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1/26 21:38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Would You Do?)라는 미국식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이 있다. 이따금 페이스북에 떠서 보곤 하는데 인종차별, 성소수자, 여성 외모의 대상화 등 꽤 사회적인 주제가 많다. 인상적인 건 설정된 부당한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매우 다수라는 점이다. 그중 일부는 저 사람이 과연 일반 시민인가, 혹시 짜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몸에 밴 논리정연하면서도 직관적인 언변을 구사한다.

미국 방송 프로그램을 보고 미국 사회의 선진국적 면모에 새삼 감동했다, 따위 싱거운 소릴 하려는 건 아니다. 오늘날 미국처럼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끝도 없는 사회가 있던가. 자본주의적 모순과 폐해가 노골적으로 집약된 사회이면서도 급진세력은 씨가 말라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평범한 미국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애국심과 제 나라에 대한 자긍심은, 지배계급의 이념 공작에 대다수 사회 성원들이 포섭된 사회라는 평가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에서 미국인들 역시 그런 미국의 일부일 뿐이라 여겨도 된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남는 어떤 불편함은 한국 사회의 풍경과 겹쳐져서다. 오늘 한국의 어지간한 시민들에게서 애국심이나 제 나라에 대한 자긍심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대한민국은 소수의 도둑들이 주인인 몹쓸 나라라는 분노와 비판이 폭발하고 있다. 그런데 저항적인 열기로 가득 찬 한국은 왜 미국보다 낫긴커녕 갈수록 캄캄한 아수라장인 걸까. 역시 모든 게 박근혜 일당 때문이고, 박근혜를 지지하는 우매한 사람들 때문인가. 사회를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하는 건 편한 일이지만, 아쉽게도 사회는 단 한번도 그렇게 단순했던 적이 없다.

한국 시민들에게 미국 시민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어떤 결핍이라도 있는 걸까. 찬찬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그 분명한 것 하나는 ‘자유’일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다.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를 위한 민주주의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든 자유민주주의의 미덕을 믿는 사람이든,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Liberal Democracy’를 옮긴 말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유는 ‘리버티’(Liberty)가 아니라 ‘프리덤’(Freedom)에 편중되어 있다. 리버티와 프리덤은 똑같이 ‘자유’라 번역되지만 실은 다른 말이다. 한국어엔 리버티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리버티가 프리덤과 구분되어 이해되거나 시민의식 속에 제대로 뿌리내릴 기회도 없었다.

프리덤은 어떤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상태,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러나 리버티는 사회 성원들이 서로에게 배분한 책임감을 수반한 자유다. 루소, 밀, 로크 등 근대적 민주주의를 설계한 사람들의 공통된 화두였던 그 자유다. 프리덤은 내 자유와 다른 사람의 자유가 부딪치고 침해될 수 있다. 그러나 리버티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공존하는 자유다. 리버티는 시민의 교양과 닿아 있다.

미국이 유럽과 같은 좌파의 씨가 말랐으면서도 완전한 지옥을 모면하는 비결은 리버티에 있다. 예의 프로그램에서 확인되듯 리버티는 상당수 미국인들의 삶과 의식에 배어 있고, 미국인들의 애국심과 자긍심도 무지한 국가주의도 있지만 ‘리버티로 구성된 나라’에 대한 것인 경우가 많으며, 그게 민주당이라는 리버럴을 한국의 민주당과는 다른 제법 진보적인 리버럴로 만드는 힘이다.

한국에서 리버티가 없는 것에는 단지 마땅한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국 보수에게 자유는 ‘공산독재로부터 자유’에서 기인했고 여전히 그렇다. 한국 진보에게 자유는 ‘반공독재로부터 자유’에서 기인했고 여전히 그렇다. 둘 다 과거의 현실에 퇴행적으로 머물러 있다. 둘 다 정체성과 존재 가치를 스스로가 아니라 상대의 부정을 통해 만들어낸다. 둘은 서로 싸울 수 있을 뿐 제 나름의 사회를 구현할 능력은 확인된 바 없다. 보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내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식일 뿐, 엘리트의 책임감이나 품위와 헌신 같은 건 개념조차 없다. 진보는 모든 걸 보수의 탓으로 돌리며 ‘인간이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시민들에게 하소연하는 데 능할 뿐 정작 자신들이 보수와 뭐가 다른지는 늘 우물거린다.

어느 사회보다 무성한 사회적 토론이 존재하는 듯하지만, 보수의 자유로운 진보 까대기와 진보의 자유로운 보수 까대기를 제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보수 시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종북 좌파’라 싸잡아 까대고 진보 시민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수구 꼴통’이라 싸잡아 까댄다.

‘보수와 진보는 적대적 공생 관계다’라는 비판은 둘의 생존 풍경을 매우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그 허망하고 거대한 쳇바퀴에 휩쓸리지 않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사람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자유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시민들은 그들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만든다. 자유가 비어 있다면,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도 자유 너머를 전망하는 노력도 소용없는 일이니.(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1/26 21:38 2015/01/26 21:38
2015/01/25 11:42
경제적 결핍을 비롯, 결핍은 사람으로 하여금 품위 유지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결핍은 흔히 생각하듯 지나치게 적은 상태뿐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상태에서도 나타난다. 적당한 상태에서만 결핍을 벗어날 수 있다.
2015/01/25 11:42 2015/01/25 11:42
2015/01/23 21:43
더는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지 않고 더는 누구도 마음깊이 사랑하지 않을 때 영혼의 죽음을 맞는다. 상상과 사랑에 가차없어야 한다. 걸어다니는 고깃덩어리가 될 순 없지 않은가.
2015/01/23 21:43 2015/01/23 21:43
2015/01/21 13:31
“자녀를 특목고와 명문대에 보내는 강남 좌파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도 이상해요. 보수 인사뿐만 아니라 김규항 선생처럼 진보적인 분도 이런 얘기를 하던데,그러면 특목고와 명문대는 우파의 자녀들이 독식하기라도 해야 마땅하다는 건가요? 물론 대외적으로는 진보적인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집안에서는 자녀를 몰아세우는 진보적 지식인의 행태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일리가 있는 얘기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한, 자녀를 특목고에 보낸 유시민, 조국, 곽노현, 신영복 등 가운데 그것 때문에 안달하거나 자녀를 닦달한 사람은 없어요.”(이범 <우리 교육 100문 100답>)

오랜만에 들른 대형서점에서 미처 챙겨 읽지 못한 교육 관련 책들을 훑어보다 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종종 이런 오해를 만나곤 합니다. 물론 순수한 오해도 있고, 오해의 형식으로 불편이나 반발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어쨌거나 “특목고와 명문대는 우파의 자녀들이 독식하기라도 해야 마땅하다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답을 하면 이렇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오해가 나오게 된 제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보수적인 부모는 편안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또 이런 것입니다. “보수적인 부모의 교육 목표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는 것이다. 진보적인 부모의 교육 목표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진보 부모는 이념이나 세계관뿐 아니라 먹고사는 데 별 문제가 없는 중간층 인텔리 부모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데는 실은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서민 부모들의 울분입니다.

서민 부모들이 많이 참여한 교육 강연을 하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 참 잘 들었습니다” 하고 나서는 “그런데 선생님 자녀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청중은 자글자글 웃고 저도 웃지만 질문엔 깊은 울분이 담겨 있습니다. 질문을 풀면 이런 겁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 교육문제 비판하고 교육의 변화 말하는 사람들, 자기 아이들은 다 알뜰하게 경쟁교육 챙기지 않나. 진보인사라고 하는 사람들 치고 아이 일찌감치 외국 보내거나 특목고 보내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당신들 말 순진하게 믿고 경쟁교육 피하다간 나와 내 아이만 바보된다. 안 속는다!”

그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곤혹스럽습니다. 뒤가 구려서가 아닙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저에겐 올해 스물두 살 된 딸과 열아홉이 된 아들이 있는데 둘 다 입시 경쟁교육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시킨 게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길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질문에 “난 그런 이중적인 진보가 아닙니다. 언행일치의 진보입니다”라고 답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래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고 제 아이들의 교육 상황에 대해 아이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찬찬히 답을 하곤 합니다. 그럼 또 질문이 꼬리를 물고, 저는 또 답합니다.

강남 좌파라 불리는 이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서민 부모들의 울분은 강남 좌파의 아이들이 특목고와 일류대를 가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억지로 특목고·일류대에 보내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공부도 재능의 하나이니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공부로 나가는 게 좋겠지요. 문제는 서민 부모의 아이들은 공부에 재능이 있어도 특목고와 명문대에 가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교육이 시장의 바다에 던져지면서 특목고와 일류대는 빠른 속도로 상위계층 아이들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사교육에 들어가는 돈과 성적의 상관관계가 갈수록 분명해지면서 상위계층 부모들이 제 아이들의 성적을 비정상적 수준까지 끌어올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집 아이들이 잠 안 자며 열심히 한다고 해도 따라가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빠듯하게 영어학습지 구독하는 아이와 강남의 이름난 영어강사에게서 강의를 듣고 방학 때면 영국이나 미국에서 지내는 아이가 영어성적 경쟁을 하면 누가 이길까요? 그건 경쟁이 아닙니다. 그걸 경쟁이라고 말한다면 사람을 조롱하는 일이죠.

서민 부모들은 그런 경쟁현실 속에서 가랑이가 찢어져도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육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변화를 말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는데, 가만 보니 그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은 다 알뜰하게 경쟁교육 챙기더라는 겁니다. 물론 강남 좌파라 불리는 사람들이 강남 우파보다 부자는 아닙니다. 대체로 중산층 수준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안정에 교육적 문화자본(대개 우등생이었고 공부를 좋아하는 그들의 유전자와 환경이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향)이 합쳐지면서 강남 우파와 대등한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범 선생 표현을 빌리면, 굳이 안달하거나 아이를 닦달하지 않고도 말입니다.

물론 그래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강남 좌파든 진보든 이 냉혹한 세상에서 제 아이의 안위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체 진보라는 게 뭔가요. 적어도 나와 내 새끼의 안위만 챙기는 데 그치지 않는 사람 아닌가요. 남의 문제, 남의 새끼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하며 좀 더 나은 현실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들이 아이에게 안달하지 않고 닦달하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들의 경제적 안정과 각별한 문화자본 덕입니다. 경제적 안정도 문화자본도 없는, 안달하고 닦달할 건덕지도 없는 부모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기득권을 점잖게 행사하기만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돈 내가 쓰는 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강남 우파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요.

그래서 저는 ‘진보 부모가 그럴 수 있는가’라는 강퍅한 비판을 ‘그렇게 교육하면서 굳이 진보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고쳐 함께 생각하고 싶습니다. 강남 우파 부모는 아이가 조중동을 애독하는 일류대 학생이 되길 바라고, 강남 좌파 부모는 제 아이가 경향과 한겨레를 애독하는 일류대 학생이 되길 바라는 게 상황의 전부라면 교육에서 진보의 가치는 없는 셈입니다. 변화도 없는 셈입니다. 아이의 재능과 가능성을 제한하거나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내 아이, 남의 아이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할 때 비로소 더 나은 교육 현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말입니다.

“세상의 오른쪽엔 우파 부모들이 있고 왼쪽엔 좌파 부모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 가난한 부모들이 있다.” 이게 현실이고, 우리는 그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2015/01/21 13:31 2015/01/21 13:31
2015/01/18 21:47
‘표현의 자유는 좌파 활동의 기반’이라 말하는 좌파를 종종 본다. 굳이 부인할 이유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굳이 강조할 이유도 없는 말이다. 표현의 자유는 좌파뿐 아니라 우파, 극우파 등 모든 정치 활동의 일반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좌파가 주의할 것은 이미 충분히 강조되고 있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거듭된 옹호보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주의적 옹호에 휩쓸림으로써 자유주의자들의 전략에 포섭되는 어리석은 상황이다. 부시는 입버릇처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테러리즘과 싸운다’고 말했다. 사르코지는 이번 테러가 ‘문명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와 문명은 무엇인가. 자유시장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다. 누구나 구매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자유,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구축된 부자의 왕국/부자의 문명이다. 물론 그들은 꼴통이며 보수적인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개혁적, 진보적 자유주의자라 해서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건 아니다. 부자의 왕국/부자의 문명을 대놓고 옹호하는가 세련되게 옹호하는가의 차이일 뿐, 자유주의자는 자유주의자일 뿐이다. 좌파가 옹호하는 자유와 문명이 자유주의자들의 것과는 다르다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옹호도 그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반공주의를 비롯하여 자유주의자들의 선전 선동의 골간은 언제나 ‘자유 수호’였다. 좌파는 자유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의 기만적 자유와 싸우는 사람들이다.
2015/01/18 21:47 2015/01/18 21:47
2015/01/18 21:46
샤를리 에브도의 표현의 자유를 애써 옹호하는 사람이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표현의 자유는 옹호하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들이 옹호하는 건 샤를리 에브도도 표현의 자유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2015/01/18 21:46 2015/01/18 21:46
2015/01/11 20:18
담배를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끊는 것'이다. 나머지 방법들은 실은 담배를 끊는 방법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미련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2015/01/11 20:18 2015/01/11 20:18
2015/01/08 15:25
그 철딱서니 없는 중에게 실망했다 욕하는 사람들이 그 철딱서니 없는 중에게 기대했던 자신에게도 조금은 실망하길 빈다. 부질없는 기대와 실망을 또 반복하지 않기 위해.
2015/01/08 15:25 2015/01/08 15:25
2015/01/06 07:47
‘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한 대대적 분노에서 특기할 점은, 기장의 책임은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비행기는 배와 함께 육상 운송수단과는 달리 목숨을 내맡기고 타는 운송수단이다. 기장과 선장의 책임과 권한은 버스 기사나 철도 기관사와 차원이 다르다. 비행기에서 승객 안전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전적으로 기장에게 있다. 기장은 그런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고도의 훈련과 경험을 쌓고 또 유지하며, 비행기 안에서 승객 안전과 관련한 제왕적 절대권력을 갖는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잘 알기에 ‘하늘을 나는 기계덩어리’에 비교적 편안한 얼굴로 목숨을 맡기는 것이다. 만일 기장이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지 않는다거나,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이를테면 만취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회사 임원의 지시에 따라 비행기를 움직인다면 아무도 제정신으로는 비행기를 탈 수 없을 것이다.

조현아씨는 비행기 안에서 기장에게 명령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조현아의 회항 요구는 단지 무시되거나 억지되어야 할 행동이며, 심한 경우 기내 난동일 뿐이다. 기장이 조현아의 난동을 명령으로 따른 이상, 그에겐 승객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책임이 있다. 법적으로 말하면 ‘항공 안전과 보안에 관한 법규 위반 및 책임회피’의 책임이다. 대한항공이라는 회사의 전근대적 내부 상황으로 볼 때, 기장의 곤란한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할 순 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을 얼마나 물을 것인가’의 문제이지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갑의 횡포에 지친 을들이 조현아의 행동에 분노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분노가 조현아의 비행 명령권을 전제하고 있다는 건 애석한 일이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분노의 외양을 한 존경’이기 때문이다. 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조현아의 명령이 아니다. 조현아의 명령권은 부인되어야 한다. 을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조현아의 난동이다. 그리고 조현아의 난동이 명령이 되어버리는 구조, 즉 대한항공의 노동 현실이다.

10년가량 영업하다 2006년 철수한 프랑스 대형마트 까르푸는 ‘노조 탄압은 백화점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악명 높았다. 노동자들의 단체행동 앞에서 프랑스인 임원의 저급한 행동(조현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행동은 그 임원 개인의 인격 문제였을까. 그럴 수도 있다. 워낙에 못되어먹은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런 못되어먹음을 멋대로 드러낼 수 있는 구조다. 프랑스에서였다면 그 임원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랬다간 해당 노동자들은 물론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프랑스의 구조에선 불가능한 게 한국의 구조에선 가능했던 것이다.

까르푸의 일은 노동계에서 꽤 논란이 되었지만 이번처럼 대대적인 대중적 분노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동안 을들의 분노나 분노의 연대가 많이 진전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여전히 구조가 아니라 못되어먹은 개인에게 머문다는 점에선 진전이 없어 보인다. 그런 분노가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일까. 못되어먹은 조현아를 감옥에 보내는 것, 앞으로 대한항공의 임원들이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에게 반말과 욕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재벌 사업장에서도 조금은 그런 영향을 받을 가능성. 정리하자면 일부 갑들의 매너가 달라질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 매너를 낳은 구조가 그대로라면 매너의 변화는 을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갑과 을의 사회에서 을들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할까. 갑이 되는 것? 당해온 만큼 갑에게 되갚아주는 것? 당해온 만큼 되갚아주기까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 그것들은 모두 가능하지 않거나 소용없는 감정적 배설일 뿐이다. 의미있는 목표는 하나뿐이다. 갑도 을도 없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당장은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목표지만, 어쨌거나 그걸 목표로 연대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만 작더라도 실제적인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은 옛 구조 속의 나 또한 새롭게 바꾸는 일을 포함한다. 기장의 처지와 행동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과 기장의 책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은 동시에 존재해야만 한다. 기장의 책임을 덮는 건 기장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조현아에 분노하면서 그의 명령권을 인정하는 것이 조현아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분노의 외양을 한 존경이듯 말이다. 머슴 신세가 되어버린 을들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은 ‘나는 머슴이 아니다. 존엄을 가진 인간이다’라는 선언일 것이다. 조현아에 대한 분노는 ‘나는 머슴이다. 그러나 머슴이라고 함부로 욕하진 마라’에 머문다. 그게 지금 더도 덜도 아닌 한국 을들의 좌표다.

그럼에도 한국의 을들은 희망의 편린을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분노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일로 당사자가 전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 흘리고 그 아비가 ‘자식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사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분노의 양만큼은 어느 사회와 비교해도 높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분노의 목표점만 제대로라면 구조를 바꿀 가능성도 어느 사회보다 높다는 말일 수 있다. 오늘 한국의 을들에게 필요한 구호는 ‘분노하라!’가 아니라 ‘분노를 조준하라!’인 셈이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5/01/06 07:47 2015/01/06 07:47
2015/01/05 07:48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걸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체제의 쇼.
2015/01/05 07:48 2015/01/05 07:48
2015/01/01 00:00
몸이 늙는 건 숙명이지만 정신이 늙는 건 선택이다.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 있고 스물의 몸에 일흔의 정신을 가진 노인이 있다 새해엔 부디 청년이시길. 냉철하고 뜨거운 청년이 되어 먼저 스스로 해방되시길.
2015/01/01 00:00 2015/01/01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