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1998, 야간비행, 저 너머 세상을 향하여..
'2013/12'에 해당되는 글 17건
-
2013/12/31
부활
-
2013/12/31
완고한 마음
-
2013/12/31
조끼 입은 정치인과 희망
-
2013/12/30
냉정한 비판과 토론, 온당한 인정과 자긍
-
2013/12/28
거대한 균열 - ‘총파업’ 단상
-
2013/12/27
반갑고 즐겁고 맛있는
-
2013/12/26
성인도 악마도 아닌
-
2013/12/24
비판적 해소
-
2013/12/23
비판적 해소
-
2013/12/19
페북질
-
2013/12/17
릴레이 캠페인
-
2013/12/14
예수는 사형당했다
-
2013/12/10
만델라의 반복
-
2013/12/05
연대 기부
-
2013/12/03
파고드는 차가움
-
2013/12/03
관광 독서
-
2013/12/02
그래 사는 게 아이다
2013/12/31 20:50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끝이 없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 반면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불신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역사 속에 실재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 일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달라진 모습 사이에 예수의 부활 사건이 있다.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다. 예수의 부활을 둘러싼 모든 주장과 논란은 예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예수의 죽은 세포들이 재생한 사건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부활이 단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것이라면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살아난 육체는 즉시 노화를 시작하고 어쩌면 그날 다시 죽을 수도 있다. 죽은 육체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건 단지 육체가 사흘 동안 노화를 멈추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적이지만, 그런 이적이 우리의 존경이나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는 이미 제자들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람은 대개 육체를 사용하는 시간을 목숨이 유지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한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착에 빠지게 한다. 금방이라도 인생이 지나가 버릴까 아쉬워, 혹은 반대로 인생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착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크든 작든 이런저런 온갖 부질없는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히고 떠밀려 인생을 보낸다.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육체의 목숨은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고, 육체의 목숨에 연연하면 진정한 목숨을 영원히 잃고 만다고 말한다.(8:34~38) 제자들은 예수의 죽은 몸이 살아난 광경을 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라면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살아 있는 예수를 떠났었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죽지 않았다고, 영원히 살아 있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이란, 살아 있다는 것이란 진정 무엇인가? 육체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그것이 찬미되는 순간에도 이미 늙고 있다.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보다 힘차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그들을 둘러싼 모든 인간적 호의와 관계들은 대개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향한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이 그들의 시체를 쓰고 살아 있는 것이다. 스무 살짜리 노인도 있고 여든이 넘은 청년도 있다.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은 지 오래이나 목숨은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목숨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지만 진정한 목숨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래서 육체의 목숨에 집착하느라, 그 목숨이 지속하는 시간 동안의 안락과 이런저런 부질없는 욕망의 충족에 매달리느라 정작 그 시간조차 허비하고 마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오랜 종교적 수련이나 특별한 구도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바로 이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어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 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2천 년 전에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목숨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정말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전 261~264쪽)
gyuhang
2013/12/31 20:50
2013/12/31 20:50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90
-
Tracked from breaking news
2014/08/14 16:3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ambling guide
2016/03/05 02:04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ambling guide
2016/03/05 02:05
삭제
GYUHANG.NET ::
2013/12/31 17:51
(마가복음 6장 45 그리고 즉시 당신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셨다. 그 동안에 당신은 군중을 해산시키셨다. 46 그리고 그들과 작별하신 후에 그분은 기도하려고 산으로 물러가셨다. 47 그런데 저녁때가 되어 배는 호수 가운데 있었고 그분은 홀로 육지에 계셨다. 48 그분은 제자들이 노를 젓느라고 몹시 고생하는 것을 보시고―바람이 그들에게 마주 불고 있었던 것이다―밤 사경에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로 가셨다. 그런데 그분은 그들을 지나치시려고 했다. 49 그러자 그들은 그분이 호수 위를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고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질려 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그분은 즉시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시며 그들에게 "힘내시오, 나요. 무서워하지 마시오" 하셨다. 51 그러고서는 그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심하게] 정신이 나갔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던 것이다.)
물 위를 걷는 광경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한다는 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란 늘 그렇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사람들은 대개 보고 듣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다.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사회의식을 가졌다는 많은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중세의 암흑을 무너트리는 훨씬 더 어려운 변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덕에 그들 스스로가 법적인 차원에서나마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 이유는 실은 그들이 그 일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반대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를 진짜 극복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의 지난함, 그리고 그 극복이 가져올지 모르는 제 얼마간의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구석에 끼어 안온하게 생을 보내는 일을 분명히 선택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은 되지도 않는 논리로 제 탐욕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자본주의를 찬미하는 막돼먹은,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반감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그래서 많은 인민들에게서 양식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절대 자본주의가 극복되길 바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그들이다. (예수전 111~113쪽)
gyuhang
2013/12/31 17:51
2013/12/31 17:51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9
-
Tracked from scoreslive.zendesk.com
2014/08/12 06:50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instylespasalon.com|in style salon|in style spa salon
2014/09/22 22:5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my empire pro
2015/05/07 23:39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i buy houses cash
2016/04/01 21:41
삭제
GYUHANG.NET ::
2013/12/31 17:16
어젯밤 ‘고래가그랬어 예술화’ 작업에 함께 하는 몇몇 디자이너들과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그중 한 사람의 이야기. 대학 시절 집회 포스터를 집회 포스터 같지 않게 디자인해주었는데 평소 집회에 참여하지 않던 학생들이 그 포스터를 보고 참여했으나 막상 집회에선 많이 힘 빠져 하더라는 이야기. 28일 총파업 집회가 떠올랐다. 노동을 주제로 한 집회에 처음으로 참여한, 전국 각지에서 민영화 반대의 대의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대오’와 ‘발언’ 말곤 어떤 문화적 상상력도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의 박제를 보는 듯한 몇 시간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렵사리 준비한 배터리를 소진한 그들은 어디에서 다시 배터리를 충전해야 할까. 집회의 구태는 실은 집회의 기획이나 연출 같은 형식의 문제를 넘어 오늘 조직노동(민주노총)의 상태를 폭로한다. 연단에선 머리띠를 매고 결사투쟁을 외치지만 밤엔 보수 정치인들과 밀실 타협을 하는 조직노동 ‘지도부’의 모습을 말이다. 수서발 KTX 면허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 합의문을 들고, ‘사법 처리’를 공언하는 놈들 앞에서 ‘승리’를 선언하는 그들은 노동운동가인가 ‘조끼 입은 정치인’인가. 우리는 ‘남성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위주의 조직노동이 대다수 노동자(이자 시민)의 삶을 대변하지 않은 지 오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조직노동에만 의지한 진보정당이 진보정치를 무너트렸다는 사실도. 그러니 큰 기대라도 했던 것처럼 거듭 실망하거나 낙심할 건 없을 것이다. 다만 당연한 사실 하나. 언제나 희망은 '지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힘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 우린 희망의 단초를 보며 해를 넘긴다.
gyuhang
2013/12/31 17:16
2013/12/31 17:16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8
-
Subject: news
Tracked from news
2014/09/29 07:25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Facebook Password Hack
2014/12/11 08:41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Baby Sling
2016/05/28 15:16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management
2016/12/13 12:01
삭제
GYUHANG.NET ::
2013/12/30 14:44
조합원 찬반 투표도 있으니 최종적 판단이나 비판은 서두르지 않아야겠지만, 그 결과가 어떠하든 이번 싸움은 이미 큰 사회적 진전을 이루었다. 먼저 철도노조 조합원들. ‘귀족노동자’라는 트집이 나올 만큼 안정적인 정규직 노동자들이 즉각적인 직위해제라는 간경 탄압에도 불구하고 22일이나 파업을 지속했다. 그들은 민영화 문제를 온 사회의 문제로 만들었다. 철도노조 지도부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비판받더라도 그들은 격려받고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 싸움에 연대한 시민들. 서울 광장에 모인 10만 이상의 시민들과 전국 각지에서 연대한 수많은 시민들, 즉 시민이자 노동자들은 민주화 이후 시민의 의제에만 매몰되던 사회운동의 중심축을 시민이자 노동자의 의제로 옮겨놓았다. 이를테면 2009년 쌍용차 투쟁이 시민들의 철저한 외면(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겹치면서 더욱 심해진)으로 처참하게 진압된 상황과 비교한다면 이 변화는 ‘질적인’ 것이다. 이 질적인 변화가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무작정 긍정하고 낙관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철도노조 파업투쟁은 민영화 반대 싸움의, 신자유주의 반대 싸움의 한 국면이지 전부는 아니다. 이 싸움은 단지 한 정권과의 싸움이 아니다. 싸움이 길고 지난할 거라는 사실, 여러 객관적인 조건으로 볼 때 최종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이 많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싸움의 한 국면을 지날 때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냉정한 비판과 토론, 온당한 인정과 자긍이 병행될 때 승리의 가능성도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gyuhang
2013/12/30 14:44
2013/12/30 14:44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7
-
Tracked from KEEN倉庫 Ladys レディース Shanti シャンティス
2014/07/23 01:47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benefits of coconut oil
2014/09/15 12:12
삭제
GYUHANG.NET ::
2013/12/28 14:02
(때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저런 궁리와 논의는 접고 ‘나가자!’ 한 마디로 행동할 필요가 있을 때가 말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그러나 오늘 ‘총파업’ 집회는 근래 있어왔던 ‘나가자!’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는 거대한 균열, 거대한 변화의 분기점을 통과하고 있다. 이동 중에, 거칠게나마 적어본다.)
선거부정 문제를 둘러싼 촛불집회가 지속되어 왔고 민주당도 집중 의제로 삼았지만 그 열기는 폭발적으로 확산되진 않았다. 흐름을 한순간에 바뀐 건 한 대학생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와 그를 잇는 수많은 대자보의 행렬을 통해서다. 안녕 대자보는 몇 달 전 몇몇 대학총학생회의 ‘시국선언’과 언뜻 비슷했지만 실은 매우 달랐다. ‘노동’과 ‘민영화’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는 대략 ‘두 자유의 문제’라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확보하고 지켜야할 자유고 다른 하나는 견제하고 넘어서야 할 자유다. 정치적 자유와 시장자유(신자유주의)가 그것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고통과 억압, 그리고 분노는 두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애석한 건 정치적 자유의 의제가 시장자유 의제를 흡수해버리는 일이 되풀이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대중의 분노와 열기는 ‘민주 회복’이라는 30년 전 구호로 돌아가고 ‘정권 교체’라는 목표로 축소되어 결과적으로 민주당 따위 신자유주의의 또다른 주역인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재집권’에 이용되어 왔다.
오늘 집회가 ‘촛불집회’가 아니라 ‘총파업’이라는 사실은, 총파업이라는 말을 조끼입은 조직 노동자들끼리의 말로 여기던 사람들이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기만적인 반복에 균열이 생겼음을 뜻한다. 대중은 국정원 선거부정뿐 아니라 민영화를 비롯한 노동과 신자유주의 문제들이 내 삶의 문제임을 받아들이고 있고, 이 모든 문제들이 박근혜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지배체제의 문제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아침에 한 영화감독은 “서울광장에 나간다. 그런데 이러다 선거부정 문제가 묻히는 건 아닌가?”라고 물었다. 물론 오늘 광장엔 선거부정 문제(정치적 자유 의제)에 좀더 집중하는 사람들도 오고 민영화 문제(신자유주의 의제)에 좀더 집중하는 사람들도 온다. 그러나 중요한 건 두 문제는 적대적이지 않으며 선순위 후순위로 나눌 문제도 아니며, 무엇보다 실은 그 둘이 한 문제라는 사실이다. 생각해보자. 노동 문제와 신자유주의 문제를 덮어둔 채 공정선거가 이루어지고 국정원이 정상적 업무수행을 하면 그게 민주주의인가? 그건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1%의 천국, 상성왕국 현대왕국일 뿐임을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정치적 자유 의제만 부각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재집권)로 삼으려는 세력이 존재하고 그에 이용당하는 악순환이 있어왔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의제를 분명히 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안심해도 되는 건 정치적 자유 의제를 부각하여 신자유주의 의제를 덮을 순 있지만 신자유주의 의제를 부각하는 건 너무나 당연히 정치적 자유 의제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대부분은 시민의 정체성과 노동자(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정규든 비정규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정치적 자유 의제만 부각되고 신자유주의 의제는 묻혀왔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시민의 정체성만 부각되고 노동자의 정체성은 묻혀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진중공업이나 홍대 청소노동자들 파업에 연대하는 시민들이 많았지만 그 역시 ‘시민인 내가 노동자인 그들을 돕는’ 경향이 엄존했다. “시민이 노동자의 싸움에 연대했다”는 당시 진보 언론들의 어투엔 그런 애석한 상태를 포현한다.노동자가 다른 노동자의 문제에 당연히 연대한 것인데 말이다. 연대를 하는 사람들이나 연대를 받는 사람들이나 똑같이 시민이며 노동자인데 말이다.
지배체제는 과거 독재 시절엔 시민의 정체성과 노동자의 정체성을 둘 다 눌러 지배했다. 그러나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다음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민의 정체성만 부각함으로써 노동자의 정체성을 덮는 방식으로 지배해왔다. 박근혜 정권은 다시 시민의 정체성까지 억압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에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것은 박근혜 정권의 그런 행태는 다시 시민의 정체성만 부각하여 노동자의 정체성을 덮으려는 세력에게 빌미를 준다는 사실이다. ‘총파업’은 우리가 그런 기만을 뚫고 현실의 실체와 대면하는, 그래서 이 포악하고 기만만적인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진보정치도 노직노동도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우리 스스로 말이다.
철도 민영화와 관련하여 시급한 일은 수서발 고속철의 번인 면허를 취소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도노조 파업이 승리하여 여타 민영화 작업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일 게다. 그러나 당장의 결과가 어떻든 한국 사회가, 한국의 시민이자 노동자들이 수십 년을 서성이던 거대한 벽, 현실의 실체를 막아선 포악하고 기만적인 벽을 넘어서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하다. 오늘 광장은 참 벅찬 광장이다.
gyuhang
2013/12/28 14:02
2013/12/28 14:02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6
-
Tracked from tumblr.com
2014/09/07 04:27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seo Barnet
2014/09/17 11:05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sbobet 128
2014/09/18 03:41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1st Page Organic Search Rankings
2016/02/27 19:24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1st Page Organic Search Rankings
2016/02/27 19:25
삭제
GYUHANG.NET ::
2013/12/27 15:02
2014 고래의 밤 '현재까지' 확정된 내용들.
- 새해의 마음으로, 1월 25일(토) 18시에
- 강원도민회관( 강원도가 아니라 서울 마포에 있는)에서- 류승완, 사이, 조이엄(염승식), 최고은 그리고 오지혜(사회) 님이 출연하고 - 조이엄과 내가 하우스밴드 노릇을 하며
"반갑고 즐겁고 맛있는 2014 고래의 밤"이라 적혀 있다.
반갑고 즐겁고 맛있는..
(출연자와 내용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gyuhang
2013/12/27 15:02
2013/12/27 15:02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5
-
Tracked from scarlett johansson nude phote
2014/05/30 12:56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paleo diet cook books
2014/08/29 06:25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https://www.rebelmouse.com/mcheats/deer-hunter-2014-hack-engine-n-698770967.html
2014/09/07 06:1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Pantofi Peep Toe
2014/10/02 04:40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oogle sniper review
2014/11/12 04:25
삭제
GYUHANG.NET ::
2013/12/26 13:27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고 신자유주의 대통령 노무현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박근혜 정권의 선거부정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민영화 문제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대통령 노무현을 좀더 보려한다. 자연스럽고 정당한 일이다. 그리고 둘 다 사실이다. 제 기득권을 버려가며 정의를 위해 싸운 변호사 노무현과 과격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하여 서민과 노동자의 삶을 벼랑으로 몰아넣은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와 토론은 두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영화 <변호인>을 보며 서럽게 우는 사람이 신자유주의 대통령 노무현을 비판하는 건 위선적인 태도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대통령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이 <변호인>을 보며 복받치는 감정을 억눌러야만 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만일 노무현이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를 이처럼 특별히 기억하진 않았을 것이다. 좋은 변호사였던 혹은 괜찮은 국회의원이었던 사람은 그 말고도 여럿 있다. 우리가 노무현을 특별히 기억하고 논란을 벌이는 이유는 그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권에서 벌인, 일어난 일들이 오늘 우리 현실에 많은 관련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영화 문제는 노무현을 빼곤 도저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빼고 박근혜의 민영화만 비난한다면 설사 박근혜가 하야한다고 해도,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민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지속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인권변호사였으며 신자유주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성인도 악마도 아닌,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었다.
gyuhang
2013/12/26 13:27
2013/12/26 13:27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4
-
Tracked from คลิปโป๊
2014/09/14 04:19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vitamin d foods
2014/09/14 14:18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Wolf X-Ray ID Printer Manual
2014/10/03 00:49
삭제
GYUHANG.NET ::
2013/12/24 12:20
이미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박근혜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런, 눈곱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비판이되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해소’다. 그 대상이 ‘박근혜’든 ‘민영화’든 ‘밀양 송전탑’이든 마찬가지다. ‘유유상종의 공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이른바 진보 경향의 미디어는 그런 비판적 해소로 차고넘친다. 민주노총 침탈이라는 박근혜 정부의 유례없는 만행은 우리를 비판적 해소라는 수월한 길로 더욱 유인한다. 이런 이야기가 마땅치 않게 느껴진다면, 2008년 촛불의 열정이 결국 어떻게 귀결했는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심판’의 열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되새겨보는 게 좋겠다. ‘비판적 해소’야말로 오늘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적인지도 모른다.
철도 민영화 반대 싸움은 많은 사람들을 비판적 해소의 문턱에 서게 한다. 철도 민영화와 관련한 사실관계들 때문이다. 철도 민영화는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철도를 4단계로 민영화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1단계는 철도의 시설부문과 운영부문 분리, 2단계는 철도청을 철도공사로 전환, 3단계는 철도공사의 경영 개선, 4단계는 철도 운영에 민간 참여로 경쟁체제 수립. 이명박 정부는 철도 민영화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노무현 정부를 이어받아 4단계를 추진하고 있다. 2003년 철도노조 파업 때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아니라 노조 지도부를 위한 노동운동, 정치투쟁은 정부가 보호할 수 없다”며 법에 따른 엄정 대처를 천명했다. 같은 해 노무현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 지도부 검거를 위해 민주노총 건물 침탈을 시도했다. 이번과 다른 건 침탈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거리낌없이 전원 직위해제를 해버린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야당의 그런 원죄가 깔려 있다. 그들은 지난 대선을 통해 ‘노무현의 FTA와 이명박의 FTA는 다르다’식의 말이 ‘이미 이명박과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합리적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박근혜를 미워하는 만큼이나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박근혜의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지만 노무현의 철도 민영화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인정하긴 꺼린다. 그들은 또한 김대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민영화를 반대하지만 한국에서 민영화가 본격화한 게 외환위기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역시 꺼린다. 그런 이중적인 혹은 감상적인 태도가 오늘 민영화 반대 싸움을 비판적 해소로 만드는 가장 주요한 힘이다.
민영화란 무엇인가. ‘공적 재산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the public property)라는 본디 말 그대로, 공적 서비스를 시장의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기 침체로 혹은 지나친 탐욕으로 장사를 해먹을 곳이 충분치 않아진 자본(재벌과 초국적 자본)이 공적 서비스 영역의 담을 무너트려 장사를 해먹으려는 작업이다. 포항제철(포스코), 한국통신(KT), 한국담배인삼공사(KT&G) 등 공공성이 덜한 곳들은 진즉 마무리되었지만 전기, 철도, 가스, 우편 그리고 의료보험 등 본격적인 노다지는 아직 남아 있다. 최후의 노다지를 차지하기 위해 자본은 무려 15년 동안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동원하고 조직해왔다. 여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직접 민영화보다는 민·관 합작이나 자회사를 끼워 넣는 방식으로 우회해가며 말이다. 그런 치밀한 적과의 싸움에서 민영화 15년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인정하기 꺼리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러나 민영화 반대는 반드시 승리해야 할 싸움이다. 자본과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싸우는 절체절명의 전쟁이다. 자본이 승리한다면 자본의 지상천국이 만들어질 테지만 우리 삶과 아이들의 미래는 나락에 떨어진다.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과 관련한 비판적 해소가 단지 김대중,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민영화와 관련한 김대중, 노무현의 흠결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덮으려는 태도엔 우리의 흠결을 김대중, 노무현을 통해 덮으려는 욕구가 담겨 있다. 이미 우리의 삶이, 우리가 직접 운영하는 삶의 영역이 이론의 면에서나 실제의 면에서나 충분히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유신독재 시절에도 뛰어놀며 자라던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학원을 돌며 시들어가고, 1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냉혹한 교육 민영화론자들이다. 민영화가 ‘유신공주만의 악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민영화를 들여다보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그 불편함이 우리의 전열과 싸움을 괜스레 맥 빠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우리의 분노가 다시 한 번 비판적 해소로 사라지지 않게 함으로써 승리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학가의 수많은 ‘안녕’ 대자보 속에 붙은 한 엄마의 대자보는 후자의 한 사례일 것이다.
“너희들에게만은 인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는데…, 너를 키우면서 부끄럽게도 성적과 돈에 굴종하는 법을 가르쳤구나. 미안하다. 이제 너의 목소리에 박수를 보낸다. 82학번 너희들의 엄마가.”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gyuhang
2013/12/24 12:20
2013/12/24 12:20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81
2013/12/23 01:08
'이미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끼리 박근혜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끝없이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런, 눈곱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비판이되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해소'다. '박근혜를 반대'의 자리에 '민영화 반대' '밀양 송전탑 반대' 등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비판적 해소가 가장 넘쳐나는 곳은 역시 유유상종의 공간인 SNS, 그리고 이른바 진보 경향으로 분류되는 미디어의 칼럼들이다.'
근래 하는 생각이다. SNS를 열심히 하진 않지만 '진보 경향으로 분류되는 미디어의 칼럼'을 쓰고 있는 처지인지라 찬찬히 되새겨 보고 있다. 오늘 다시 마감인데 민영화 이야기를 쓰기로 해놓고는 막막한 기분이다. 지난번 칼럼 그래 사는 게 아이다는 '파토스를 죽이고 팩트를 살리는' 방법으로 면피했지만 이번엔 어째야 하나. 한 동안은 이런 식의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노총 침탈 등 박근혜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만행은 나를(우리를) 비판적 해소라는 수월한 길로 거듭 유인하고 있다.
gyuhang
2013/12/23 01:08
2013/12/23 01:08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9
-
Tracked from tweetitis.com
2014/07/17 16:07
삭제
GYUHANG.NET :: 비판적 해소
-
Tracked from resnetworld.Zendesk.com
2014/08/24 03:11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rass puzzle tiles
2014/09/11 15:33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Highly recommended Online site
2014/09/23 23:3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online facebook password
2015/01/14 07:12
삭제
GYUHANG.NET ::
2013/12/19 17:14
며칠 전부터 페이스북을 조금씩 하고 있다. 규항넷 글을 링크하고 친구 신청해온 이들의 인사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간단한 답을 다는 정도이니 페이스북을 한다기보다는 알아가는 수준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인상 비평으로 트위터와 비교하자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는(그래서 세상 사람이 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줄 착각하게 되는) 속성은 그리 다르지 않은 듯 하나, 즉자적 선동이나 감정적 배설이 적고 생각했던 것보다는 블로그나 홈피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함도 보이는 같다. 내가 페이스북에 기대하는 건 아무래도 ‘소통’이다. 규항넷엔 댓글 기능이 아예 꺼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익명의 의견은 의견이 아니라 뒷담화일 뿐이라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에겐 꽤나 떠받들어지는 '키배'라는 것도 대개 생산적인 토론보다는 자족적인 카타르시스로 귀결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중 앞에서 의견을 제출한 이상그에 대한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늘 찜찜함이 있었다. 페이스북으로 그걸 보완/해결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어쨌거나 아직은 페이스북을 알아가는 수준이라 하는 짓이 영 매끄럽지 않다. 행여 그로 인해 서운함을 느낀 분이 있다면 사과드린다. 앞으로도 ‘유별나게 명랑하고 활발한 페북질’을 할 가능성은 적지만 여느 사람들이 하는 만큼은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ㅎ
gyuhang
2013/12/19 17:14
2013/12/19 17:14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8
-
Tracked from cnatraining00.livejournal.com
2014/08/19 00:43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maxsize male enhancement cream and how to use
2014/08/20 12:35
삭제
GYUHANG.NET ::
-
Subject: food
Tracked from food
2014/08/29 05:44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rass matting uk
2014/09/11 15:00
삭제
GYUHANG.NET ::
2013/12/17 12:41
광화문 지하차도 농성장에서 한달 동안 릴레이 캠페인.

gyuhang
2013/12/17 12:41
2013/12/17 12:41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7
-
Tracked from xeriscaping
2014/06/29 06:10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strength training runescape
2014/08/21 06:21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novoline online spielen kostenlos spielgeld
2014/08/23 01:0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Oriflame katalog 2014
2014/08/25 13:48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son teknoloji
2014/10/30 21:21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visit the up coming document
2014/12/25 16:59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Purebits
2015/01/11 07:38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naklejki na zamowienie
2015/01/12 03:18
삭제
GYUHANG.NET ::
2013/12/14 11:12
근래 교회의 정치 참여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정치 참여라.. 예수는 정치범으로 사형당했다.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형은 당하는 사람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가장 끔찍한 처형 방법이었다. 목을 치든 매달든, 총으로 쏘든 전기의자에 앉히든 어느 시대나 처형 방법의 공통점은 가장 짧은 시간에 절명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처형은 정반대였다. 절명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높이 매달려 죽어 가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에겐 사용되지 않았고 노예와 식민지 백성들에게만 사용되었다. 로마의 식민지에서 십자가 처형은 정치적 반역자에게 적용되었다. 그 지역 어디서고 고개만 들면 보이는 높은 곳에 발가벗겨 매달려진 채 몸을 뒤틀며 서서히 죽어 가는 사형수의 모습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로마에 저항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몸서리쳐지도록 되새기게 했다.
예수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해석이나 의견은 매우 다양하다.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 영성가, 비폭력주의자, 하느님의 아들 등등. 그런 모든 해석이나 의견을 존중하더라도 절대 생략되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지배 체제에 의해 사형당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관련한 모든 해석과 의견들은 예수가 '왜 사형당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라 말하는 사람들은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인 그가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예수가 영성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영성가인데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영성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예수가 비폭력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비폭력주의자인데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비폭력주의자'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서 예수의 모습에서 제 마음에 드는 한 부분만 똑 떼어 내어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입네, 예수는 영성가입네, 예수는 평화주의자입네 하는 것은 예수를 욕보이는 일이다. 사형은커녕 일 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서 예수 흉내로 세상의 존경과 명예를 구가하는 건 예수를 팔아먹는 짓이다.
예수를 제대로 좇고 있는지는 무엇보다 지배 체제와의 관계로 증명된다. 사회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다들 세상이 좋아지고 달라졌다고 해도 어느 한 귀퉁이엔가 인간으로서 위엄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예수를 좇는 사람은 지배 체제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가 살던 세상처럼 지배 체제와 불화했다고 해서 쉽게 죽임을 당하는 세상은 아니다. 그러나 지배 체제의 직간접적 탄압과 주류 사회에서의 배제,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에게서―심지어 같은 길을 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조차―일어나는 오해와 곤경은 다르지 않다. 지배 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예수전 254~256쪽)
gyuhang
2013/12/14 11:12
2013/12/14 11:12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6
-
Tracked from Selena Gomez Songs
2014/06/13 05:30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Clash of Clans Hack
2014/08/23 10:2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Minibus Hire Luton
2014/09/03 04:36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hair removal
2014/10/15 02:48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how to unlock a phone
2014/11/15 13:06
삭제
GYUHANG.NET ::
-
Subject: BDSM
Tracked from BDSM
2020/12/10 17:00
삭제
GYUHANG.NET ::
2013/12/10 13:37
‘위대한 자유의 투사’ 만델라를 기리는 일이 붐이다. 27년의 투옥으로 상징되는 그의 비타협적 싸움과 용서와 화해 정책 등은 그럴 상찬의 충분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 그의 싸움은 구분하여 살펴볼 지점이 있다. 인종차별 체제에서 해방된 남아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된 그는 그의 조국을 또 하나의 자유, 즉 시장 자유(신자유주의)에 넘겨주었다. 소수의 흑인부자들이 생겨났지만 극심한 양극화로 대다수 흑인의 삶은 더욱 고단하고 불안해졌다. 남아공화국의 기대수명이 인종차별 체제 시절보다 20년 이상 줄었다는 사실은 그 변화가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보여준다. 남아공화국은 여전히 민주세력이 집권하고 있지만, 지난해 8월엔 광산 노동자의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여 47명이 사망하기까지 했다. 백인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조국을 소망했던 옛 투사가 자본의 압제에 스러져가는 인민들을 보며 눈을 감는 심정은 어땠을까. 자본주의의 나팔수인 서방의 주류 언론은 만델라의 정치적 자유와 관련한 일생만 부각한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제3세계 문제에 대해선 서방 주류언론의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국 언론(기지촌 언론!)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적 자유와 관련한 만델라의 업적을 기리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만 기리는 대대적인 편향 속에 숨은 음험한 악의 또한 기억해야 한다. 만델라와 영예와 실패는 지구 반대편 바로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한국에서 또 다른 위대한 자유의 투사 김대중을 통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gyuhang
2013/12/10 13:37
2013/12/10 13:37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4
-
Tracked from 4ou.greekdesignhosting.com
2014/06/14 10:53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MMX Racing Cheats
2014/08/25 23:27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free pdf file viewer
2014/09/10 22:23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coquines.sx
2014/09/22 15:13
삭제
GYUHANG.NET :: 만델라의 반복
-
Tracked from Diet Plans to Lose Weight
2014/10/10 07:26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salope coquine
2014/10/23 03:27
삭제
GYUHANG.NET :: 만델라의 반복
-
Tracked from singorama login
2014/10/25 08:00
삭제
GYUHANG.NET ::
2013/12/05 00:37
고래동무가 다른 기부운동과 다른 게 뭐냐는 질문에
"대개의 기부 운동이 '자선 기부'라면 고래동무는 '연대 기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gyuhang
2013/12/05 00:37
2013/12/05 00:37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1
-
Tracked from cool training
2014/08/26 11:47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internete explorateur
2014/09/03 17:0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62.141.50.247
2014/10/19 20:03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7 zip free archiver
2014/10/31 10:4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reencardimmigrationsservices.com
2015/12/29 11:08
삭제
GYUHANG.NET ::
2013/12/03 20:20
이번 경향 칼럼은 다른 칼럼들과는 좀 다르게 썼다. '파토스는 죽이고 팩트는 살렸다'고 할까.
공전하는 뜨거움보다 파고드는 차가움이 필요한 시절..
아직 안 읽은 분은 신문판으로 편히 읽어주시길.
gyuhang
2013/12/03 20:20
2013/12/03 20:20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2
-
Tracked from slate roofing repairing
2014/05/07 07:46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fashion wallpaper
2014/06/12 11:48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epoch Senior Living
2014/08/29 23:04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Grass Mats From LogoMats
2014/09/04 08:24
삭제
GYUHANG.NET ::
-
Subject: cawk
Tracked from cawk
2014/11/09 01:44
삭제
GYUHANG.NET ::
2013/12/03 14:56
"읽는 책을 대폭 줄여 봐. 한 권을 잡아서 두어 달 동안 천천히 읽어보는 거야. 책이 삶과 닿고 사유의 살이 생겨날 거다." (어지간한 인문학 신간은 다 읽어치우면서도 사유의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하는 후배에게 한 말.)
책이라고 다 같은 책이 아니고 반나절을 바치기도 아까운 책들도 많지만, 이른바 인문학 책들을 빠르게 읽어치우는 사람들은 보면 심란스럽다. 널리 독서 가치를 인정받은 인문학 책이란 적어도 몇 해에 걸친 사유의 결정물인데 사나흘에 읽고 리뷰까지 적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건 관광이지 독서는 아니다. 시장의 요청이지 사유의 요청은 아니다. 여러 권의 책을 넘어 여러 학자를 몇 주에 걸쳐 섭렵하는 식의 인문 강좌는 패키지 관광상품이라 해야 할까. 인문학자라는 자들이 너나없이 그런 강좌에 나서는 걸 보면 역시 시장은 전능한 모양이다.
gyuhang
2013/12/03 14:56
2013/12/03 14:56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70
-
Tracked from his explanation
2014/06/06 10:3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landscaping ideas for front of house
2014/08/13 12:02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bit.ly
2014/10/25 06:41
삭제
GYUHANG.NET ::
-
Tracked from Swamp Attack Hack iOS
2014/10/28 06:49
삭제
GYUHANG.NET ::
2013/12/02 21:06
대개의 사람들은 765kV 송전탑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송전탑은 154kV 이고 크다 싶은 게 345kV이다. 765kV 송전탑은 높이만 95미터이며 한수원 자료에 의하면 150m 짜리도 있다. 20층 아파트 높이가 50m다. 한전은 밀양에 건설할 69개의 765kV 송전탑이 신고리 3호 핵발전소의 전력을 경북 지역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북의 전력 자급율은 이미 충분하다. 밀양 송전탑은 핵발전소의 전력을 서울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서울의 전력 자급율은 고작 4%다. 자급율이 100~400%에 이르는 지방에서 전력을 끌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밀양에 765kV 송전탑을 세워야 하는 건 아니다. 기존 송전탑을 증량하는 방식으로 전력 공급은 가능하다. 765kV 송전선로 건설을 강행하는 건 신고리 5, 6호 등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짓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 한전 스스로 밝힌 희한한 이유가 있다. 핵발전소 수출 계약을 맺은 아랍에미레이트에 ‘2015년까지 신고리 3호 핵발전소가 가동되지 않으면 위약금을 물기로 했다’는 것이다.
서울 사람들이 전기를 너무 펑펑 써서 생긴 일이라는 말이 그르진 않지만 구분이 필요하다. 요즘 가정집에서 어디 전기를 펑펑 써대는가. 전기요금이 비쌀 뿐더러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지고 살아야 하는 도시 생활에선 자칫 할증이라도 맞을까봐 지난여름 같은 무더위에도 에어콘 한번 켜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마트나 백화점이나 극장 같은 곳은 불야성을 이룬다. 공장은 전기로 용광로까지 돌린다. 워낙 싸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이나 독일의 1/3 수준으로 생산원가에도 못 미친다. 밀양 송전탑은 자본의 이윤과 자본의 시장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한전은 송전탑의 인체에 대한 피해는 과학적 근거가 없고 전기설비기술기준치인 전자파 833mG 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국제비전리방사선보호위원회(ICNIRP)의 ‘단기간 고노출’ 기준치를 가져온 것이다. 송전탑 아래 주민들은 24시간 1년 내내 전자파에 노출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자파 3~4mG를 발암 가능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송전탑 1km 이내의 집과 논은 재산 가치가 아예 사라진다. 평생 땀으로 일군 집과 논을 그렇게 빼앗기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송전탑의 인체에 대한 피해에 대한 과학적 논란은 실은 무망한 것이다.
지구온난화를 비롯, 매년 3%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 고장이 나도록 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지구가 더는 양립할 수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핵 발전은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지구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폭력이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와 사고 후의 범주도 없고 기한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은 핵 발전의 어리석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핵 발전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여전히 높지 않은 이유는 ‘핵 발전은 싸다’는 선전 덕이다. 핵 발전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발전 비용이 아니라 발전소 폐쇄비용과 핵폐기물 관리 및 사고 발생시 처리비용이다. 그걸 제대로 계산하면 핵발전은 가장 비싼 발전 방식이다.
11월 28일 고리 1호 핵발전소가 고장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한전의 주가는 떨어진 반면 재벌 계열 발전회사들의 주가는 즉시 올랐다. 현재 한전은 전기를 직접 생산하지 않고 구매한다. 민간 발전회사의 수익을 보장하는 독특한 구매 방식 덕에 전력 공급에 문제가 생길수록 한전은 비싼 값에 전기를 사야 한다. 지난해 3대 민간발전회사인 SK E&S, GS EPS, 포스코에너지의 영업이득은 8,400억 원이었다. 한국전력은 8,179억 원의 영업 손실을 봤다. 원가에 못 미치는 전기요금과 보조금으로 기업이 얻은 이익은 2조8천억에 이른다. 송전탑 사태도 여름마다 불거지는 ‘블랙아웃’ 위기론도 결국 자본의 한판 놀음일 뿐이다.
7순의 노인들이 7년 동안 매일 산을 오른다. 노무현 정권에서 시작했는데 이명박을 거쳐 이제 박근혜 정권이다. 노인들이 한전직원과 경찰과 용역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건 일상이다. 해도 해도 안 되니 할머니들이 나체시위도 했고 지난해 1월엔 할아버지 한분이 분신하기까지 했다. ‘전원개발촉진법’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된다. 유신 말기인 1978년 지금 대통령의 아버지 대통령이 만든 이 법은 사업 승인만 나면 도로법·하천법·수도법·농지법 등 19개 법령의 인허가를 생략한다. 힘없는 서민의 재산권과 인권을 무시하는 ‘법 위의 법’이다.
‘힘없는 시골 노인들이니 그렇지 강남 사람들이면 저리 함부로 하겠는가.’ 전쟁과 같은 밀양의 풍경을 보며 진지한 사람들은 한탄한다. 그러나 행여 그 노인들이 불쌍하다 여기거나 동정하는 건 금물이다. 그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연대의 정신을 이미 몸으로 구현하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산을 오르며 노인들은 말한다. “1,000가구 사는 데서 10가구 사는 데로 송전탑을 옮기라 카면 잘못 아이가? 반대로 사람 많은 데가 전기 많이 쓴다고 거기 세우라는 것도 잘못된 기다. 이제는 송전탑이 우리 마을 피해 딴 데로 간다케도 싫다. 사람은 그래 사는 게 아이다. 나 혼자 살 수는 없는 기다.” (경향신문 – 혁명은 안단테로)
gyuhang
2013/12/02 21:06
2013/12/02 21:06
트랙백 주소 :: http://gyuhang.net/trackback/2869
-
Tracked from www.moodle.iesgerardomolina.com
2014/08/11 17:22
삭제
GYUHANG.NET ::
|
|
|
댓글 ::