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4/04/29 분노는 차갑게 지속된다
  2. 2014/04/23 분노의 지속
  3. 2014/04/23 분노의 지속
  4. 2014/04/23 기도
  5. 2014/04/17 고통
  6. 2014/04/09 비현실적이야
  7. 2014/04/08 하느님을 살해하는 신도들
2014/04/29 09:05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정상 범주의 인간성을 가진 사람에겐 당연한 것이다. “가만 있으라”는 말만 믿고 스러져간 아이들을 보면서, 절규하는 실종자 부모에게 공감조차 하지 않는 대통령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사람일까. 그러나 그 분노와 슬픔이 반드시 날것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1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난 안산 고잔동 주민들은 화조차 제대로 못 내고 조용조용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분노와 슬픔이 적어서일까. 그들은 침묵과 절제로 분노와 슬픔의 당사자인 이웃과 연대하고 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제 분노와 슬픔을 날것으로 드러낼 수 있는 건, 실은 당사자들과의 거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커다란 참사가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뜨겁게 분노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뜨거움은 식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제 일상으로 돌아간다. 결국 당사자들만 남게 된다. 그리 되기까지 시간이 다르긴 하지만 예외는 없다. 일상을 지속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24시간 동안 누적된 분노와 슬픔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압축하여 드러내는 걸 탓할 건 없다. 그러나 더 바람직한 일은, 제 여력을 그런 여력조차 없는 당사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닐까. 분노는 지속되어야 한다. 늘 그래왔듯, 이 분노가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한 채 거대한 카타르시스로 끝나지 않으려면 분노는 완주해야 한다. 100m를 달리는 페이스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순 없다.

뜨겁기만 한 분노는 진실을 표면만 훑거나, 기껏해야 기존의 분노와 애정을 재생하고 재현하는 데 머물게 된다. 이를테면 ‘박근혜가 아니라 노무현이었다면 김대중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보자. 대통령이 왕인가. 나쁜 왕을 욕하며 자비로운 왕을 추억하는 태도야말로 사회적 퇴행을 불러올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왕이 누구든 대통령이 누구든 이런 참사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뜨겁기만 한 분노는 결국 식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러 차갑게 식힌 분노는, 뜨거움을 내 이성과 사유에 새긴 차가운 분노는 독하게 지속된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피력했듯, 이번 참사의 근본 배경은 한국식 자본주의라는 살인 체제다. 사람보다 이윤이 우선인 게 자본주의의 일반적 속성이지만, 오늘 한국식 자본주의처럼 극악한 살인 체제는 지구 어느 곳에도 없다. 이번 참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에 한류의 주역인 대한민국이 실은 극악한 살인 체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이 살인 체제와 나는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세월호의 노동 현실, 선장이고 선원이고 제 일에 대한 자부나 책임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노동 현실은 비정규 불안정 노동의 전면화라는 오늘 한국 노동현실의 일반적 사례일 뿐이다. 나는 그 사실에 진즉 분노했던가. 혹시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며, 내가 그나마 나은 처지임에 안도하며 외면해오지는 않았던가.

세월호 참사로 쌍용차와 밀양과 유성기업과 제주 강정 등의 싸움이 잊혀졌다고들 한다. 감당키 어려운 참사 앞에서 얼마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서라도 이윤을 추구한다’는 그 싸움의 배경과 내용은 세월호와 다르지 않다. 세월호는 대한민국 도처에 널려 있다. 침몰한 세월호에 분노하는 나는 더 일찍 난파하여 절박하게 구조 신호를 보내온 그 세월호들에 분노했던가. 17살이라는 꽃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안타까워하는 나는 한국의 17살들이 이미 꽃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던가. 한국의 17살들이 떠나는 사연의 1위가 사고나 재난이 아니라 자살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며 밤늦도록 학원으로 내몰진 않았던가.

어쭙잖은 성찰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미 수구언론은 ‘우리가 다 죄인’이라느니, ‘모든 어른이 죄인’이라는 식의 거짓 성찰로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진실은커녕 최소한의 사실관계마저 덮으려는 악랄한 수작과, 진실의 전모를 사회 성원으로서 나까지 포함시켜 정직하게 드러내는 노력은 전혀 다른 것이다. 1999년 6월30일 새벽 경기 화성군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 불이 나 자고 있던 유치원생 19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참사로 아들을 잃은, 국가대표 선수 출신의 한 엄마는 몇 달 후 모든 훈장과 메달을 국가에 반납한 뒤 이민을 떠났다. 그의 절망은 단지 한 대통령이나 한 정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엄마가 느낀 절망감을 15년이 지나서야 느끼고 있다. 미처 몰랐다는 듯한 얼굴로, 나와는 무관한 특별한 불행인 줄 알았다는 얼굴로 말이다. 우리는 박근혜씨의 대통령직 하야를 요구한다. 하야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박근혜의 하야는 나의 하야와 병행되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말하며, 나와 내 새끼의 구명보트를 기대하며 이 살인 체제를 외면해온, 그래서 결국 99%에 해당하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지옥을 만들어버린 내 삶으로부터 즉각 하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박근혜는 다른 박근혜로 교대될 뿐이다. 아, 우리는 이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4/29 09:05 2014/04/29 09:05
2014/04/23 13:43
침묵 없이는 잘 말할 수 없고 절제 없이는 잘 행동할 수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 물론 분노의 속도나 방법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분노의 지속이다. 우르르 몰려 고함치다가 좀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는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또 한번 반복하려는 게 아니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분노는 지속되어야 한다.
2014/04/23 13:43 2014/04/23 13:43
2014/04/23 13:43
침묵 없이는 잘 말할 수 없고 절제 없이는 잘 행동할 수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 물론 분노의 속도나 방법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분노의 지속이다. 우르르 몰려 고함치다가 좀더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는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또 한번 반복하려는 게 아니라면,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분노는 지속되어야 한다.
2014/04/23 13:43 2014/04/23 13:43
2014/04/23 01:12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없다. 사람에겐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다.
2014/04/23 01:12 2014/04/23 01:12
2014/04/17 21:05
많은 경우에, 다른 이의 고통에 연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과 절제다.
2014/04/17 21:05 2014/04/17 21:05
2014/04/09 16:59
대개의 동물은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는 현실을 그 자체로 대면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 특히 자본주의 하의 인간은 현실을 그 자체로 대면하는 걸 거의 본능적일 만치 두려워한다. 인간이 ‘현실적인 선택’ ‘현실적인 방법’이라 말하는 것들은 실은 그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안간힘이다. 인간은 현실을 그 자체로 대면하는 모든 시도를 ‘비현실적이야!’라고 비난한다.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2014/04/09 16:59 2014/04/09 16:59
2014/04/08 09:26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찬사가 많다.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등 그의 발언과 행보는 충분히 그럴 만해 보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한 인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꼴통’이라 비판받는 염수정씨의 추기경 임명에서 드러나듯 교황은 로마 가톨릭 체제라는 정치적 컨텍스트 안에서 작동하는 존재다. 인물보다는 그 개혁성 자체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걸 이끌어낸 요한 23세 교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요한 23세는 시쳇말로 ‘듣보잡’ 교황 후보였다. 개성이 강했던 전임 교황이 만들어낸 피로감에다 유력한 두 교황 후보의 각축전이 지속되자 가톨릭 지도부는 일종의 ‘징검다리’ 교황으로 요한 23세를 선출했다. 나이가 워낙 많아서(1958년 교황에 즉위했을 때 78살이었다) 어차피 교황을 오래 맡기도 어려웠고 특별한 개성을 가진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듣보잡 징검다리’ 교황이 가톨릭 역사를 뒤집어 놓는다. 요한 23세는 1959년 1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명한다.

4년의 준비를 거쳐 1962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이라는 방대한 성과를 남겼다. 그중 몇 가지를 들면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라틴어로 봉헌되던 가톨릭 미사가 각 나라 언어로 봉헌되기 시작했다. 개신교에 대한 ‘열교’라는 멸시적 표현을 ‘분리된 형제’로 고쳤고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도 적시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인 책임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변화가 남미의 해방신학 운동을 비롯, 가난하고 약한 인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에 힘을 실어준 건 물론이다. 한국의 정의구현사제단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교리의 면에서 혁신은 ‘교회 밖의 구원’을 인정한 것이다.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라면, 다른 종교를 믿거나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곳의 사람들은 꼼짝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런 논리가 얼마나 많은 야만과 제국주의 수탈의 빌미가 되었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으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해도 하느님 입장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교회라는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1963년 6월 선종한다. 보수세력은 후임 바오로 6세가 그 ‘경악할 만한 상황’을 종식하길 기대했지만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지속하여 완료한다. 이후 30여년 동안 교황 이름은 ‘요한바오로’가 된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개혁정신을 이어받는 의미다. 2005년 ‘요한바오로’라는 이름을 떼고 즉위한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의 개혁 정신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2013년 3월 자진 사임했고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의 개혁 정신을 잇고 있다.

가톨릭의 거듭된 개혁적 갱신이 가능한 가장 결정적 이유는 ‘독재 체제’다. 만일 개신교처럼 민주주의 체제라면 제아무리 개혁적인 교황이 나와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개혁에 불만(은 물론 신학적 견해 차이를 넘어 냉혹한 이해관계를 둘러싼 것이다)을 억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오랫동안 독재 체제와 싸워 정치적 민주주의를 회복한 한국의 진지한 시민들에겐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에서 오늘 민주주의에 대한 유의미한 질문을 얻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 사회는 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되어 좋은 세상이 열렸는가? 대통령을 욕해도 죽진 않게 되었지만 새롭게 등장한 자본 독재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실체를 더욱 훼손해왔다. 학원 민주화의 열망은 대학이 모조리 기업으로 변신하는 걸로 귀결했다. 악취나는 한국 보수개신교 교회 문제도 결국 교회가 자본주의에 먹혀버린 현상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회든 교회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상충한다는 사실, 민주주의가 실체를 가지는가 여부는 자본주의의 통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예수는 이미 “하느님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순 없다”(마가 6:24)고 못을 박았다. 자본주의는 ‘공식적인 마몬의 체제’다.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비판하는 교황은 괜스레, 우연찮게 출현한 게 아니다. 가톨릭의 개혁 정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잦아들었고 앞서 언급한 베네딕토 16세 시기엔 ‘제3차 바티칸 공의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 여론이 결국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교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쁜 교회 때문에 신도들이 고통받는다는 말은 사실이되, 절반만 사실이다. 교회는 신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신도는 나쁜 교회를 만들며 심지어 하느님을 살해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구심이었던 칼 라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건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넘어 다른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4/08 09:26 2014/04/08 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