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Would You Do?)라는 미국식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 있다. 이따금 페이스북에 떠서 보곤 하는데 인종차별, 성소수자, 여성 외모의 대상화 등 꽤 사회적인 주제가 많다. 인상적인 건 설정된 부당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매우 다수라는 점이다. 그중 일부는 저 사람이 과연 일반 시민인가, 혹시 짜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몸에 밴 논리정연하면서도 직관적인 언변을 구사한다.
미국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미국 사회의 선진국적 면모에 새삼 감동했다, 따위 싱거운 소릴 하려는 건 아니다. 오늘날 미국처럼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끝도 없는 사회가 있던가. 자본주의적 모순과 폐해가 노골적으로 집약된 사회이면서도 급진세력은 씨가 말라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평범한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애국심과 제 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지배계급의 이념 공작에 대다수 사회 성원들이 포섭된 사회라는 평가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에서 미국인들 역시 그런 미국의 일부일 뿐이라 여겨도 된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남는 어떤 불편함은 한국 사회의 풍경과 겹쳐져서다. 오늘 한국의 어지간한 시민들에게서 애국심이나 제 나라에 대한 자긍심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소수의 도둑들이 주인인 몹쓸 나라라는 분노와 비판이 폭발하고 있다. 그런데 저항적인 열기로 가득 찬 한국은 왜 미국보다 낫긴커녕 갈수록 캄캄한 아수라장인 걸까. 역시 모든 게 박근혜 일당 때문이고, 박근혜를 지지하는 우매한 사람들 때문인가. 사회를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하는 건 편한 일이지만, 아쉽게도 사회는 단 한번도 그렇게 단순했던 적이 없다.
한국 시민들에게 미국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어떤 결핍이라도 있는 걸까. 찬찬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그 분명한 것 하나는 ‘자유’일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를 위한 민주주의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든 자유민주주의의 미덕을 믿는 사람이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Liberal Democracy’를 옮긴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유는 ‘리버티’(Liberty)가 아니라 ‘프리덤’(Freedom)에 편중되어 있다. 리버티와 프리덤은 똑같이 ‘자유’라 번역되지만 실은 다른 말이다. 한국어엔 리버티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리버티가 프리덤과 구분되어 이해되거나 시민의식 속에 제대로 뿌리내릴 기회도 없었다.
프리덤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리버티는 사회 성원들이 서로에게 배분한 책임감을 수반한 자유다. 루소, 밀, 로크 등 근대적 민주주의를 설계한 사람들의 공통된 화두였던 그 자유다. 프리덤은 내 자유와 다른 사람의 자유가 부딪치고 침해될 수 있다. 그러나 리버티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존하는 자유다. 리버티는 시민의 교양과 닿아 있다.
미국이 유럽과 같은 좌파의 씨가 말랐으면서도 완전한 지옥을 모면하는 비결은 리버티에 있다. 예의 프로그램에서 확인되듯 리버티는 상당수 미국인들의 삶과 의식에 배어 있고,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자긍심도 무지한 국가주의도 있지만 ‘리버티로 구성된 나라’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으며, 그게 민주당이라는 리버럴을 한국의 민주당과는 다른 제법 진보적인 리버럴로 만드는 힘이다.
한국에서 리버티가 없는 것에는 단지 마땅한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국 보수에게 자유는 ‘공산독재로부터 자유’에서 기인했고 여전히 그렇다. 한국 진보에게 자유는 ‘반공독재로부터 자유’에서 기인했고 여전히 그렇다. 둘 다 과거의 현실에 퇴행적으로 머물러 있다. 둘 다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스스로가 아니라 상대의 부정을 통해 만들어낸다. 둘은 서로 싸울 수 있을 뿐 제 나름의 사회를 구현할 능력은 확인된 바 없다.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일 뿐, 엘리트의 책임감이나 품위와 헌신 같은 건 개념조차 없다. 진보는 모든 걸 보수의 탓으로 돌리며 ‘인간이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시민들에게 하소연하는 데 능할 뿐 정작 자신들이 보수와 뭐가 다른지는 늘 우물거린다.
어느 사회보다 무성한 사회적 토론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보수의 자유로운 진보 까대기와 진보의 자유로운 보수 까대기를 제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보수 시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종북 좌파’라 싸잡아 까대고 진보 시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수구 꼴통’이라 싸잡아 까댄다.
‘보수와 진보는 적대적 공생 관계다’라는 비판은 둘의 생존 풍경을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그 허망하고 거대한 쳇바퀴에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자유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민들은 그들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만든다. 자유가 비어 있다면,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도 자유 너머를 전망하는 노력도 소용없는 일이니.(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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