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용도’에서 정성일 씨의 글을 '화려 및 혼미'하다고 적었는데, 한 페친이 내가 화려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전에 문장론에서 확인했지만, '책'이라는 글에 달린 홍기빈 씨 댓글에 대한 댓글에서 내가 혼미를 부정적으로 썼다며 역시 그런 뜻이냐, 그렇다면 혼미한 문체 일반에 대해 부정적이냐고 물어왔다. 세상엔 여전히 섬세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음미하며 답했다.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이 있는 듯합니다. 지적 파탄과 도주로서 혼미도 있지만 감성적 과정(혹은 영적 상태)으로서 혼미도 있으니까요."
'2014/11'에 해당되는 글 11건
2014/11/30 12:35
2014/11/27 08:33
며칠 전 늦은 밤 백현진씨가 전화를 해선, 어어부 신보(탐정명 나그네의 기록) 작업이 마무리 되어 가는데 마스터링 전에 들어보고 글을 써줄 수 있냐고 했다. 용도는 딱히 정하진 못했는데 내가 이걸 듣고 뭐라고 쓸지 매우 궁금해져서, 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들어보고 쓸 이야기가 없으면 안 써도 좋단다. 용도를 정하지 않고 글을 부탁하는 건 친구 끼리나 가능한 일이겠지만(혹은 부탁을 수락함으로써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겠지만), 용도에 묶이지 않으면 오히려 편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신보를 미리 들어보는 것 자체가 긴요한 용도이거니와. 전에 비슷한 일이 딱 한번 있었단다. 2011년 솔로라이브 앨범(찰라의 기초)을 낼 때 정성일 씨가 꽤 긴 글을 썼다고 했다. 정씨도 정해진 용도 없이 썼고 나중에 씨네21에서 앨범리뷰로 실었던 모양이다. 정씨의 글을 받아 읽었다.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좀더 '화려 및 혼미'했다. 나는 그 반대풍의 글을 쓰려나. ‘맛보기’라며 보내준 세 곡을 듣고 있다.
2014/11/26 09:54
2014/11/26 09:52
2014/11/24 21:26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가 “나라가 전체적으로 괴멸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라고 했다. 친구는 작은 출판사를 하는데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갈수록 자기가 누구인지 뭘 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모르는 듯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은데,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만 그런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친구는 ‘너무들 돈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까’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비슷한 생각을 하던 처지라 말을 보탰다. “어딜 가나 다 그런 것 같아. 부모들만 보더라도 다들 교육문제 교육문제 하지만 교육이 뭔가에 대해 고민하는 부모는 거의 없지. 네 말마따나 영혼이 없는 부모랄까.”
너무들 돈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까, 는 역시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것일 게다. 그러나 발단은 박정희 시절로 올라간다. 일제 때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 후 잠시 사회주의자였던 박정희는 제 이력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경제개발에 몰두했다. 극도로 생산력이 낮고 빈곤이 만연한 사회에서 경제개발이 갖는 미덕을 무작정 부인할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진행된 경제개발은 영혼의 개조작업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잘 산다’는 것의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돈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어냈다. 박정희의 ‘새마을’은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의 행복을 폐기한 마을이었다. 박정희의 사전 정지작업과 김대중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신자유주의가 결국 한국을 영혼 없는 사람들의 나라로 만든 셈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박근혜에게 돌리고 저주를 퍼붓는 걸로 영혼 없음의 공허를 채우려 든다.
내 이야기를 좀 할까 싶다. 나 개인 이야기가 아니라 관련된 하나의 사례로서 말이다. 나는 종종 내가 사람들에게서 매우 비현실적인,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반이명박 운동이 진보의 대세가 될 무렵 ‘이명박 반대는 당연하지만 또 다른 신자유주의 세력에게 봉사하는 건 경계한다’ 식의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미지가 강화되었던 것 같다. 그런 사회주의자가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그런 사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체질이 아니랄까. 사회주의자란 사회구조와 인간의 행복의 관련성을 높게 보는 사람들 아닌가. 나는 여느 사람들에 비해서도 그 관련성을 높게 보는 편이 아니다. 행복을 찍어내기엔 인간이란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없다. 이상주의자의 시효는 이상주의적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선언되는 순간까지다. 그 순간부터 이상주의자의 역할은 이상주의적 사회의 훼손에 있다. 언제나 그렇다. 나는 이상주의적 사회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상주의적 사회에 회의적인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봐도 현재 진행 중인 역사를 봐도 그렇고 인간은 구제불능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진 동물이다. 인간과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다른 종이 있어 그의 눈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보자. 한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종끼리 뜯어먹고 잡아먹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우아한 얼굴로 인문학과 예술과 구원과 심지어 미각을 말하는 동물을 말이다.
나는 인간이 인간의 사회에 대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생각하기보다는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생각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고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들 역시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적은 사회 구조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큰 욕심 없이 그저 제 식구 건사하고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이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야만 한다거나, 빈부 격차가 지나치게 커서 극소수의 안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힘들게 살아야만 한다거나, 아이들이 경쟁 때문에 제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시들어가는 게 당연시된다거나 하는 사회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인간의 일이다.
열거한 상황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념은 둘뿐이다. 자본주의를 인정하는(보수적으로든 개혁적으로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혁명적으로든 합법적으로든) 사회주의(사민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은 의식하든 않든 둘 중 하나에 속해 살아간다. 나는 사회주의적 교조에 투철하지 않고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상황들을 (좀 더 나은) 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자다.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자유주의자일 순 없어서 사회주의자다. 나는 늘 궁금하다. 나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사회주의자인데 왜 이리 사회주의자가 적은 걸까. 전체의 괴멸과 영혼의 고갈을 체감하면서도 왜들 망설이는 걸까. (경향신문)
너무들 돈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까, 는 역시 신자유주의와 관련한 것일 게다. 그러나 발단은 박정희 시절로 올라간다. 일제 때 일본군 헌병이었고 해방 후 잠시 사회주의자였던 박정희는 제 이력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경제개발에 몰두했다. 극도로 생산력이 낮고 빈곤이 만연한 사회에서 경제개발이 갖는 미덕을 무작정 부인할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진행된 경제개발은 영혼의 개조작업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잘 산다’는 것의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돈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어냈다. 박정희의 ‘새마을’은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의 행복을 폐기한 마을이었다. 박정희의 사전 정지작업과 김대중 이후 줄기차게 진행된 신자유주의가 결국 한국을 영혼 없는 사람들의 나라로 만든 셈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박근혜에게 돌리고 저주를 퍼붓는 걸로 영혼 없음의 공허를 채우려 든다.
내 이야기를 좀 할까 싶다. 나 개인 이야기가 아니라 관련된 하나의 사례로서 말이다. 나는 종종 내가 사람들에게서 매우 비현실적인,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 사회주의자로 여겨지고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아마도 반이명박 운동이 진보의 대세가 될 무렵 ‘이명박 반대는 당연하지만 또 다른 신자유주의 세력에게 봉사하는 건 경계한다’ 식의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미지가 강화되었던 것 같다. 그런 사회주의자가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그런 사회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체질이 아니랄까. 사회주의자란 사회구조와 인간의 행복의 관련성을 높게 보는 사람들 아닌가. 나는 여느 사람들에 비해서도 그 관련성을 높게 보는 편이 아니다. 행복을 찍어내기엔 인간이란 너무나도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없다. 이상주의자의 시효는 이상주의적 사회가 만들어졌다고 선언되는 순간까지다. 그 순간부터 이상주의자의 역할은 이상주의적 사회의 훼손에 있다. 언제나 그렇다. 나는 이상주의적 사회란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상주의적 사회에 회의적인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를 봐도 현재 진행 중인 역사를 봐도 그렇고 인간은 구제불능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가진 동물이다. 인간과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다른 종이 있어 그의 눈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고 상상해보자. 한편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종끼리 뜯어먹고 잡아먹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우아한 얼굴로 인문학과 예술과 구원과 심지어 미각을 말하는 동물을 말이다.
나는 인간이 인간의 사회에 대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을 생각하기보다는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생각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고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들 역시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적은 사회 구조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큰 욕심 없이 그저 제 식구 건사하고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이 평생을 아등바등 살아야만 한다거나, 빈부 격차가 지나치게 커서 극소수의 안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힘들게 살아야만 한다거나, 아이들이 경쟁 때문에 제대로 뛰어놀지도 못하고 일찌감치 시들어가는 게 당연시된다거나 하는 사회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건 인간의 일이다.
열거한 상황들은 하나같이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념은 둘뿐이다. 자본주의를 인정하는(보수적으로든 개혁적으로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혁명적으로든 합법적으로든) 사회주의(사민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은 의식하든 않든 둘 중 하나에 속해 살아간다. 나는 사회주의적 교조에 투철하지 않고 이상주의적 사회에 대한 굳센 믿음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상황들을 (좀 더 나은) 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자다. 말하자면 나는 적어도 자유주의자일 순 없어서 사회주의자다. 나는 늘 궁금하다. 나처럼 인간과 사회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도 사회주의자인데 왜 이리 사회주의자가 적은 걸까. 전체의 괴멸과 영혼의 고갈을 체감하면서도 왜들 망설이는 걸까. (경향신문)
2014/11/24 16:36
올해도 어김없이 편해문 사진달력이 나왔다. 예년과 다른 점은 아이들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사진 대신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들어 있다. 여러 뜻이 있겠지만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속깊은 배려도 있지 싶다. 이 사진들을 찍었을 당시에 볼 기회가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벽과 아이들의 기기묘묘한 그림의 조화가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한국 아이들은 이 아이들보다 훨씬 더 부자 나라에 사는데 왜 그림 그릴 벽은 없는 걸까. 이번 달력 판매금(이익금 아닌)은 전액 팔레스타인 가자 아이들에게 보내진다. 꼴도 뜻도 예쁜 이 달력을 많이 사주시길 부탁드린다. 물론 나도 몇부 사서 선물로 쓸 참이다.ㅎ

2014/11/15 19:17
청년이란 이를테면 ‘난 어떻게 살고 싶은데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식의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 청년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한다. 청년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를 우리는 돌이킬 수 있을까?
2014/11/15 19:16
2014/11/13 11:16
이상주의적 신념을 분명히 하면서도 진영논리나 선악구도에 갇히지 않는다는 게 켄 로치 영화의 세련과 품격. 날라리 이상주의자를 그린 이번 영화(지미스 홀)는 한층 더 나아간다. 승리와 패배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희망과 절망에 대해 질문하며, 더 나은 노동을 위해 투쟁하는가 제대로 놀며 살기 위해 투쟁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며, 적의 품위를 인정하는 품위에 대해 질문한다. 미소를 남기는 영화.
2014/11/09 19:50
고래가그랬어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한 분, 해외에 계셔서 고래를 구경하기 쉽지않은 분, 최근 고래를 보고 싶은 고래이모 삼촌... 누구나 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고래 131호(2014년 10월 발행분)를 공개 e-book으로 만들었다. 도움을 주신 조영규 고래 삼촌(우리전자책)께 감사드린다.
고래가그랬어 e-book 내려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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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3 23:15
빌 게이츠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서평을 썼다. 게이츠는 피케티의 기본적인 문제의식들(부의 불평등이 심각해지면 경제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자본주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며 이를 교정하기 위한 소득 재분배 정책의 역할이 중요하다는)에 동의한다. 그러나 게이츠는 현재 세계의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다거나 부가 세습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게이츠의 주장에서 눈에 띄는 건 자본에 대한 세금보다는 어떤 자본이냐, 즉 불로소득이나 상속에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게이츠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건 사회적 재분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하고 있는 방법, 즉 기부라는 것이다. 게이츠를 비롯한 미국 부자들이 거액의 기부를 하는 일이 종종 화제가 된다. 미국에서 기부는 건국을 주도했던 청교도 정신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일종의 사회분배 시스템의 기능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미국은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바람직한 방법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회다. 미국은 여전히 개인기부가 전체 기부의 73%에 이르는 ‘기부 선진국’이지만, 모든 선진국 가운데 부의 편중이 가장 심각한 사회다.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으로 기부의 가장 큰 결점은 부자의 선의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내면 좋고 안 내도 강제할 방법이 없는 방법이 바람직한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이 될 순 없다. 긴급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기부의 유용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주요한 방법이 되어버리면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기준에서 알량한 수준에 불과한 사회적 재분배를 과장하고 치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차단하는 할리우드 쇼가 된다.
우직하고 집요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세습적 경향을 증명해냈다는 것 외에 피케티의 견해가 새로운 게 아니듯, 게이츠의 피케티 비판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부냐 세금이냐’로 요약되는 해묵은 논쟁이며, 미국식 자본주의와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의 대립이기도 하다.
사민주의 복지사회 역시 자유 시장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경쟁은 그 결과에서 격차를 만들 수밖에 없다. 격차가 없다면 누가 열심히 경쟁하겠는가. 주류경제학자들은 그런 격차가 결국 가장 공정하고 이상적인 부의 분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격차가 경쟁의 출발점과 조건을 왜곡하면서 갈수록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건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진 사실이다.
복지사회란 시장은 인정하되 시장에서의 격차가 삶의 격차로 직결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면서, 복지 혜택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보편적으로 받는 방식으로 말이다.
알려진 대로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적잖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복지병’이니 뭐니 사민주의 전체가 쇠퇴했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사민주의도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극복을 좇는 전투적인 사민주의도 있다. 규모는 다를 뿐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의 사민주의 세력의 상당수는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민주당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투항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력과 선을 긋는 전투적 사민주의 세력이 있다.
부자들이 기부도 세금도 내려 하지 않는, 기부 미담의 주인공이 여전히 ‘평생 모은 돈을 쾌척하는 가난한 할머니’인, 세금에 대한 전향적인 의견과 토론은 즉시 ‘공산주의적 발상’으로 공격받는 사회에서 이런 논쟁은 해묵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요원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폭주하는 자유주의와 또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럽식 사민주의 복지사회가 갈 길이라 말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복지사회를 말하는 게 어불성설이듯 민주당이, 혹은 민주당을 통해 복지사회를 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건 흔히 말하듯 그들의 정치윤리 문제도 정치인으로서 진정성 문제도 아니다. 그들의 세계관과 이념의 문제다. 사민주의는 ‘자유주의를 억지하는 현실적 사회주의 전략’인데 어떻게 자유주의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가.
유럽 복지사회가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에 전체 사회가 감화되어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총체적이지 않다. 유럽 복지사회는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의 타협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는 그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모든 사회에서 사민주의의 성장의 경로와 방법이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사회주의 세력조차 없는 사회에서, 즉 사민주의가 극좌인 사회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진심으로 복지사회를 바란다면 몸을 일으켜 빠져나와야 한다. 정치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회주의 혹은 전투적 사민주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길이 안 보인다’ 한탄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로선 둘 다 지나치게 세력이 약하지 않으냐고?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당신이 지금 당장 그 세력의 일원이 되어야 할 이유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그러나 결국 게이츠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건 사회적 재분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하고 있는 방법, 즉 기부라는 것이다. 게이츠를 비롯한 미국 부자들이 거액의 기부를 하는 일이 종종 화제가 된다. 미국에서 기부는 건국을 주도했던 청교도 정신을 기반으로 시작되어 일종의 사회분배 시스템의 기능을 해온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미국은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바람직한 방법이 아님을 증명하는 사회다. 미국은 여전히 개인기부가 전체 기부의 73%에 이르는 ‘기부 선진국’이지만, 모든 선진국 가운데 부의 편중이 가장 심각한 사회다.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으로 기부의 가장 큰 결점은 부자의 선의에 맡겨진다는 것이다. 내면 좋고 안 내도 강제할 방법이 없는 방법이 바람직한 사회적 재분배의 방법이 될 순 없다. 긴급하고 특별한 상황에서 기부의 유용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부가 사회적 재분배의 주요한 방법이 되어버리면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기준에서 알량한 수준에 불과한 사회적 재분배를 과장하고 치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적 재분배를 차단하는 할리우드 쇼가 된다.
우직하고 집요한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세습적 경향을 증명해냈다는 것 외에 피케티의 견해가 새로운 게 아니듯, 게이츠의 피케티 비판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부냐 세금이냐’로 요약되는 해묵은 논쟁이며, 미국식 자본주의와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의 대립이기도 하다.
사민주의 복지사회 역시 자유 시장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경쟁은 그 결과에서 격차를 만들 수밖에 없다. 격차가 없다면 누가 열심히 경쟁하겠는가. 주류경제학자들은 그런 격차가 결국 가장 공정하고 이상적인 부의 분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격차가 경쟁의 출발점과 조건을 왜곡하면서 갈수록 더 큰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건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밝혀진 사실이다.
복지사회란 시장은 인정하되 시장에서의 격차가 삶의 격차로 직결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면서, 복지 혜택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보편적으로 받는 방식으로 말이다.
알려진 대로 유럽 사민주의 복지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으로 적잖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복지병’이니 뭐니 사민주의 전체가 쇠퇴했다는 우파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제3의 길’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사민주의도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극복을 좇는 전투적인 사민주의도 있다. 규모는 다를 뿐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의 사민주의 세력의 상당수는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민주당이라는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에 투항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력과 선을 긋는 전투적 사민주의 세력이 있다.
부자들이 기부도 세금도 내려 하지 않는, 기부 미담의 주인공이 여전히 ‘평생 모은 돈을 쾌척하는 가난한 할머니’인, 세금에 대한 전향적인 의견과 토론은 즉시 ‘공산주의적 발상’으로 공격받는 사회에서 이런 논쟁은 해묵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요원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폭주하는 자유주의와 또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럽식 사민주의 복지사회가 갈 길이라 말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복지사회를 말하는 게 어불성설이듯 민주당이, 혹은 민주당을 통해 복지사회를 말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그건 흔히 말하듯 그들의 정치윤리 문제도 정치인으로서 진정성 문제도 아니다. 그들의 세계관과 이념의 문제다. 사민주의는 ‘자유주의를 억지하는 현실적 사회주의 전략’인데 어떻게 자유주의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가.
유럽 복지사회가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에 전체 사회가 감화되어 만들어졌다는 생각 역시 총체적이지 않다. 유럽 복지사회는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의 타협의 맥락에서 만들어졌고, 사민주의자들의 아이디어는 그 맥락에 결합되어 있다. 모든 사회에서 사민주의의 성장의 경로와 방법이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일정 수준의 사회주의 세력조차 없는 사회에서, 즉 사민주의가 극좌인 사회에서 사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진심으로 복지사회를 바란다면 몸을 일으켜 빠져나와야 한다. 정치적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사회주의 혹은 전투적 사민주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길이 안 보인다’ 한탄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로선 둘 다 지나치게 세력이 약하지 않으냐고?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당신이 지금 당장 그 세력의 일원이 되어야 할 이유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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