실과 세계를 스스로 조망하고 판단하는 교양있는 시민/노동자로 자라도록 돕는 잡지여야 한다. 어릴 적부터 좌우 진영 논리에 갇히는 건 오히려 그런 성장에 치명적일 수 있다. 교양있는 시민/노동자가 많아지는 것. 근래 우리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고 있다. 잡지 하나가 대단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돈귀신 들린 세상과 사람을 상품으로 키우는 교육이 더이상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고래에서 만나는 건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와 관련한 고래의 최대 장점은 아이들이 고래를 좋아한다는 것, 아이들이 고래는 내편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아이들은 고래가그랬어를 '고그'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꽤 오래 전, 아이들과 자리에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아이들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 물었고 그들은 서로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봤다. '이 사람 가짜?' 하는 얼굴로.
2015/10/17 09:54 2015/10/17 09:54
2015/10/16 10:31
'친일 독재 미화 국정교과서'를 반대한다. 그러나 교과서가 아이들을 찍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제하는 것 역시 반대한다. 아이들은 풀빵이 아니다.
2015/10/16 10:31 2015/10/16 10:31
2015/10/14 11:44
고래가그랬어가 창간 준비부터 143호를 내기까지 15년 동안의 마포 생활을 마치고, 어제 파주출판도시 명필름 아트센터로 이사했습니다. 더 근사한 아이들의 동무가 되겠습니다.
2015/10/14 11:44 2015/10/14 11:44
2015/10/13 08:43
두어 달 전, 인천 동구는 괭이부리마을(김중미의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널리 알려진 그 마을이다)에 ‘쪽방 체험관’을 만들려다 “가난을 상품화해 마을과 주민들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다”는 반발과 비난 여론으로 접었다. 그 얼마 후,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축제 주점에서는 학생들이 ‘오원춘 세트’라는 이름의 안주 메뉴를 만들어 팔다가 비난 여론 때문에 전체 축제 일정이 취소되었다. 오원춘은 2012년 한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하고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사람이다. 비슷한 즈음, 출판사 문학동네는 김훈 에세이집 <라면을 끓이며>를 예약 구매하면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김훈 양은 냄비’를 주겠다고 홍보해 입길에 올랐다. 1800개의 냄비가 이틀 만에 동이 나 행사 취소 사태까진 갈 것도 없었지만 김훈이라는 작가의 무게감과 냄비의 대비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에 잠기게 했다.

상황과 정서의 차이가 있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어 말하는 게 부적절하게 느껴지거나 억울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보며 그것들을 관통하는 형용사 하나가 떠올랐다. ‘던적스럽다.(하는 짓이 보기에 매우 치사하고 더러운 데가 있다.)’ 그렇다. 그것은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이었다.

대개의 사람이 그런 대로 사람꼴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은 두 가지 눈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내가 나를 보는 눈’이다. 양심, 윤리의식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이 행동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러나 만일 눈이 그것뿐이라면 단지 자기 내면 안에서 시야일 뿐이라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실제로 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보완하는 또 하나의 눈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눈’이다. 체면이나 위신, 인정 욕구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 행동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전자의 눈은 ‘이득이긴 하지만’이라는 전제가 들어 있지만, 후자의 눈은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매우 현실적인 그래서 좀 더 강력한 억지력을 가진 전제가 들어 있다.

에피소드들은 우리 사회가 첫 번째 눈은 고사하고 두 번째 눈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손해를 보는 행동조차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에 몰입해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좀 더 분명한 이유는 그 에피소드들이 결코 개인의 즉흥적 해프닝이 아니라는 것, 일련의 조직적 논의의 결과라는 데 있다. 누군가 그 아이디어를 내고 여럿이 진지한 숙고와 토론을 벌였으며 좋은 안이라는 합의와 결론이 내려져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물론 이건 막 시작된 일은 아니다.

15년 전 내가 ‘어린이 교양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어느 날 불현듯 ‘누구도 아이들에게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극우 꼴통 아비도 제 아이에게 ‘사람이란’ ‘인생이란’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사람이 공부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동무들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 ‘돈은 꼭 필요한 거지만 사람이 너무 탐욕 부리면 죄받는다.’ 자신은 전혀 그렇게 살지 않더라도 ‘어른은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도 어릴 적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전 수백년 동안도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국의 진보적인 부모, 아니 사회주의자 부모조차도 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길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시장에서 싸게 팔리는 상품이 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고래가그랬어’ 창간 독자이던 초등학생들은 이제 20대를 넘긴다. 인천 동구청장 이홍수가 예의 반발과 비난 여론 속에서도 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그 후 우리 사회에서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이 어디까지 갔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언론에서 괭이부리 체험관 때문에 야단이 났다. 이 체험관을 누가 계획하고 추진했는지 아직 관광개발과에 묻고 있지 않다. 난 그 사람이 누구든지 적당한 기회를 봐서 칭찬하고 격려해 줄 생각이다. 진정 용기있고 일할 의욕이 있는 직원이기 때문이다. 변화와 개혁. 누군가가 그랬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전쟁보다 어려운 것이라고.”

이 소신 충만한 언사 앞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갈수록 줄고 있다. 오늘 던적스러운 일은 내일 그다지 던적스럽지 않다. 상한선은 넘은 지 오래고 속도는 오히려 가파르다. 이대로라면 ‘가난 체험 상품’ 정도는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의 도래가 그리 머지않다. 너나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는 팔기 위한 던적스러움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삶과 관련해 가질 수 있는 자부는 그 대열의 비교적 후미에 있다는 사실에나 근거한다. 정말 이렇게밖엔 살 수 없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10/13 08:43 2015/10/13 08:43
2015/10/12 07:31
노벨상 이야기들이 많은데, 난 노벨상이든 황금사자상이든 다른 뭐든 어른이 상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거나 연연하는 건 민망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 상들의 사회적 의미를 무작정 부인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어른이라면 남과의 비교나 외형적 성취 따위로 제 가치를 판정받는 걸 기본적으로 불쾌해할 줄 알아야 한다.
2015/10/12 07:31 2015/10/12 07:31
2015/10/10 22:00
'세계문자심포지아 2015 - 문자 발명가들' 강연 퍼포먼스에 강수미, 박유하, 양효실 등과 함께 참여한다. 네 사람의 짧은 강연과 전미래의 퍼포먼스 그리고 관객과 함께 하는 토론회로 진행될 예정. 워낙 개성 강한 사람들이라 나 이외의 강연자가 어떤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할지 나로서도 꽤 흥미롭다. 선착순 접수.

강수미: 비감각적 유사성, 말하는주체, 생각하기의 실현
김규항: '적'을 씌운 문자들
박유하: 찢겨진 러브레터 - 문자/일본/검열
양효실: 발 없는 말이 멀리! 말 없는 여자는 더 멀리
전미래(feat.신범순): 살롱 드 69

10월 24일(토) 14-18시
황두진건축사무소 목련홀

2015/10/10 22:00 2015/10/10 22:00
2015/10/02 17:05
전자책 회사에서 온 홍보 메일에 "김진명을 읽는 것은 대한민국을 읽는 것이다"라고 적힌 걸 보고 독백했다. '그렇지. 그래서 읽으면 안 되지.' 아까운 인생에 뭐 읽을 게 없어서 대한민국 따위, 국가니 애국심이니 따위나 읽는단 말인가. 사랑을 읽고 고독을 읽고 인간을 읽기도 모자란 인생에.
2015/10/02 17:05 2015/10/02 1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