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03/31 그렇게 살지 마세요
  2. 2015/03/20 ‘지금 여기’의 용기
  3. 2015/03/19 잘 모른다
  4. 2015/03/11 역사의 거울 앞에서
2015/03/31 12:36
보름 후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해가 된다. 여전히 제대로 된 진실 규명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사건 1심 재판부는 “복원력이 매우 안 좋은 배에 지나치게 많은 화물을 부실하게 실었는데, 사고 당일 변침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조타 실수가 있었다”고 침몰 원인을 정리하지만 누구도 그게 침몰 원인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히려면 ‘세월호’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양 작업은 미루어지고 있다. 인양 작업을 미루는 힘과 사고 원인을 은폐하려는 힘은 같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업무와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힘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분야에서 이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구체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연안 여객선을 지자체에서 인수하여 공공 운영하는 방안 같은 것이다. 의미 있고 실효성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그런 방안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이 사건이 온전히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월호 사건은 배의 문제였지만, 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가 배의 문제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배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건 배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가 남았다는 뜻일 뿐이다.

비난 여론이 한참일 때 박근혜씨는 카메라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사과했다. 철저한 진실 규명과 피해자 가족들과의 성실한 소통도 약속했다. 그러나 여론이 어지간해지자 사과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박근혜씨의 행태가 사악하고 파렴치하다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가 박근혜씨의 태도를 바꿀 순 없었다. 박근혜씨의 태도는 내면에서 나온 어떤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여론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난 여론에 사과가 필요했듯 ‘이제 그만하자’는 여론에는 사과가 필요없었다.

비극적이고 불의한 사건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히고 내 삶이 잠시 뒷전이었음을 불현듯 깨닫는다. 여론은 그렇게 변화한다. 어느 사회든 예외는 없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사회마다 다르며 속도가 느릴수록 성숙한 사회라 여겨진다.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가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른 편임을 보여주었다. 슬픔과 분노를 SNS에 도배하고 문화 예술 공연마저 불경한 짓이라 욕하던 사람들이 먹고 있는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며 킬킬거리게 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지나칠 만큼 짧았다. 왜 그렇게 짧았으며 짧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박근혜의 ‘사라진 사과’와 함께 사라진 또 한 가지, 성찰이다.

세월호 사건은 돈 귀신 들린 세상과 그런 세상과 타협한 사회 성원이 만들어낸 필연적 비극이자, 거대하고 장기적인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성찰도 터져나왔다. ‘아이를 더 이상 이렇게 키우지 않겠다’ ‘아이의 미래 행복을 핑계삼지 않고 지금 아이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단들이 도처에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성찰이 사라진 자리는 사라진 다른 한 가지, 박근혜의 ‘사라진 사과’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비난’과 ‘박근혜 핑계’의 경계는 생각보다 얇았다. ‘사라진 사과’와 ‘사라진 성찰’은 연동했고 서로 의지했다. 둘은 잠시 브레이크가 걸렸던 돈 귀신 들린 세상의 재가동 신호였다. 둘은 실은 하나였다.

제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 해도 시간은 어김없이 분노의 열기를 식힌다. 식혀진 분노는 오로지 성찰로만 지속된다. 성찰이 사라지면 분노도 사라지며 분노가 사라지면 진실은 묻힌다. 성찰은 진실을 밝히는 유일한 연료이며 가장 강력한 무기다. 성찰은 덮어놓고 ‘내 탓이오’를 외치는 게 아니다. 성찰은 사건을 만든 악의 총체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최악만이 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최악의 가장 큰 해악은 최악 자체가 아니라 최악 덕에 다른 악이 면책되는 것, 그래서 악의 총체성이 지워지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 수많은 비극적 사건 가운데 특정한 사건만이 사회적으로 사유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건의 규모가 크고 희생자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원인이 사회적이며 해결 또한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사유되고 사회적으로 추모된다. 사회적 추모는 ‘억울하게 죽은 불쌍한 아이들’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추모는 시간에 씻겨 내릴 뿐 아무런 사회적 변화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추모는 그 아이들의 죽음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어야 한다.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를 잊지 마세요’는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아이들을 통해 하려는 말이다. 그 말엔 그 아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려는, 그 아이들의 말을 우리의 필요와 편리에 맞게 편집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그 아이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은 ‘그렇게 살지 마세요’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바꿔달라는, 그래서 그 아이들이 떠나기 전에 이미 10대 사망 원인의 첫째가 자살이던 ‘아이들의 지옥’을 더 늦기 전에 바꿔달라는 당부일 것이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3/31 12:36 2015/03/31 12:36
2015/03/20 20:15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이 부분에 대한 오독을 발견하곤 한다. ‘감히 박유하를 아렌트에 비교하다니’ 식의 천박한 기지촌적 태도 따윈 접고 가기로 하자. 아렌트의 특별함은 아이히만이라는 악마가 실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한 데 있지 않다. 그런 발견은 아렌트가 아니어도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냉정하게 지켜본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아렌트의 특별함은 그런 발견을 사회적으로 개진한 ‘용기’에 있다. 동족들에게서 어떤 매도와 고초를 당하게 될지 잘 알면서도 말이다. 박유하는 아렌트와 물론 다르다. 그러나 박유하의 용기는 아렌트의 그것과 유사한 것이다. 박유하의 책에 나오는 위안부 문제의 다양한 사실관계를 아는 사람은 박유하 한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걸 사회적으로 개진했을 때 어떤 상황에 직면한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를 보인 사람은 박유하뿐이다. 박유하를 친일파라 분개하는, 일본 극우에 봉사한다고 비난하는 진보적인 인텔리들에게 물어보자. 친일파에 분개하는 데 용기가 필요한가. 일제 말기에 친일파에 분개하는 덴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 한국에서 친일파를 반대하는 덴 아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오늘 한국에서 용기가 필요한 건 오히려 친일파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이다. 아이히만 재판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옹호하는 덴 각별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인텔리가 악의 평범성을 옹호하는 건 용기는커녕 술자리 안주도 못된다. 아렌트 당시의 이스라엘이든 일제 말기의 조선이든 오늘 한국이든 혹은 다른 시간 다른 곳이든,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좀더 나은 현실은 만들어가는 건 오로지 용기, ‘지금 여기’의 용기뿐이다.
2015/03/20 20:15 2015/03/20 20:15
2015/03/19 20:17
아이를 보며 종종 되새겨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모의 비극이 시작된다.
2015/03/19 20:17 2015/03/19 20:17
2015/03/11 14:11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토론과 논쟁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맥락)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텍스트 읽기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다. 맥락이 생략된 텍스트 읽기는 오독이나 악의적 왜곡에 이용된다. 특히 이 책처럼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담은 텍스트인 경우, 논쟁은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적 상징체계에 포획되어 버린다. 다들 진지하고 열띤 얼굴로 견해를 말하지만 실은 그 상징체계가 주입한 이런저런 주문을 암송할 뿐이다.

눈곱만큼이라도 유의미한 논쟁이 되려면 상징체계를 박차고 나가, 비로소 내 견해를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즉각적이고 단순명료한 반응과 판단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문제가 된 ‘매춘부’ ‘동지적 관계’ 등 텍스트 조각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의 적확한 요약이 되기도 하고, 책에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보수 세력은 오랜 권위주의 독재 시절을 통해 반일 정책을 표방하며 일본 극우세력과 야합하는 이중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개탄하는 데 그치는 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문제는 ‘반일’이라는 개념 자체의 기만성에 있다. 일제 식민지 경험은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아니라 일본 지배계급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일본 민중 역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했으며,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이해를 같이했다. 해방 후 지배계급으로 남은 그들은 모든 것을 민족 간의 문제로 은폐하고 기만했다.

그런 기만은 진보 세력에게도 답습된다. 한국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미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을 받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 세력 안에서 한국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라 해석되곤 했다. 진보 운동은 ‘민족주의+진보(계급)’라는 모순적 상태를 지속해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계급이라는 ‘체’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진보(계급)의 괴멸도 지속되었다. 조직노동(민주노총)이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적 현실을 외면하고, 진보정당이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면서 지리멸렬해진 내적 원인도 결국 그것이다.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제국의 위안부>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위안부 문제 활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정대협의 활동은 ‘위안부 소녀상’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소녀상이 담은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은 사실관계와 문제의 본질을 동시에 거스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든 창녀든 예수의 어머니이듯, 모든 생존 위안부는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든 안 하든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다.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에 대한 정대협의 부당한 태도는 위안부 운동이 생존 위안부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존 위안부들이 위안부 운동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묻게 한다.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성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친일 문제에 대해 단순명료한 태도를 보이는 나는, 독립이나 해방을 좇는 사람은 이미 ‘비현실적’이라 치부되던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살았어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그것은 현재의 지배체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내 태도로 추정될 수 있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이를 밤늦도록 학원을 돌게 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다른 분파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유일한 사회적 희망이라 생각한다면 그 태도는 허상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태도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문화적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습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습관을 직시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처음으로 우리의 습관을 적확하게 비판하거나 해체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즉 해체했어야 한다며 고마워할까, 아니면 아렌트 앞의 유대인들처럼 격렬하고 집단적인 반감을 보일까. 박유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답을 보여준다. (경향신문, 혁명은 안단테로)
2015/03/11 14:11 2015/03/11 1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