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싸움이란 무엇보다 프레임 싸움이다. 프레임 싸움에서 지면 이미 절반은 진다. 이를테면 “너는 좌빨이다!”라는 공격에는 ‘좌빨은 나쁜 것’이라는 프레임이 들어 있다. “난 좌빨이 아니다!”라고 대응하면 그 프레임으로 말려들어가게 된다. ‘사상의 자유’라는 프레임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내가 좌빨이든 아니든 좌빨이 왜 문제인가? 사상의 자유도 모르는가?”라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김영오 씨와 관련한 논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혼은 했지만..."이라 대응하면 이혼은 인간의 흠결이고 부모의 자격을 잃는 것이라는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다. "이혼한 게 왜 문제인가? 이혼 전이든 후든 나는 변함없이 내 아이를 사랑하는 아빠(엄마)다."라고 해야 한다. "노조원이긴 하지만..."라고 대응하면 노조 가입이 불순하고 편향된 행동이라는 그들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다. "노동자가 노조원인 게 왜 문제인가? 헌법의 노동3권도 모르는가?"라고 해야 한다. 프레임 싸움은 단지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만 중요한 게 아니다. 세상이 바뀐다는 건 실은 프레임이 바뀌는 것, 기존의 가치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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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8 14:06
2014/08/2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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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6 14:59
두 아이 다 학교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내가 '공교육은 할 게 못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렇진 않고 아이들은 각각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많은 소통이 있었던 건 물론이다. 교육에서 제도나 형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아이에게 좀더 나은 제도와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필요한 경우 그걸 둘러싼 사회적 싸움도 불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교육의 가장 중요한 제도와 형식은 '부모'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부모에 의해 많은 게 달라진다. 이를테면 부모에 따라 일반학교도 가고 대안학교도 간다. 그러나 부모에 따라 아이가 대안학교 다니면서 일반학교 다니듯 생활하기도 하고, 일반학교 다니면서 대안학교 다니는 아이처럼 생활하기도 한다. 부모의 닫힌 교육관 때문에 학교 밖의 성장은 꿈도 꿀 수 없어 고통스러운 아이도 있지만, 부모의 열린 교육관 때문에 시골의(자연 속의!) 대안학교에 다니며 밤늦게까지 학원을 돌며 어울리는 동네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아이도 있다. 흔히 제 욕망을 아이를 통해 구현하려는 부모는 나쁜 교육의 표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가장 나쁜 교육은 아이를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삼는 것, 부모의 교육관이나 세계관을 아이에게 들씌우는 것이다. 진보의 이름이든 생태의 이름이든 대안의 이름이든, 혹은 체험적 확신에서든 마찬가지다. 부모의 일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아니다. 부모의 일은 아이가 어떻게 크는 게 아이에게 좋을까(맞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 어떻게 크길 원하는지 발견하도록 돕는 것,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크길 원하는지 늘 귀 기울이는 것이다.
2014/08/25 21:31
배우 김보성씨가 철 지난 마초풍 분장에 주먹을 치켜올리며 “남자는 의리!”를 외치기 시작한 건 꽤 된 일이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웃긴 했으되 그 웃음에 존중은 적었던 것 같다. 차라리 조소의 맥락마저 보였다고 할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모습이 광고와 선거에 무수히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분명한 호감이 들어 있었다. 사회 정의도, 인간에 대한 신뢰도 깡그리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그 투박한 의리 주장에 조소 대신 호감을 보이게 된 것이다.
물론 김보성의 의리를 포함, 의리라는 말은 얼마간 걸러질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의리라는 말은 대개 남성들의 인간관계에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현실적 이득을 도모하는 일을 뜻해왔다. 그러나 그건 의리가 아니라 ‘기리’다. 기리는 의리와 한자가 같은 일본말로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일본 문화 연구서 <국화와 칼>은 기리, 즉 일본식 의리를 아예 한 장으로 다루기도 한다.
의리(義理)란 본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뜻한다. 의리는 남성적인 말도 아니고 사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적 관계에 불편이나 손실을 초래하더라도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것, 눈앞의 이해득실을 넘어 대의를 따르는 것이 의리다. 의리라는 말에 정서적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많지만(나 역시 그렇다) 알고 보면 인간의 삶에서 의리만큼 귀한 것도 없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의리는 역사와 현실의 큰 흐름과 맥락을 읽게 해주며, 내가 누구인지와 뭘 하고 있는지를 또렷하게 밝혀준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행태는 정치에서 의리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세월호특별법의 두 번째 여야 합의안을 유족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광화문팀, 안산팀 등 네 개의 팀까지 만들어 작업했다. 매우 주도면밀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었다. 물론 세월호 유가족도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인이니 정치인들의 ‘현실적 제안’에 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의사자 지정, 대학 특례입학 따위 회유책을 마다하고 ‘기소권과 수사권이 있는 특별법’으로 진실 규명에 집중하기로 했다. 의리를 선택한 것이다. 많은 시민이 그들을 단지 ‘불쌍한 사람들’로 여기지 않고 각별한 존중심을 보이는 이유도 그것이다.
의리를 선택한 사람의 마음을 한낱 정치적 기술로 흔들 순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왜 새정치연합은 이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되도 않는 뻘짓을 해댄 걸까. 그들의 정신세계가 이미 쓰레기통이기 때문이다. 의리가 실종된 정치, 정치적 기술과 타협과 조율은 단지 쓰레기일 뿐이다. 의리를 잃은 정치인은 민심을 읽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뭘 하는지조차 모른다. 박영선이 비대위원장 취임 일성으로“투쟁정당을 벗어나겠다” 말하고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 임종석과 이인영이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중도 노선으로 가야 한다” 말한 건 그 일단이다. 그들은 ‘새누리와 다른 게 뭐냐’ 항의하는 사람들 앞에서 매우 진지한 얼굴로 ‘새누리와 다른 게 문제’라고 대꾸한다.
오늘 전 지구적으로 정치인의 의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교황이다. 교황이 정치인인가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교황은 정치인 중의 정치인이다. 프란치스코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이를테면 왜 교황은 강우일이 아니라 염수정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며 기어코 꽃동네를 방문했을까.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교황이 속아서, 몰라서 그렇게 한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만일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이었다면 애당초 교황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길 위의 신부’ 문정현이 교황이 될 수 없듯 프란치스코는 길 위의 신부가 될 수 없다. 프란치스코는 고도로 세련된 정치인이되, 예수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정치인이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교황이고 마몬의 세상이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교황이다.
한국 정치인들이 정치에서 의리가 무엇인가를 좀 더 쉽고 생생하게 배우고 싶다면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보면 된다. 그는 메말라가는 제 신체로 한국 정치에서 의리가 얼마나 바닥이 났는지, 민심이 얼마나 의리를 갈구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알다시피 그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금속노조 깃발마저 마다하고 어떤 정치적 기술이나 타협 조율도 거부한 채 오로지 억울하게 죽어간 딸에 대한 의리만 좇았다. 가장 비정치적인 선택으로 일관한 그는 역설적이게도 정치의 중심이 되어갔다.
오늘 대한민국이라는 지상의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바라는 건 단지 의리다. 진정성이 담겨 있는가, 쇼인가를 꼬치꼬치 따지려들 여력도 없다. 그저 눈앞의 이해득실보다 대의를 좇는 정치인을 보며 구멍 뚫린 마음부터 달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멍청하고 멍청한 정치인들아, 민심을 얻고 싶다면 무슨 연합이니 타협이니 조율이니 쓰레기 정치 기술일랑 당장 걷어치우고 의리에 우직해라. 우직한 시늉이라도 해라. 극우 정치인이라면 국가에 대한 의리에, 자유주의 정치인이라면 시민에 대한 의리에, 진보 정치인이라면 민중에 대한 의리에. (경향신문)
2014/08/15 11:24
단식하는 이들도 있고 점거하는 이들도 있고 전국을 행진하는 이들도 있고 또 그들과 함께 하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있지만, 그 싸움이 힘을 얻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가 여부는 늘 몸으로 참여는 못하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집회의 참여자 수로 주요하게 가시화된다. 집회 때마다 ‘경찰추산’ 숫자가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아마 오늘 집회엔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숫자를 한명이라도 더 늘리는 것이고, 그것은 ‘나의 참여’에 달려있다. 오후3시 시청 광장.
2014/08/14 12:28
되도록 조화로운 섭생을 추구하되 채식주의자가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갈수록 정신의 채식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감정의 속도와 소통의 무늬에서. 정신의 채식주의자로 사는 걸 더 미루지 않기로.
2014/08/13 09:07
2014/08/08 12:31
홍성담 형의 ‘세월 오월’이 광주비엔날레에서 거부되었다. 민주당 시장은 "창작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시비가 부담되는 비엔날레 특별전에 정치적 성향의 그림이 걸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씨부렸단다. ‘세월 오월’에서 주먹밥을 든 여성을 보다 벽에 걸린 성담 형의 ‘대동세상’을 본다.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 제목을 '광주코뮌'이라 붙여도 좋을 것이다. 액자 뒤엔 성담 형이 쓴 장난스러운 글귀가 적혀 있다.
2014/08/07 22:13
거듭 하는 말이지만, 민주당이 저럴 수 있는 건 민주당을 욕하면서도 민주당 이상은 절대 상상하지 않는, 결국 선거 때가 되면 민주당(혹은 이름만 바꾼 민주당)에 매달리는 사람들 덕이다. 그들과 민주당의 모습은 가정폭력 속에서도 결혼 상태를 지속하는 부부와 닮았다. 한쪽은 ‘저 웬수 땜에 내가 못 살아’ 하면서도 새로운 삶이 두려워 번번이 주저앉고, 한쪽은 사과하는 시늉을 하지만 속으론 ‘네 까짓 게 별 수 있어’ 미소짓는다. ‘굶어죽으면 죽었지 매맞고는 살지 않는다’는 결심이 없는 한 구질구질한 상태는 절대 종식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민주당을 욕하는 사람들은 결심이 선 걸까?
2014/08/05 08:10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라는 말은 욕이었다. 낭만도 꿈도 이상도 없는, 당장 실현가능한 게 아니면 거들떠보지 않거나 매사를 이해득실로만 재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그 말은 ‘그 사람은 한심한 속물이야’와 같았다. 이젠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라는 말은 욕이 아니다. 욕이다 아니다 이전에 그 말 자체가 사라졌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너무 현실적인’ 삶의 태도는 이제 한심한 것도 속물적인 것도 아닌 일반적인, 아니 필수적인 삶의 태도일 뿐이다.
흔히 사람은 현실과 이상 사이를 줄다리기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몸은 현실에 얽매여 있지만 동시에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며 살아가는 게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엔 존경이 들어 있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나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라는 말엔 나는 저렇게 못 살지만 저런 사람이 있으니 세상은 희망이 있구나, 라는 뜻이 들어 있다. 오늘 한국에서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욕이다.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나 ‘비현실적인 원칙주의자’라는 말엔 명백한 경계와 혐오가 담겨 있다. 한국은 좀처럼 변화하기 어려운 사회로 접어든 셈이다. 현실은 오로지 ‘비현실적 상상’을 통해서만 변화하기 때문이다.
극우독재는 비현실적 상상을 철저히 억압했다. 감시하고 검열하고 금지하고 탄압했다. 비현실적 상상이 조직되고 행동이 될라치면 체포하고 투옥하고 살해했다. 그런 살벌한 시절이었음에도 ‘그 사람은 너무 현실적이야’가 욕이었던 것이다. 비현실적인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침묵으로 존중받았으며 바로 그래서 극우독재는 극복될 수 있었다.
오늘날 자본독재, 즉 신자유주의는 비현실적 상상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아예 거세한다.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하의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의 기업이 되어 끝없이 자기 계발과 경쟁으로 스러질 때까지 달려가며, 과잉 의욕과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에 포박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경향이 다른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한 편이다.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는 싸움이 너무나 길고 고되었기 때문에 민주화만 되면 어떻게든 좋은 사회로 나아갈 거라는 낭만적 정서가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함께 밀려들어올 시장 자유에 대한 경계의식이 없다시피 했고 결국 ‘국가부도’라는 쇼크와 함께 어떤 견제나 면역력도 없이 유례 없는 속도로 신자유주의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극우독재 세력이 아니라 민주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독재와 반독재, 보수와 진보 혹은 정치적 선과 악 같은 일반적 가치와 정서들이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가장 충직한 신자유주의적 신민으로 개조되었다.
비현실적 상상력이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거세된 건 물론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상상하길 두려워하는 걸 넘어 상상하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여전히 상상하는 사람은 ‘비현실적’이라는 혐오와 경멸의 낙인이 찍힌다. 상상을 조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인신이 체포·투옥·살해되진 않지만 상상력은 철저하게 체포·투옥·살해된다. 그런 ‘자경단식 상상력 제거 작업’과 정서 속에서 진보는 ‘상상하지 않는 진보’로 재조정된다. 비현실적 상상을 좀 더 섬세하게 제거하기 위한 ‘아름답고 희망적인’ 상상 간판들이 세워진다. ‘현실적 상상’은 실은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덮인 채 유일하게 온당한 상상으로 상찬된다.
정치는 그 상한선이 현실적인 것으로 엄격히 제한된다. 자본주의 극복이나 반(反) 신자유주의 투쟁과 대안 모색, 계급적 의제 같은 진보정치의 골간들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배척된다. 진보 정치의 소임은 비현실적인 것, 즉 ‘다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즉 ‘최악을 막는 것’이 된다. 결국 ‘차악’이 최선의 정치가 된다. 물론 최악과 차악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버림으로써 진보정치는 존재 이유를 잃고 사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공전하게 된다.
선거 부정과 세월호 학살 등 온갖 패악질을 저지른 최악의 세력은 심판은커녕 7·30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둔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세월호특별법 제정’이 막막해지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차악이 최악의 2중대 노릇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차악이 그런 노릇을 지속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차악을 욕하면서도 차악 이상은 절대 상상하지 않는 자신들 덕이라는 사실은 생략된다.
최악과 차악은 언제나 최악과 차악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국 그것들이 견제되고 극복되며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가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들’이 비현실적 상상력을 회복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는 건 부당하다. 그들의 상상력이 거세된 건 그들의 선택이 아닌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사회 변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회복은 오로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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