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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27 꼭지점
- 2014/02/26 여왕과 연아 사이
- 2014/02/20 대안 없는 비판
- 2014/02/18 만 명의 사람, 만 개의 예술론
- 2014/02/14 재앙
- 2014/02/11 애끊다
- 2014/02/03 무책임한 상상력에 경의를
- 2014/02/01 새해 글귀
2014/02/27 09:30
김연아 씨더러 '너는 대한민국이다' 말하는 광고에 대한 상당한 비난 여론, 러시아인이 되어버린 안현수 씨에 대한 합리적인 태도를 보면 드디어 한국 사회도 국가주의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우 중요한 변화다. ‘깨어있는 시민’을 설파하던 고 노무현 대통령도 한미 FTA나 이라크파병 반대 여론을 '국익'을 내세워 대응하곤 하지 않았던가. 물론 국가주의를 선동하고 악용하려는 국가나 자본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없다. 그러나 대중의 이런 변화는 결국 그들의 태도도 억지하게 된다. 흐뭇한 마음으로 권정생 선생의 ‘애국자가 없는 세상’을 다시 읽어본다. 존 레논의 ‘이매진’과 이 시는 많이 닮았다.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든, 넓고 치열한 사유는 결국 한 꼭지점에서 조우하게 마련이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2014/02/26 02:14
김연아 씨의 ‘도둑맞은 메달’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정작 분노해야 할 제 삶과 관련한 현실 문제에는 분노하지 않는다는 개탄이 있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는 거꾸로 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김연아의 일에 분노하느라 현실 문제에 분노하지 않게 된 건 아니니 말이다. 사람들은 김연아가 메달을 도둑맞든 않든 현실 문제에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했다. 이번 일은 오히려 ‘분노의 확인’이라 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분노하지 않는, 분노하는 법조차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실은 얼마나 켜켜이 분노가 쌓였기에 김연아의 일에 저리 분노할까, 라고 말이다.
그 분노들은 ‘도둑맞은 메달’에 소용되지 않았다.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금세 수십만명이 참여할 만큼 열띠었음에도 ‘도둑맞은 메달’을 돌려받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연아의 마지막 경기는 이미 금메달인가 은메달인가를 따질 이유를 훌쩍 뛰어넘은 차원의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여왕의 퇴위식이었다. 김연아는 마지막 경기의 음악으로 존 레넌의 ‘이매진’을 선택했다. 10대 시절부터 한국 엘리트 체육의 영웅으로서 국가주의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그가 국가는 물론 종교도 사적 소유도 어떤 강권적 지배도 우상도 없는 세상을 노래하는 아나키스트의 성가, 이상주의자의 성가를 선택한 것이다. 여왕의 퇴위식은 그렇게 영원한 여왕의 명예와 지위를 선포하는 의식이 되었다.
이채로운 건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여왕’이라 부르면서도 동시에 ‘연아’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마치 친근한 아이를 부르듯 말이다. 물론 그 어느 한국인의 ‘연아’에도 하대의 뜻이 들어있진 않다. 10대 소녀 시절부터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연아’로 불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여왕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아니 더 광범위하게 ‘연아’로 불린다는 사실은 이채로운 일이다. 한국인들에게 김연아 씨는 ‘여왕’이자 ‘연아’다. 여왕과 연아.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이 극명한 대비와 중첩 속에 오늘 한국인들의 삶이 만화경처럼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스물다섯에 제 분야에서 인류의 정점에 오르고 일생 동안 그 명예와 지위를 확보한 김연아의 삶은 오늘 한국인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몇 광년은 동떨어진 것이다. 오늘 스물다섯 한국인의 일반적 삶은 어떤 것인가. 복잡한 사회학적 통계나 자료를 들먹이는 대신 노래를 하나 떠올려보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20대를 넘기는, 더는 질풍노도의 청년이 아니게 된 사람의 애수와 회한을 담은 노래다. 꽤 오랫동안 그 노래를 부른 사람도 듣는 사람도 서른 즈음에 기막히다고 여겨온 노래다. 그런데 지금 서른 즈음인 누군가가 그 노래를 부르는 풍경을 상상해보면 어떤가. 어딘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늙은이 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서른 즈음에’는 이제 마흔 즈음에나 어울릴 노래가 되었다. 오늘 한국에서 서른은 어른이 되고도 남은 나이임에도 실제론 어른이 될 수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서른이 그러한데 고작 스물다섯은 말해 뭣할까.
그들이 옛사람들보다, 김광석의 세대보다 게으르거나 철이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옛사람들보다 김광석의 세대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행여 제대로 된 어른이 되지 못할세라 사력을 다한다. 한국이라는 사회, 이 괴이한 자본주의 체제가 그들이 성장을 못하도록, 서른이 되어도 어른이 못 되도록 억누르고 짓누른다는 이야기다. 이 괴이한 체제에 한국인들이, 특히 그들보다 윗세대의 한국인들이 모두 납작 엎드려 있다. 촛불시위도 있고 나꼼수도 있고 부정선거 규탄도 있고 이런저런 역동적인 저항들이 지속되는데 무슨 소리냐고. 역동적인 저항의 풍경 역시 괴이한 자본주의 앞에는 납작 엎드려 있다. 이를테면 촛불을 들고 박근혜를 규탄하는 민주시민은 자정 즈음 슬그머니 휴대폰을 열고 제 아이가 학원에 다녀왔는지 확인한다. 규탄하는 그들은 또한 납작 엎드려 있다.
제 삶과 몇 광년은 동떨어진 여왕을 ‘연아’라 부르는 한국인들의 모습에 그 납작 엎드린 삶의 비루함과 비참이 투영되어 있다. 이 괴이한 사회를 살아내느라 켜켜이 쌓인 분노를 꽁꽁 숨긴 채 살아가는 그들은 김연아의 ‘도둑맞은 메달’에 대한 분노로 제 분노가 여전함을 확인한다. 스물다섯에 이미 이 현실에서 훌쩍 날아오른 여왕을 ‘연아’라고 부르길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훌쩍 날아오르고 싶은 제 꿈을 간직한다. 지사도 투사도 아니며 그저 살아내는 사람들이지만, 분노할 줄 모르며 분노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한 제아무리 도저하고 영웅적인 엘리트들이라 할지라도 눈곱만큼의 새로운 역사도 짓지 못한다는 사실을, 걸핏하면 개탄을 일삼는 조급증 걸린 엘리트들에게 슬쩍 내비친다. 친애하는 그들의 여왕, ‘연아’와 함께.(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2/20 00:07
‘대안 없는 비판’처럼 말이 안 되는 말도 없다. 대안은 만들어가야 할 것이며 당연히 ‘현재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에 대한 비판이 저절로 대안을 만들어내진 않는다. 대안을 말하는 사람들이 현재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2014/02/18 09:18
(사진평론가 김현호 선생이 내 글 '무책임한 상상력에 경의를'을 읽고 페이스북에 적은 의견과 그에 대한 내 생각.)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은 무책임한 상상력이라는 글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쓴 게 아니라, ‘진보예술(가)의 정치적 전위성’에 대해 쓴 것이다. 글의 맥락이 충분히 그렇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두에게 충분하진 않을 수 있다. 충분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글을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쓴 글이라 파악하는 사람에게 이 글은 당연히 오독의 여지가 있다.
어쨌거나 이 글은 ‘진보예술(가)의 정치적 전위성’에 대해 쓴 것이고, 그 동기는 글에 언급했듯 지난 대선 직전 젊은 시인·소설가 137명의 ‘우리는 정권교체를 원합니다 ’라는 선언문이었다. 나는 그 선언문이 매우 서글펐다. 특히 “그가 진보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라는 구절은 정치인이나 할 소리지, 작가들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나에게 이 선언의 사회적 의미는 민중문학과 민중예술의 정치적 전위성이 사라졌음을 ‘매우 뒤늦게’ 공식화하는 것, 이었다.
민중예술의 정치적 전위성에 의미를 두는 것과 민중예술을 무작정 옹호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80년대 민중예술의 정치적 전위성을 존중하지만 동시에 예술적 조야함에 대한 무딘 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답습엔 매우 부정적이다. 그러나 대개 이 둘은 뭉뚱그려지곤 했다. 80년대에는 정치적 전위성의 당위에 예술적 조야함이 묻혔다면, 이젠 80년대 예술의 예술적 조야함에 대한 비판을 통해 ‘지금, 여기’의 정치적 전위성을 묻는 경향이 있다.
김선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당위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밝은 미래와 굳센 노동자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그리고 슬프게도 프로파간다로 전락했다. 나는 그것이 당위성에 매몰된 예술이 지니는 내적 한계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동감하지만, 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제는 그 이상이었다고 본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치하의 예술가들은 단지 ‘당위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세상’을 그린 게 아니라 ‘당위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세상이라고 교시된 것’을 ‘교시된 형식과 창작 방식’으로 그려내야 했다. 정치에 지도되거나 지배되는 것, 정치의 상상력에 머물거나 매몰되는 것은 예술이 아니거나 한심한 예술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정치’란 소련이나 북한 같은 사회주의 파쇼체제뿐만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회의 ‘당위의 정치’는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겐 ‘반이명박 연대’ ‘비판적지지’ 따위 ‘당위의 정치’가 좀더 심각하게 적용될 수 있다.
‘모든’ 예술(가)이 정치적 전위성을 가져야 할까? 물론 아니다. 예술은 그런 규정이나 당위에서 가장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엔 정치적 전위성을 담은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 자유까지 포함된다. ‘정치적 전위성은 순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다. 민중예술, 혁명예술, 급진주의 예술, 혹은 어떻게 불리든 정치적 전위성을 표방하는 예술은 사회의 가장 전위에 선다. 그 뒤에 활동가가 있고 더 뒤에 정치인이 있다. 대중은 활동가와 정치인의 사이에서부터 정치인의 후미에까지 분포된다. 글에 적었듯, 오늘 한국처럼 예술가가 활동가도보다 더 뒤에, 심지어 정치인보다 더 뒤에 위치한 사회는 불행하다. 부러 고전풍으로 말하면 이렇다. ‘더 이상 저 너머 세상을 노래하는 시인과 예술가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속물근성’에 관한 부분은 김 선생이 오독한 것 같다. 예술가들이 중산층 인텔리들의 속물근성에 봉사하기 위해 착한 행동을 했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착한 행동이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중산층 인텔리들의 속물근성에 봉사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착함' 때문이다. 예술가라면 제 행위와 활동에서 그 정도는 불편해할 줄 아는 자의식은 가져야하지 않을까. 이 문제는 전에 송경동 시인과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가름해본다.
김규항 = 사람들, 특히 진보적인 중간층 인텔리들은 어떤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비’하기도 해요. 권정생 선생 타계 후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었잖아요. 그 말엔 저 사람은 성자고 나는 사람이니 저 사람처럼 살지 않겠다는 뜻과 그래도 나는 저런 사람을 존중하고 의미를 이해하는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함께 담겨 있죠. 그건 실은 개인적 풍경이 아니라 불온하고 위험한 사람이 갖는 불온성과 위험성을 중화시키는 체제의 작업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신은 원했든 안했든 저명인사가 되어가는 상황인데요.송경동 =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고 봐요. 예를 들면 제가 ‘현장에 있는 유일한 시인’ ‘노동운동과 결합하는 유일한 시인’이라는 말을 듣는 게 기분 좋아지는 순간, 아마 내가 썩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저명해져야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용산 싸움을 예로 들면 60여명이 망루에 올라갔는데 거기에는 자기 지역이 아닌데도 올라간 철거민들이 있었어요. 그 새벽 망루에 올라갔던 평범한 사람들, 그 순간 인간적 연대와 유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들. 저명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죠.
김선생의 생각과는 달리 그와 내가 예술에 대해 특별히 다른 생각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대로 내 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범주와 차원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예술이 어때야 한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한다. 앞서 말했듯, 예술은 그런 당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어떤 것이다. 그리고 당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런 당위에 집중하는 예술조차 자유롭게 구가되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사례처럼 정치에 지도, 지배되는 예술을 예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자발성에 의해 정치적 전위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들, 존재해야 할 세상을 그려내는 예술가들이 이렇게 씨가 마른 사회가 숨 막힌다. 언뜻 모순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생각은 글에도 짧게 언급했다. (“장기적인가 단기적인가, 이상적인가 현실적인가, 리얼리즘인가 문자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형식인가 따위는 상관이 없다 . 요컨대, 예술가는 ‘무책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의 형상을 그려내는 존재다.”)
정태춘 선생에 대한 언급은 ‘역설적 사례’라는 말에 초점을 두면 될 것이다. 정치적 전위성을 확보하지 못할 바엔 정태춘처럼 그만두라는 게 아니라, 때론 예술을 중단하는 것이 가장 예술(가)적인 상황이나 시절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어떤 교조에 예술을 구속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범주를 예술의 부정까지 무한 확대하는 뜻에서다. 가리타니 고진은 문학의 임무는 세계변혁이며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시절의 진정한 문학인은 더 이상 문학하지 않는다며 그 예로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와 한국의 김종철(녹색평론)을 든 적이 있다. 그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고진에게 ‘그렇다면 세계변혁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고진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고진은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문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다른 견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닐 테니. 나 역시 그렇다. 만명의 사람들이 만개의 내용으로 ‘문학은 이런 것이다!’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떠들어대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문학적이며 가장 예술적인 사회의 풍경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전보다 좀더 예술과 친연성을 갖고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한 이런저런 준비들도 조금씩 하고 있다. 예술에 관한 글도 전보다 많이 쓸 생각인데, 자연스레 나와 예술가들 사이의 소통과 이해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아직은 그 폭이 지나치게 좁은 상태이고, 그래서 발생하는 오해와 불편(김선생이 언급한 '천박한 욕설'을 포함한 ㅎ)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가, 곧 넓어질 것인데.
2014/02/14 13:02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큰 재앙은 교육의 목표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서 ‘얼마짜리가 되는가’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사회를 아주 오랫동안, 회복 불가능한 지경까지 망가트릴, 좌우도 상하도 없는 재앙.
2014/02/11 10:58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는 '창자, 내장'을 뜻하는 '스플랑크논'의 동사형이다. 한국어 성서엔 ‘측은하다’, ‘불쌍하다’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엔 '스플랑크니조마이'가 세 번 나온다. "그러니 그분은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만지시고 그에게 "원하니 깨끗이 되시오" 하셨다."(1:41) "그래서 그분은 (배에서) 내리면서 큰 군중을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6:34) "군중이 측은합니다. 그들이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있는데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8:2)
그러나 실은 한국어에는 '스플랑크니조마이'와 기막히게도 같은 말이 있다. '애끊다'는 말이다.('애끓다'와는 다른 말이다.) '애'는 바로 '창자, 내장'을 뜻하고, '애끊다'는 말은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측은한 마음이 드는 건 정상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애끊지는 않는다. 우리가 애끊는 순간은 낯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제 아이나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면할 때다.
예수는 난생 처음 만난 나병환자에게 애끊는다. 바로 이것이 예수라는 사람의 속내이며 행동의 원천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동정심을 넘어)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 역시 그러하길.
2014/02/03 22:02
예술(과 문학)이 인간이 해내는 가장 멋진 일인 건 세상에 없는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술이 만들어내는 형상 중엔 ‘세상 자체’도 포함된다. 예술가(와 작가)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해야 할 세상을 그려낸다.
물론 새로운 세계의 형상을 그리는 건 예술가만이 아니다. 활동가와 정치가도 세계의 형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전위성의 순서는 다르다. 정치가는 지금 당장, 단기간에 실현 가능한 세계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들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건 그들 꿈의 제한성이 갖는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다. 활동가는 정치가보다 더 꿈을 좇는다. 그러나 활동가의 임무는 꿈을 좇는 것보다는 꿈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데 있다. 예술가만이 그런 모든 제한을 벗어난 존재다. 예술가는 제 상상력으로 뭐든 그려낼 수 있다. 장기적인가 단기적인가, 이상적인가 현실적인가, 리얼리즘인가 문자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형식인가 따위는 상관이 없다. 요컨대, 예술가는 ‘무책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의 형상을 그려내는 존재다. 예술가가 그려낸 새로운 세상의 형상은 활동가에게 정치가에게 그리고 모든 사회성원에게 공급된다.
예술가의 전위성은 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부의 지표다. 강력한 사회변화의 시기, 변혁 혹은 혁명 직전에 예술가의 전위성이 폭발하는 건 그래서다. 그런 시공간이 예술가에게 전위성을 부여하며 예술가의 전위성은 다시 그 시공간의 근원적 에너지원이 된다. 반면에 정체된 사회, 온갖 모순과 억압과 착취가 팽배함에도 그에 걸맞은 싸움은 없이 헛발질만 난무하는, 지배 계급의 안정성만 더해가는 오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예술가의 전위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 사회에서 예술가는 활동가보다 더 후위에, 심지어 진보적 경향의 정치가보다 더 후위에서 군락지를 이루며 연명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예술가의 전위성이 도드라진 시기는 해방 공간과 1980년대라 할 수 있다. 그 중 1980년대는 현재의 예술계와 닿아 있다. 1980년대의 전위적 청년 예술가들이 바로 현재의 중견 예술가들이다. 사회의 가장 전위에서 제 신체를 내걸고 상상력을 폭발하던 그들은 이제 활동가는 고사하고 진보적인 정치가보다 더 후위에, 이른바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시민들’ 속에 식별 불가능한 형체로 섞여 있다. 그들은 종종 ‘1980년대 민중예술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경도되어 예술적 상상력을 정치 강령과 바꿔먹은 편향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비판과 성찰은 현재의 전위성을 모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위성 자체를 폐기하기 위해, 그들이 ‘소싯적에 좀 했던 아저씨’로 행세하기 위해, 여전한 도덕적 우월감과 엘리트 의식으로 치장된 그들만의 군락지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된다.
그러나 어떤 애석함도 전위성의 폐기가 오염된 강처럼 흐르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애석하진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 대선 직전 젊은 시인·소설가 137명은 ‘우리는 정권교체를 원합니다 - 그로써 자유의 영토가 한 뼘 더 자라나리라 믿습니다’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가 진보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기울일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 답은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정권교체’란 지난 정권, 즉 노무현·김대중 정권으로 복원을 말한다. 두 정권이 과연 약자의 신음에 더 잘 귀기울였는가, 그럴 거라 기대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의 신망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은 생략하기로 하자. 그러나 선언문은 소기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137명의 작가들의 선언에 귀기울이거나 영향을 받을 사람 가운데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137명의 작가들이 긴급하고 비장한 얼굴로 선언한 건 단지 그들이 전위성을 잃은 작가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술가들이 도달한 최근의 전위성은 ‘착한 행동’이다. 용산, 쌍용차, 강정을 비롯한 주요한 투쟁 현장에 얼마나 얼굴을 비치는가, 돕는가가 전위성의 표현이 된 것이다. 지지하고 돕기는커녕 빨갱이들이라 비난하는 이들에 비하면 상찬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본색은 ‘착한 행동’이 아니라 ‘나쁜 행동’에 있다. 예술가는 여기저기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상찬받으며, 의식있는 사람으로 행세하려는 중산층 인텔리의 속물근성에 봉사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불온한 상상력으로 오히려 누구도 함부로 상찬하기 어렵도록 불편을 행사하며, 현재의 세상과 포탄처럼 충돌하는 ‘나쁜 사람’이다.
앞서 ‘무책임한 상상력’이라는 표현은 음악가 정태춘의 말이다. 그는 예술의 전위성을 맹렬하게 체현하던 주요한 예술가 중 하나였지만 ‘소싯적에 좀 했던 아저씨’가 되길 거부했고, 예술의 전위성을 폐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예술 활동의 중단을 선택했다. 그의 고뇌와 역설적 실천은 지금 이 순간 ‘예술가는 세상과 어떻게 충돌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미지의 예술가들에게 참고가 된다. 미지의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무기가 될 무책임한 상상력에 경의를 보낸다.(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2014/02/01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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