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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8/29 우익 고래삼촌
  2. 2015/08/25 배트맨의 집사
  3. 2015/08/22 자가당착
  4. 2015/08/12 나의 나라
  5. 2015/08/07 품위
  6. 2015/08/04 청년 전쟁
  7. 2015/08/01 포스트 뮤지엄의 한국적 적용이라고?
2015/08/29 10:53
"제 소원은 우파와 좌파가 제대로 된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가짜 우파와 가짜 좌파가 운동장을 점거하고 있어서 불가능합니다. 우선은 운동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은 힘들어도 점점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항상 다음 세대,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어야죠. 고래가 합리적 시민을 키워내는 잡지라 생각하기에 고래삼촌이 되기로 했습니다.”

어제, 자유주의 미디어 운영자인 장예찬 씨가 '최초의 우익 고래삼촌'이 되었다. 가짜 우파와 가짜 좌파가 점거한 운동장을 정리하고 제대로 된 우파와 좌파가 경쟁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는 나와 전적으로 같다.
2015/08/29 10:53 2015/08/29 10:53
2015/08/25 23:02
현실은 갈수록 막막한데 현실을 변화할 방법이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니 ‘헬조선’이 괜한 말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30년 전에도 비슷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 군사독재가 물러날 가능성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돌멩이나 화염병을 넘어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수십만의 경찰과 군대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런데 그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가 결국 총 한 방 쏘지 않고 무너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회성원들이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게 완벽할 수 있는가.’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서양처럼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회의하고 냉소하던 사람들 중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자 체제는 거짓말처럼 싱겁게 무너져버렸다.

어느 사회나 그렇다. 지배 체제란 사회성원의 다수가 선택함으로써 유지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 같은 표현은 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실이 아니다. 군사독재는 국민 다수의 선택으로 유지되었다. 제 이념이나 세계관에 의해 서든 체제에 속거나 기만당해서든 어떻든 말이다. 역사 속 어떤 포악한 체제도, 오늘 한국이라는 자본의 지옥도 마찬가지다.

이쯤 이야기하면 아마 ‘여전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우매한 사람들’이 떠올라 열불이 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지배 체제는 우매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우매한 사람들에게 열불을 내는 사람들의 선택으로 유지된다. 이 극악한 자본의 지옥은 보수라 일컬어지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진보라 일컬어지는 신흥 기득권 세력의 합작품이다.

진보는 체제의 일부다. 진보가 열망하는 건 체제 안에서의 헤게모니, 즉 정권이지 체제 변화는 아니다. 진보가 열중하는 건 대기업, 공공 부문 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지 정규/비정규라는 노동계급 분리 지배 체제의 혁파는 아니다. 진보의 유일한 정치 활동은 모든 문제를 보수 탓으로 박근혜 패거리 탓으로 돌리며 인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진보 논객’ ‘진보 교수’ ‘진보 언론인’들이 그 선두에 서고, 걸핏하면 ‘빵에 갔던 이야기’를 들먹이는 전국 도처의 진보 아저씨들이 뒤를 받친다. 강준만은 ‘싸가지’를 말했지만 순수한 사기극일 뿐이다.

꽤 많은 인민들은 진즉 사기극을 알아챘다. 박근혜가 좋아서가 아니라 진보가 미워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나 진보나 결국 저희 좋으려고 하는 건 똑같은데 진보는 정의와 윤리를 독점한 양 설레발을 치니 빈정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분노가 뒤틀려 튀어나온 게 바로 ‘일베’다. 일베는 보수에 현혹된 청년들이 아니라 진보에 반발해 오른쪽으로 치닫게 된 청년들이다.

그런데도 진보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인민들을 우매하다 욕하고 일베를 ‘벌레들’이라 경멸을 퍼부으니, 인민의 반발도 더욱 늘어만 간다. 하는 짓으로 보면 이미 바닥을 쳤을 박근혜 지지율이 그렇지 않은 것도 그런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아수라 속에서 1%의 왕국은 더욱 더 공고해진다. 진보는 늘 수구를 욕하지만, 현실에 미치는 실제 영향으로 말하자면 수구보다 더 수구가 된 지 오래다.

급진적 진보정치나 의미 있는 급진 세력은 대부분 수구적 진보에 흡수되거나 무기력한 상태다. 딱 하나의 가능성만 남은 듯하다. 청년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체제는 청년들의 급진성을 움 틔우고 양성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사회가 세습 엘리트 계층이 지배하는 신분 사회임에도 안정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우수한 비엘리트 계층 청년들에게 쿼터를 주기 때문이다. 그걸 다 막아버리면 결국 터지게 되고 체제는 위험에 빠진다는 걸 그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안다.

한국은 그걸 완전히 막아버린 상태다. 보수와 진보의 연합으로 말이다. 이대로라면 터질 수밖에 없다. 멘토 앞에서 청년들의 눈빛이 달라진 건 그 조짐 중 하나다. 물론 이런 현실이 급진성만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먼저 대다수의 무력한 상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베의 출현은 그 반대편, ‘자생적 급진주의자 청년들’의 출현 또한 가능하다는 뜻이다. 도래할 청년들의 주제는 ‘최소한의 상식’이나 ‘언론 자유’가 아니라 ‘노동’과 ‘계급’일 것이다. 그런 개념들을 학습하거나 의식화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맹렬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찰, 어느새 실제적 수구가 되어버린 자신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성찰하는 진보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역할 모델로 알프레드를 떠올려 본다. 연륜과 경험으로 주인공이 제 역할을 해내는 데 필요한 모든 채비를 하면서 또한 정중하게 자문하고 충고하는 배트맨의 집사이자 멘토, 알프레드 말이다. 혹여 주인공이 아니라서 불편한가. 괜찮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던가. (혁명은 안단테로)
2015/08/25 23:02 2015/08/25 23:02
2015/08/22 23:14
진보적인 사람들이 인터넷에 예비군복과 군화 사진을 올리며 전쟁에 불러달라 외치는 청년들을 개탄하는 건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자가당착이다. 그들이 일베하는 청년들을 ‘일베충’이라 부르며 경멸을 퍼붓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사회 어느 역사든 청년들이 굳이 오른쪽으로 치닫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왼쪽에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가 어리석고 무능할 때, 진보가 제 알량한 기득권을 부여잡고 모든 문제를 보수 탓으로만 돌릴 때 청년들은 오른쪽으로 치닫게 된다.
2015/08/22 23:14 2015/08/22 23:14
2015/08/12 17:52
박근혜의 대국민 담화에 '존경하는 국민'이라는 말이 거듭 나오는 걸 두고 '존경하면서 국민에게 그렇게 하느냐' '네가 국민이면 협조하고 싶겠냐' 욕하는 건 심정적으로는 당연하나 자칫 내가 박근혜의 국민임을 인정하는 일이 된다. 내가 박근혜의 국민임을 거부할 때, 이명박의 국민임을 김대중의 국민임을 노무현의 국민임을 거부할 때, 나는 그 누구의 국민도 아닌 나임을 분명히 할때, 나는 나의 나라를 상상할 수 있다.
2015/08/12 17:52 2015/08/12 17:52
2015/08/07 17:49
일년 내내 인상 한번 쓰지 않고도 충분히 안락할 수 있다면 굳이 품위없게 행동할 이유가 적어진다. 매일같이 악다구니해도 생존이 불안하다면 도무지 품위있게 행동할 방법이 있겠는가.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과 품위 없는 사람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람에겐 인정 욕구라는 게 있고 남 앞에서 품위를 유지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사람은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사람과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근래 한국이 유례없이 품위없는 나라가 된 건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건 결국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2015/08/07 17:49 2015/08/07 17:49
2015/08/04 10:47
이오덕 선생의 옛글 여느 구석엔 권정생 선생과 조우한 순간이 적혀 있다. ‘너무나도 훌륭한 젊은 동화작가를 발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권정생은 이오덕보다 몇 해를 더 살았다. 하지만 평생 온몸에 퍼진 결핵과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하루 30분도 앉아 일하기 어려운 날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누구보다 맑고 강렬하게 사유했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언젠가 그의 안동집에서 한담을 나누던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까 뱀이 방에 들어왔어요.” “마당의 잡초를 그냥 두시니까 뱀이란 놈이 방 안과 밖을 구분 못한 모양이군요. 그런데 독사면 어쩌시려고요.” “독사는 방에 안 들어와요.” “그런가요.” 다녀와 그쪽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근거 없는 이야기라며 실소했다. 나는 그제서야 그의 말이 농담이었다는 사실과, 그 농담이 뭇 생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과 태도에 대한 조소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식물을 모조리 잡초라 규정하고 없애버리는 인간의 태도란 생태의 관점에서 얼마나 가소로운가.

2007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10억원이 넘는 돈이 남았다. 한국 아동문학에서 손꼽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는 인세 수입이 많았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을 헐어주곤 했음에도 거액이 남은 이유는 워낙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한 달 생활비에 대해서 5만원 설도 있고 10만원 설도 있다. 넉넉히 잡아도 20만원을 채 넘기진 않았을 것이다. 말년에 거동이 더욱 불편해진 그를 걱정한 지인이 소박하면서도 생활하기 편한 집을 한 채 지어준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불편하다’며 안동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불편은 세상이 지시하는 불편과는 다르거나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그는 늘 그런 불편들과 맞섰다.

그는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라 불리기도 한다. 그 말엔 사실 맹랑한 함의가 들어 있다. 권정생은 성자고 나는 인간이니 나는 절대로 권정생처럼 살진 않는다는 굳은 의지. 그럼에도 나는 그런 성자의 삶을 존경하고 따르려 노력하는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노골적 과시. 권정생은 그런 이중의식 역시 조소하곤 했다.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려 할 때 진보적인 사람들 사이에 반대 운동이 거셌다. 권정생은 ‘제국주의 전쟁 파병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넓은 아파트와 자동차를 갖는 게 삶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이상, 내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가 이라크에 날아가는 폭격기와 다를 게 뭔가.’

그를 성자라 찬미하는 사람들의 속내가 어떻든 그가 그렇게 불릴 만한 삶을 산 건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해 보자. 만일 그가 젊은 시절부터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고 서울에서 아등바등 애를 쓰다 결국 시골로 밀려났다면, 뱀이 방 안팎을 구분 못하는 남루한 오두막에서 한 달에 20만원도 못되는 돈으로 궁핍하게 살다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그보다 초라하고 불쌍한 인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자라 불리며 존경받는다. 그 엄청난 격차에 인간의 삶이 갖는 중요한 이치와 힘이 담겨 있다.

청년들이 제 나라를 ‘헬 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 한국이 청년들에게만 지옥은 아니지만, 청년들에게 지옥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라의 부를 대부분 점유한 부모 덕에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극소수 ‘귀족 청년’은 빼고 하는 이야기다.) 극우 언론들도 트집 잡지 않는 걸 보면 기성세대는 대체로 헬 조선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다. 기성세대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청년들에게 훈계와 훈수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비난받게 된 데 대한 학습효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좌우를 막론하고 헬 조선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거나 기득권에 기생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렇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기성세대는 청년 현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따위의 막되어 먹은 태도를 보이든 짐짓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든 다를 건 없다. 마찬가지로 기성세대를 ‘아프면 환자지 개새끼야’라고 욕하든 ‘개념 아저씨’라 칭찬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현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현실의 변화는 오로지 청년들 스스로 일어날 때, 헬 조선을 때려 부수려고 일어날 때 시작된다. 권정생은 그 지점에 의미 있는 교훈을 준다. 현재의 세상을 수용하며 그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애쓰는 사람과, 다른 세상을 꿈꾸며 제 삶에서 꿈꾸는 세상의 편린들을 구현해내려 애쓰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힘을 갖는다는 교훈을.

현재 세상을 수용하는 한 현재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소연과 아우성은 기껏해야 동정과 무마 시도로 돌아올 뿐이다. 비정규직의 피폐한 삶을 외치고 최저임금 1만원의 당위성을 외쳐도 체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럽게 비정규직을 늘리고 최저임금 동결안을 내놓는다. 청년들이 현재 세상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을 때, ‘나는 다른 세상을 원한다’고 선언하며 싸움을 시작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체제의 지배자들 얼굴에 불길한 징조와 공포가 드리워진다. 전쟁이 시작된다. (혁명은 안단테로)
2015/08/04 10:47 2015/08/04 10:47
2015/08/01 16:33
미술계의 국외자인,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인 사람이 미술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즉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지드래곤 현대미술 전시회-피스마이너스원:무대를 넘어서전>이라면 좀 다르다. 워낙 말이 안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워낙 말이 안되는 일은 특정한 ‘계’를 넘어 사회 성원들의 보편적 문제가 된다.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자격이 없다. 그가 대중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할 만한 자격을 갖추면 그만이다. 자격은 다른 공간에서 한 전시들과 그에 대한 비평과 관객의 평가를 포함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지드래곤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할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않았다. 자격은커녕 아무런 이력조차 없다. 이력을 쌓고 자격을 갖추는 데 일정한 시간이 수반되는 건 물론이다. 현재 같은 미술관 1층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윤석남 작가가 미술가로서 경과한 시간은 괜한 것이 아니다.

이번 전시는 김홍희 관장 자신의 미술관 운영 원칙, 적지 않은 진지한 사람이 그를 지지한 이유이기도 한 운영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김홍희 관장은 2012년 초 관장에 취임하며 “앞으로 외부기획사에 의존한 대형블록버스터 전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에선 이번 전시가 외부 기획이 아니라 ‘공동기획’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이 전시는 공간 대관에 ‘공동기획’이라는 명의까지 패키지로 판매된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외부 기획이다. 소속사 YG는 지드래곤의 홍보 마케팅 활동의 일환으로 전시를 기획했고 서울시립미술관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몇 곳을 접촉했다. ‘뜻밖에도’ YG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공간과 권위를 패키지로 대관할 수 있었다. 공동기획이니 괜찮은 게 아니라 공동기획이어서 문제인 것이다.

데이빗 보위를 사례로 들기도 하는 모양인데, 진심이라면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13년 이른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디자인 뮤지엄 런던 빅토리아&알버트(V&A)가 ‘데이빗 보위 이즈’라는 전시를 연 건 보위에게 그럴 자격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보위는 대중연예인 혹은 뮤지션이라는 타이틀로 규정할 수 없는 존경받는 아티스트다. 그가 선도한 글램록이 패션, 무대예술, 디자인 등에 미친 영향은 예술사적 차원이다. 여전히 현역인 보위가 가사는 물론 사운드에까지 제 철학과 미학을 불어넣어 카운터컬처의 기수로 공인된 건 이미 54년 전이다. 그런 사람을 상업적 기획사에 의해 픽업되고 길러진 20대 아이돌 가수와 비교하는 건 민망한 일이다. 물론 보위의 전시는 보위 소속사의 기획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다.

김홍희 관장은 이번 전시를 ‘포스트 뮤지엄’ 의 개념으로 해명한다. 일반적으로 포스트 뮤지엄은 계몽이나 교육을 기조로 한 근대적 미술관을 넘어 적극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국에서 불었던 포스트모던 바람에 대해 돼새길 필요가 있다. 1990년대 들어 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포스트모던 바람은 1980년대 변혁운동의 경직된 정신세계(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예술에서 예술을 소멸하기도 한)와 결부되어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의미있는 화두를 선사했다. 그러나 결국 포스트모던 바람이 남긴 건 살아숨쉬는 진리(들)가 아니라, 누구도 진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 지적 괴멸이었다. 괴멸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길을 터주고 온 사회성원의 정신과 신체를 열어젖히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김홍희 관장은 그런 과정을 생뚱맞을 만큼 뒤늦게 공공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압축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명화 감상 겸 가족 나들이 공간’을 ‘기업 홍보관’으로 바꾸는 게 과연 포스트 뮤지엄의 한국적 적용인가.

나는 이 전시를 보지 않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볼 필요 역시 느끼지 않았다. 나는, 혹은 지금 우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 전시를 하는 게 온당한지에 대해, 즉 서울시립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지 이 전시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본 지인이 ‘생각보다 감각 있어 보이더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세월이 지나 지드래곤이 아이돌의 굴레를 벗고 데이빗 보위처럼 고유한 예술세계를 이룬 존경받는 아티스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드래곤은 그런 아티스트가 아니다. (월간미술 2015년 8월)

2015/08/01 16:33 2015/08/01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