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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26 마비
  2. 2014/06/24 마음의 회복
  3. 2014/06/17 귄터 할아버지의 지혜
  4. 2014/06/17 완벽한 국가
  5. 2014/06/17 열정
  6. 2014/06/17 정권교체
  7. 2014/06/06 강연회
  8. 2014/06/03 대안은 나다
2014/06/26 14:35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거나 더 생각하려는 사람에게 반감마저 생긴다면, 그럴 만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마비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더 생각하지도 토론하지도 못하도록 말이다.
2014/06/26 14:35 2014/06/26 14:35
2014/06/24 09:09
친구는 박근혜씨가 당선되고 한참 동안 한숨만 쉬었다. ‘멘붕’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긴 했지만, 그가 이른바 ‘비판적 지지’에 꽤 비판적인 급진적인 사람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의아한 데가 있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도 여전한 그에게 넌지시 연유를 물었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이 없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다들 박근혜를 찍었어. 자신의 삶을 배신했다고 할까. 그들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 자꾸 화가 나고.”

외과의사인 그가 일하는 병원이 있는 동네는 J시에서 가난한 축에 속한다. 그나마 그 동네에서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대학병원으로 가니 그의 환자들은 그의 말마따나 거의 대부분 없는 사람들이다. 평소 그는 그들의 소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언급하며 미소짓곤 했다. 그 미소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문재인을 찍으면 자신의 삶을 반영한 거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리 화가 나.”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그래도 박근혜를 찍는다는 건….” “그들은 너처럼 책을 많이 읽지도 않고 SNS에서 정치 토론을 하지도 않잖아. 뭘 근거로 투표할 것 같아.” “글쎄. 아무래도 보수화한 티브이 영향이 있을 테고 보수언론도 그렇고.” “자신의 식견이 부족하니 보수언론에 그대로 조종된다. 좀 오만한 생각 아닌가.” “넌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삶이지. 삶의 체험. 그들은 김대중 정권 때도 살아봤고 노무현 정권 때도 살아봤지. 그들도 이명박이 잘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문재인의 희망이라는 말에도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어.” “보수가 좋은 게 아니라 진보가 싫은 거다. 듣고 보니 그렇군.”

지난 대선 당시에 ‘진보 놈들 꼴 보기 싫어서 박근혜 찍는다’는 식의 이야기가 하위계층에서 많았다. 그들의 반감은 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진보가 두 번이나 집권을 하는 동안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삶엔 별다른 게 없었는데,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비롯한 보수는 거의 악귀 취급을 하면서 자신들은 정의와 선의 세력인 양 구는, 정치라는 게 보수고 진보고 다 자기들 좋으라고 하는 거라는 걸 재확인해주었을 뿐이면서, 자신들을 선택하는 게 유일한 희망인 양 설레발치는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반감 말이다.

반감의 맥락은 일베 청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명색이 청년인데 꿈꿀 수 없는, 그렇다고 부모 덕을 볼 형편도 못되는 구질구질하고 꽉 막힌 삶. 그런데 그런 내 삶을 반영한다 말하는 진보는 반영은커녕 나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자식들도 나와는 처지가 다르다.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지거나 외고, 특목고를 거쳐 일류대에 간다. 진보는 그렇게 누리고 살면서도 마치 악에 맞서 싸우는 저항세력이라도 되는 양 비장한 얼굴이다. 진보가 강조하는 ‘시민의 상식’을 거부하고 진보가 적대시하는 국가주의의 길로 극우의 길로 내달리는 건 진보 앞에서 내 자존감을 확보하는 한 방법이다.

진보는 그 청년들이 ‘연이은 보수정권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며 혀를 차거나, ‘일베충’이라 부르며 경멸한다. 그들이 벌레라면 왜 벌레가 되었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그런 진보가 다른 청년들을 보며 ‘청년이 살아있다!’고 상찬한 일이 지난해 있었다. 국정원 선거개입과 관련한 대학 총학생회의 연이은 시국선언. 그런데 시국선언이 있기 얼마 전 최저임금위원회에선 2014년 최저임금이 논의되고 있었다. 경총 등 자본 측 인상안은 ‘0원’이었다. 오늘 한국 청년들에게 최저임금만큼 보편적인 삶의 문제가 있을까? 그러나 시국선언에 최저임금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상찬받은 시국선언이 주로 일류대학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알바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는 청년들의 일이었다는 걸 참고할 수 있다. 기성시민들이든 청년들이든 진보는 그렇게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명료하게 구별되어 있다.

30여년 전, 진보는 반체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고 20대를 넘기면서 주류사회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교사도 되고 교수도 되고 기자나 피디가 되고 학원원장이나 사장도 되면서 주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세력을 형성해갔다. 그들은 그들이 ‘수구 기득권 세력’이라 부르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대등하게 경쟁하는 ‘신흥 기득권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결국 정권을 탄생시켰고 집권 10년 동안 그들의 기득권을 더욱 안정화했다. 없는 사람들 역시 그 10년 동안 그들을 체험했고, 그들이 한 일을 제 마음에 또렷이 새겼다.

물론 그 반감은 얼마간 편향되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보수와의 차별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또 진보의 기득권이라는 것도 모든 진보가 고루 나눈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겐 다친 부분이 전부인 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가 언젠가부터 진보의 정체성보다는 오로지 보수와의 비교로만 제 정체성을 확보하는 이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진보를 존중할 수 있는 건 진보 자신뿐일 것이다.

진보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얻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사적 삶에서 종종 깨우치듯, 마음을 잃은 이유를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마음을 다시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6/24 09:09 2014/06/24 09:09
2014/06/17 09:35
"우리는 아이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스스로 알고 있는 아이를 말한다. 아이들이 그런 감정을 키우려면 스스로 좋은 것을 만들어보고, 좋은 것을 해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 경험은 놀이를 통해서 할 수 있다."

2014/06/17 09:35 2014/06/17 09:35
2014/06/17 09:30
극소수의 88억세대를 위해 대다수 청년이 88만원세대로 살아가야 하듯, 극소수에게 완벽한 국가이기 위해 대다수에겐 더이상 국가가 아니어야 한다.
2014/06/17 09:30 2014/06/17 09:30
2014/06/17 09:29
사람은 종종 냉정하게 자신을 되돌아봐야할 순간을 회피하기 위해 용이한 열정에 빠져들곤 한다.
2014/06/17 09:29 2014/06/17 09:29
2014/06/17 09:29
이른바 '정권교체조차 어려운 현실'이 낳는 가장 큰 비극은 정권교체가 그 현실적/상대적 의미를 벗어나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권교체 이상의 모든 급진적 사유와 경향들이 소멸하고, 정권교체가 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변화의 가능성을 잃은 사회가 되는 것이다.
2014/06/17 09:29 2014/06/17 09:29
2014/06/06 09:34
포스터의 문구들이 영 무겁고 부담스럽다.ㅎ '김규항의 좌판' 발간과 함께 마련된 강연회이긴 하나, 편안하게 좀 더 넓은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다. 굳이 제목을 붙인다면 '세월호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정도가 될 듯하고, 내용은 '인생 뭐 그리 대단한가요, 미래보다는 현재, 이득되는 길보다 속 편한 길로, 진짜 사랑과 진짜 우정을 모시며, 되도록 즐겁게 살다 갑시다’ 정도가 될 듯하다. 우리가, 혹은 우리 삶이 어쩌다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는가를 찬찬히 되짚어보고, 이렇게 저렇게 실행할 수 있는 대안들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는 건 물론이다.
2014/06/06 09:34 2014/06/06 09:34
2014/06/03 13:26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 길에 오른 아이들은 1997년생이다. 내 둘째가 태어난 해이기도 해서 그해를 또렷이 기억한다. 이른바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고, 그걸 빌미로 박정희 정권 말기부터 야금야금 기획되고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개혁이 봇물 터지듯 본격화하기 시작한 해다. 거지반 진행된 상품시장과 금융시장 자유화에 이어 노동시장과 공공부분이 빠르게 개혁되기 시작했다. 교육이 완전히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동네에 뛰어노는 아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그해부터다. 대체로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인, 희생된 아이들은 그렇게 신자유주의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제 삶을 보내야 했다.

그 아이들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죽음이 그들로 하여금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책임을 묻는 일과 근본 원인을 묻는 일. 진보적인 경향의 사람들이 전자에 또렷한 태도를 갖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의 책임은 대통령을 포함하여 일단 보수 영역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엔 사정이 다르다. ‘사람보다 이윤이 앞서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원인이다’라고 이야기들은 하지만, 그걸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묻자면 난망하기 이를 데 없다. 이놈의 신자유주의라는 게 보수 진보의 구분도 없이 얽혀 있는 데다, 보수를 욕하며 진보와 정의를 말하는 그들의 삶 역시 개인 경제에서 교육 문제에 이르기까지 뭐 하나 안 걸리는 게 없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다’는 말은 그런 곤혹으로부터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구출한다. 그 말을 풀면 이렇다. ‘나는 진심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걸 구현할 대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대안이 없다’는 말은 과연 대안에 대한 갈망이 담긴 말일까? 짐짓 대안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말은 아닐까?

‘대안이 없다’는 말은 실은 대안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안에 대한 태도에 관한 말이다. ‘대안이 없다’는 말엔 대안에 대한 피동적 태도, 대안이 이미 차려진 혹은 남이 차려주는 메뉴에서 고르는 것이라는 태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대안은 ‘아직 차려지지 않은 것’이며, ‘나의 주체적 참여와 행동으로부터 차려지는 것’이다. 대안에 대한 태도를 전환하지 않는 한, ‘대안이 없다’는 말은 대안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말일 뿐이다.

또한 ‘대안이 없다’는 말은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쓰고 싸워온 사람들과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외면한다. 대기업 정규직 위주가 아니라 비정규 불안정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 환경오염이라는 피상적 접근이 아닌 생태계 전체의 문제를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과 결부시키는 급진적 생태운동, 동정과 시혜가 아니라 인간해방의 관점에 선 장애인 소수자 인권운동 등, 허다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라도 존경을 표시하고 연대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선거에서 그런 대안적 운동들과 연결점을 갖는, 노동당이나 녹색당 같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대안을 마련해가는 의미 있는 실천 가운데 하나다.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다’는 논리가 20년 이상 횡행하는 통에 더 작고 미약해진 그런 정당에 투표한다는 건 꺼려지는 일이다. 그들의 이념과 노선을 지지하지만 현재로선 그들의 영향력이 작고 미약하니 그들에게 투표하는 건 현실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사실관계를 거꾸로 본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이 작고 미약해서 내가 투표할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투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작고 미약한 것이다. 그들의 영향력은 화성이나 금성에서 만들어져 제공되는 게 아니라 ‘나의 1표’가 모여 만들어진다. 그들의 영향력이 작고 미약하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에게 투표해야 할 분명한 이유다.

대안을 마련한다는 게 막막하게만 느껴진다고 해서 새삼 절망할 건 없다. 좋든 싫든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어렵지 않게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면 사회가 이 꼴이겠는가. 수백명의 아이들이 저리 어이없이 희생되었겠는가. 우리는 담담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대안에 관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도, 대안이 아닌 것을 대안으로 삼는, ‘새민련은 새누리의 2중대’라 욕하면서도 현실적 대안은 그들뿐이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보다 절망적이진 않다.

대안의 출발점은 결국 나다. 내가 대안을 찾기 시작한다면 대안은 분명히 있다. 정치고 이념이고 다 떠나서 세월호의 아이들 앞에서 어른 구실은 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못나게 굴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길이 잘 보이지 않아도 나부터 뚜벅뚜벅 걸어야 하지 않을까, 되새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망해본다. 내일은 세월호 사건 후 첫 선거 날이기도 하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6/03 13:26 2014/06/03 1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