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갈수록 막막한데 현실을 변화할 방법이나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니 ‘헬조선’이 괜한 말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30년 전에도 비슷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 군사독재가 물러날 가능성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돌멩이나 화염병을 넘어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고민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수십만의 경찰과 군대를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그런데 그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가 결국 총 한 방 쏘지 않고 무너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사회성원들이 다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게 완벽할 수 있는가.’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서양처럼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회의하고 냉소하던 사람들 중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자 체제는 거짓말처럼 싱겁게 무너져버렸다.
어느 사회나 그렇다. 지배 체제란 사회성원의 다수가 선택함으로써 유지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 같은 표현은 꽤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실이 아니다. 군사독재는 국민 다수의 선택으로 유지되었다. 제 이념이나 세계관에 의해 서든 체제에 속거나 기만당해서든 어떻든 말이다. 역사 속 어떤 포악한 체제도, 오늘 한국이라는 자본의 지옥도 마찬가지다.
이쯤 이야기하면 아마 ‘여전히 박근혜를 지지하는 우매한 사람들’이 떠올라 열불이 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지배 체제는 우매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우매한 사람들에게 열불을 내는 사람들의 선택으로 유지된다. 이 극악한 자본의 지옥은 보수라 일컬어지는 수구 기득권 세력과 진보라 일컬어지는 신흥 기득권 세력의 합작품이다.
진보는 체제의 일부다. 진보가 열망하는 건 체제 안에서의 헤게모니, 즉 정권이지 체제 변화는 아니다. 진보가 열중하는 건 대기업, 공공 부문 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지 정규/비정규라는 노동계급 분리 지배 체제의 혁파는 아니다. 진보의 유일한 정치 활동은 모든 문제를 보수 탓으로 박근혜 패거리 탓으로 돌리며 인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진보 논객’ ‘진보 교수’ ‘진보 언론인’들이 그 선두에 서고, 걸핏하면 ‘빵에 갔던 이야기’를 들먹이는 전국 도처의 진보 아저씨들이 뒤를 받친다. 강준만은 ‘싸가지’를 말했지만 순수한 사기극일 뿐이다.
꽤 많은 인민들은 진즉 사기극을 알아챘다. 박근혜가 좋아서가 아니라 진보가 미워서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나 진보나 결국 저희 좋으려고 하는 건 똑같은데 진보는 정의와 윤리를 독점한 양 설레발을 치니 빈정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분노가 뒤틀려 튀어나온 게 바로 ‘일베’다. 일베는 보수에 현혹된 청년들이 아니라 진보에 반발해 오른쪽으로 치닫게 된 청년들이다.
그런데도 진보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인민들을 우매하다 욕하고 일베를 ‘벌레들’이라 경멸을 퍼부으니, 인민의 반발도 더욱 늘어만 간다. 하는 짓으로 보면 이미 바닥을 쳤을 박근혜 지지율이 그렇지 않은 것도 그런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아수라 속에서 1%의 왕국은 더욱 더 공고해진다. 진보는 늘 수구를 욕하지만, 현실에 미치는 실제 영향으로 말하자면 수구보다 더 수구가 된 지 오래다.
급진적 진보정치나 의미 있는 급진 세력은 대부분 수구적 진보에 흡수되거나 무기력한 상태다. 딱 하나의 가능성만 남은 듯하다. 청년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체제는 청년들의 급진성을 움 틔우고 양성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사회가 세습 엘리트 계층이 지배하는 신분 사회임에도 안정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우수한 비엘리트 계층 청년들에게 쿼터를 주기 때문이다. 그걸 다 막아버리면 결국 터지게 되고 체제는 위험에 빠진다는 걸 그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안다.
한국은 그걸 완전히 막아버린 상태다. 보수와 진보의 연합으로 말이다. 이대로라면 터질 수밖에 없다. 멘토 앞에서 청년들의 눈빛이 달라진 건 그 조짐 중 하나다. 물론 이런 현실이 급진성만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먼저 대다수의 무력한 상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베의 출현은 그 반대편, ‘자생적 급진주의자 청년들’의 출현 또한 가능하다는 뜻이다. 도래할 청년들의 주제는 ‘최소한의 상식’이나 ‘언론 자유’가 아니라 ‘노동’과 ‘계급’일 것이다. 그런 개념들을 학습하거나 의식화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맹렬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찰, 어느새 실제적 수구가 되어버린 자신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성찰하는 진보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역할 모델로 알프레드를 떠올려 본다. 연륜과 경험으로 주인공이 제 역할을 해내는 데 필요한 모든 채비를 하면서 또한 정중하게 자문하고 충고하는 배트맨의 집사이자 멘토, 알프레드 말이다. 혹여 주인공이 아니라서 불편한가. 괜찮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아니던가. (
혁명은 안단테로)
트랙백 주소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